"이거 놓고 갈 게. 맛있게 먹어."
8일 오후 조정은(20'여'대구 달서구 두류동) 씨 병문안을 온 친구가 냉커피 한 잔을 정은 씨에게 주고 나갔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정은 씨는 항암 치료 후 입안이 헐어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친구는 안쓰러운 나머지 '달콤한 커피라도 마시면서 기운차리라'며 가던 길을 되돌려 정은 씨의 병실에 커피 한 잔을 사서 건넸다.
◆똑순이 딸에게 백혈병이라니…
조경진(45) 씨와 황환금(41'여) 씨에게 정은 씨는 '착하고 자기 앞가림 잘하는 똑순이' 딸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헤어 디자이너'의 꿈을 꿔 온 정은 씨는 고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미용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또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용돈은 직접 버는 그런 딸이었다. 조 씨 부부에게 정은 씨는 '복덩이'였다.
그런 정은 씨가 지난해 3월 갑자기 '소화가 안 된다' '배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토하기 일쑤였다. 단순한 소화불량인 줄 알고 찾은 병원에서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어린이들에게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은 씨는 성장이 거의 끝나가는 19살의 나이에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부모 속 한 번 안 썩인 아이예요. 그런 착한 아이가 갑자기 '백혈병에 걸렸다'는 말에 우리 가족은 부둥켜안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정은 씨는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항암제가 투여되면서 입이 헐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음식을 먹어도 토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은 씨는 '잘 챙겨 먹어야 낫는다'는 말에 토하더라도 끼니를 챙겨 먹었고, 입 안이 헐어 있는데도 구강청결제로 헹구며 소독하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데 열심이었다. 딸이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 조 씨는 안타까움에 속이 상한다.
"사람들이 정은이에게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니?'라고 물으면 정은이는 '그냥 머리가 멍해졌다'고 말해요. 하지만 전 백혈병이라는 말을 듣고 서럽게 우는 정은이의 모습을 봤어요. 저와 아내는 '요즘은 의술도 좋고 약도 많으니 나을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정은이를 달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돈 없으면 딸을 못 살리나요?
정은 씨는 지금 두 번째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올해 초에 항암 치료를 끝내고 집에서 요양하던 중 다시 귀 뒤쪽 부분이 부으면서 병원을 찾았고, '백혈병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때 주변에서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을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고, 이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의 한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서울의 종합병원에선 이들에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보다 절망감을 안겨줬다.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이 정은 씨 가족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선 제대혈 조혈모세포 이식과 해외에서 정은 씨에게 맞는 골수를 찾아 이식하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제대혈 조혈모세포 이식 비용은 2천만원이 넘고 골수 이식에는 비행기 운송비 포함 4천만원 가까이나 든다고 했다. 그리고는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된다면 신청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현재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 개인 파산 신청까지 한 조 씨 부부는 차마 신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울에서 치료받으면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올라간 이들은 크게 낙담하고 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면서 저와 정은이와 아내는 마주 보며 눈물만 흘렸습니다. 돈만 있었다면, 아니 돈을 빌릴 수만이라도 있었다면 내 딸 정은이의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을 텐데, 그걸 못해주는 저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내가 돈이 없어 딸이 죽는구나'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아버지 조 씨는 정은 씨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부터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식당에서 배달 일을 하면서 일당을 받는 조 씨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딸 생각 때문인지 배달 실수도 잦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은 씨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배달 일을 하면서 받는 조 씨의 하루 일당은 4만원 안팎. 한 달이면 100만원 정도 벌지만 정은 씨의 골수 이식비용은커녕 하루하루 늘어가는 치료비 대기에도 벅차다.
게다가 조 씨 부부는 현재 신용불량자 상태다. 조 씨의 동생이 사업을 하겠다며 자금 마련을 위해 신용카드를 빌려달라고 할 때 선뜻 건네 준 게 화근이었다. 이 때문에 1억원 가까이 되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조 씨 부부는 결국 신용불량자로 전락했고, 조 씨는 개인 파산까지 신청해야 했다.
조 씨 부부는 정은 씨의 건강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게 가장 두렵다. 7일에는 갑자기 혈압과 혈색소 수치가 떨어져 평소 항생제, 영양제 수액 등 3개 정도였던 주사액의 숫자가 5개로 늘었다. 이렇게 주사액의 숫자가 늘어나면 팔, 다리가 부어오르고, 이를 가라앉히기 위한 주사액을 또 맞아야 한다.
조 씨 부부는 정은 씨가 어서 나아 헤어 디자이너가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헤어 디자이너가 되는 것에 모든 걸 건 아이였어요. 어렵게 들어간 대학의 학과도 미용 관련 학과였구요. 학교 교수님도 정은이의 능력을 알고 밀어주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정은이가 못난 부모를 만나 고생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하고 불쌍해요.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서…. 정은이가 빨리 나아 꿈을 꼭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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