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눈에 밟히는 풍경

추억의 절반은 '맛'…구강포에서 전복 안주로 술 한잔

눈에 밟히는 풍경이 있다. 강진 앞바다인 구강포의 마량포구가 그랬다. '눈에 밟힌다'는 말은 정말로 재미있는 표현이다. 가고 싶다, 갖고 싶다, 보고 싶다, 그립다 등 모든 소원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 '짠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 번 가봤던 곳을 다시 가보고 싶을 때, 여행 중에 꼭 사고 싶었던 것을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못 샀을 때,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먼 곳에 있는 피붙이 얼굴이 보고 싶을 때, 그리운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워질 때 우리는 '눈에 밟힌다'는 말 한마디로 애틋함을 씻어낸다.

은퇴 후에 딱히 할 일이 없어 흐느적거리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동안 가고 싶어도 못 가본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통상 2박 3일 여정이었지만 때론 일주일이 넘을 때도 있었다. 여행지는 주로 바닷가 또는 섬이었다. 아무래도 산촌보다는 어촌이 생선과 갯것 등 먹거리가 풍성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녀온 곳은 의외로 많았다.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모두 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비례해서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도 그만치 많았다. 그런데도 굳이 구강포가 제일 먼저 눈에 밟히는 것은 고즈넉한 포구 풍경이 건드리면 툭 터져 한 줄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구강포를 처음 찾았을 때가 2년 전 눈 오는 겨울이었다. 지친 몸을 하룻밤 의탁할 민박에 들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달리는 차창에 비친 포구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데다 사방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그야말로 적막하고 쓸쓸했다. "오늘은 이 동네에서 자고 가지." 도반들 모두가 좋다고 했다.

방 앞이 바로 바다인 숙소에 들어 잠시 잠을 청했으나 눈은 말똥말똥했다. '해변의 길손'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작정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흰 눈에 덮인 포구는 엄숙한 노천 장례가 거행될 식장처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눈에 덮인 폐선과 방파제, 그리고 뭍에서 섬으로 연결되어 있는 보행자 전용 출렁다리는 장례식의 소품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어쩌면 슬픈 축제는 광란의 축제보다 한 수 위에 존재하며 장례의식은 혼인예식보다 미학적으로 더 아름답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출렁다리 어귀에 이르자 서쪽 하늘은 눈 온 뒤에 끼인 농무가 빛을 잃어가는 저녁답임을 알려 주었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랜만에 찾아온 사색의 시간을 앗아가 버렸다. 출렁다리를 건너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호사는 다음에 즐기기로 하고 돌아섰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6개월이 지난 후 초여름 길목에 다시 구강포를 찾았다. 지난겨울에 신세를 졌던 그 집을 숙소로 정하고 새벽같이 달려왔다. 마량 입구인 강진군 군덕면 쌍덕리 다리걸 옆 푸조나무와 굴참나무 두 그루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정자나무 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웠다. 오는 길목인 벌교시장에서 산 굵은 낚지 몇 마리를 삶았더니 낙지와 김밥 중에서 어느 것이 밥이고 어느 것이 반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숙소에 들기 전 마량 어시장에 들러 감성돔과 광어 각 한 마리(도합 7만원)를 저녁파티용으로 준비했다. 또 자연산 전복 1㎏에 5만원이란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것도 주워 담았다. 장보기를 마친 여섯 도반들은 점심때 과하게 먹은 낙지를 소화시키기 위해 산책에 나섰다. 그 길은 바로 오매불망 눈에 밟히던 출렁다리가 있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산책길은 길이 438m, 폭 2.6m인 보도 전용 출렁다리를 건너 작지만 아름다운 가우도를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아야 한다. 다시 선착장 부근에서 길이 748m 출렁다리를 건너 강진군 선전면 월하리 마을회관까지 나가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산 유배길인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목리마을→강진5일장→사의재→영랑생가로 이어지는 1코스(15㎞)와 연결된다.

오늘 산책은 월하리에서 되돌아오는 2시간 남짓으로 끝을 냈지만 갯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즐기는 풍광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눈에 밟히는 풍경은 밟히도록 그냥 두는 게 옳은지, 다시는 눈에 밟히지 않도록 실컷 밟아 보는 게 옳은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술상을 폈다. 물때를 벗겨 내고 뜨거운 김으로 쪄낸 전복이 술 맛을 당기게 한다. 술잔 속에 오늘 걸었던 출렁다리 길이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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