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의 내용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 2항은 민주(民主)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공화(共和)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도 없다. 정부 수립 당시 제헌의원들과 헌법학자들이 왜 공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을 터다.
유추컨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가 아닌 이상 주권자인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국가'사회가 굴러가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공화는 당연한 것이고 필수 요건이기 때문에 굳이 명시할 이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양한 민의를 하나로 모으고 국가 경영의 지표로 삼는 과정을 중시하는 체제가 공화국이라면 공화는 떡의 팥 고물이나 다름없다고 보는 것이다.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구절처럼 공화는 토론과 양보, 합의, 견제를 통해 결과에 이르는, 더불어 이루는 과정에 무게를 둔다는 의미다.
공화에 대한 해석 부재 탓인지 흔히 '5공'이라고 부르는 제5공화국 이후 국민 입에서 공화국이라는 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군사독재의 상징인 5공의 역설이나 북쪽 공화국에 대한 거부감이 깊은 탓인가. 요즘 민주주의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는 깃발은 요란하지만 공화국의 의미에 무게를 두는 국민은 거의 없다. 명칭뿐 아니라 공화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될지 매우 궁금하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공화가 실종된 연유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공화의 정신에 기초해 공화를 이끌어내고 실현해야 할 정당정치가 되레 공화의 가치를 훼손하고 그 정신마저 구겨놓고 있어서다. 권력을 쥔 여당은 야당을 무시하고 야당은 여당을 타도 대상으로만 보니 공화는 공허한 빈 소리가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국정원 개혁을 기치로 54일간 장외투쟁을 벌였던 야당이 마침내 장내로 돌아왔다. 여론의 공명이 생각만큼 크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주당은 '의회정치를 중시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여의도 회군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강도 원내 투쟁에 대한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통령의 불통 정치가 확인된 이상 야당 협조 없이는 그 어떤 핵심 사안도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며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여야가 서로 어르고 조르고 겁박하거나 투쟁해서라도 공화가 이뤄진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냥 5년 실권의 한풀이나 정족수 놀음이나 하면서 정국 발목 잡기라면 먼저 헌법 조항에 공화의 해석이 왜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원한다.
'가을 야구'를 향해 막바지로 치닫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고춧가루 부대'라는 말이 등장한다. 포스트 시즌 진출이 급한 팀에 일격을 가하는 약체 팀을 이르는 용어다. 시즌 내내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이기며 승점 자판기 역할만 하던 꼴찌 언저리의 팀들이 막판에 부쩍 힘자랑하면서 1승이 급한 팀을 물고 늘어진다. 이런 고춧가루 부대의 제물이 되는 중상위 팀은 뼈가 저리다 못해 아프다.
지금 우리 정치판 풍토가 꼭 그 짝이다. 타협과 리더십의 정치는 찾을 수 없고 판이 깨지더라도 체통이 먼저라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 여야 위치만 바뀌었을 뿐 서로 무릎 꿇기를 강요하고 있다. 고춧가루 부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약자의 상징이라면 우리 정치판의 고춧가루는 진영 논리에 파묻혀 상대의 뒷덜미를 잡고 몽니나 부리는 행태라는 점에서 보기 흉하다. 그 고춧가루에 국정원 개혁 문제, 기초연금 등 복지 논란, 경제민주화, 채동욱 검찰총장 사태, 국회선진화법, 교과서 문제 등 어디 하나 성한 것이 없고 국민들 재채기 소리만 요란하다.
우리 정치판에서 리더십의 정치가 실종되고 헤게모니 다툼이 극성인 것은 전적으로 정당의 책임이지만 유권자의 몫도 있다. 국가나 공동체, 보편타당한 가치나 합리적인 의회정치가 아니라 불안한 정당만을 바라보고 편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정치 리스크는 국민이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라틴어 격언에 "위험은 매입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공화가 실종된 지금의 상황이 길어질수록 모두에게 손해다.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의 공화를 하루빨리 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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