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 박남준(1957~)
뭉게구름이 세상의 기억들을 그렸다 뭉갠다
아직껏 짝을 찾지 못한 것이냐
애매미의 구애는 한낮을 넘기고도 그칠 줄 모르네
긴꼬리제비나비 노랑 상사화 꽃술을 더듬는다
휘청~ 나비도 저렇게 무게가 있구나
잠자리들 전깃줄에 나란하다
이제 저 일사불란도 불편하지 않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꽃 덤불 속에 몰려오고
봉숭아꽃잎 후루루 울긋불긋 져 내린다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 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 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
-월간 《현대문학》(20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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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몬순기후인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식으로 하는 쌀을 수확하는 시기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들판의 벼들이 하루가 다르게 익어간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나 보는 사람들 마음은 사뭇 흐뭇하다. 인생도 이런 때가 되면 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 좋은 가을, '버들치 시인'으로 통하는 지리산 악양고을 박남준 시인은 이 풍요로운 가을에 마루 끝에 나앉아 마냥 청승을 떨고 있다. 마치 풍요로운 가을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사위어가는 생명들과 적요로운 수작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그 저의에는 올해도 함께 무사히 지냈다는 안도의 한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생도 이런 때가 되면 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가을은 풍요와 적요가 함께하는 계절이다. 지난여름의 맹렬했던 기억과 함께 다가올 긴 겨울을 예감하는 마음속에도 풍요와 적요가 동거한다. 양쪽 다 감사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어느 나라든 가을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바치는 축제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도리이자 일말의 염치다. 하늘에 대한, 하늘을 위한, 하늘에 의한.
안상학<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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