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가을의 부뚜막들-장석주(1954~ )

여름 뜰이 윤리적으로 무너진 뒤

먼 데서 털을 세운 짐승들이 내려온다

궁리가 깊은 돌들과

파초가 잘 키운 상그늘 몇을 거느리고

국세청 세무조사팀보다는 덜 무서운 기세로

전무후무한 가을이 기습한 그 저녁,

이상한 게 이상한 것뿐이냐고,

쓸쓸한 게 쓸쓸한 것뿐이냐고,

항변하며 가을벌레들이 크게 우는 그 저녁,

내가 노동과 생계의 함수관계를 풀다 만 것은

오늘은 이미 내일의 옛날이기 때문.

지나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 지나가고

옛날은 자꾸 새로 돌아오기 때문.

검은 눈썹이 식는 가을 그 저녁,

우리는 흑설탕을 넣은 차를 마시자.

그동안 적조했었다, 옛날을 다 탕진하고

그늘의 무미함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 착해지려는 부뚜막들!

-계간 《詩로 여는 세상》(2013년 봄호)

주된 먹거리를 수확하는 가을도 대륙마다 서로 다르다. 쌀을 생산하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 10월 하순이 수확기다. 밀을 생산하는 유럽의 경우 8월 하순부터 9월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수확을 감사하며 치르는 의식은 대개 11월에 있다. 우리 같은 경우 진정한 감사제는 추석이 아니라 시사이다. 한 해의 대차대조표는 이 무렵 작성한다. 시인의 그 가을은 이십 년 전이다. 그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착해져온 시인의 자화상이다.

이 시는 장석주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로 이룬 성취와 성공한 출판사, 그 함수관계 풀다 말고 초야로 돌아간 지 스무 해 지난 노래다. 기나긴 겨울나기였을 것이다. 최근 왕성한 문필활동을 펼치고 있다. 제 모습이다. 이 시는 그의 삶의 여적이자, 현재의 모습이고, 다가올 옛날의 오늘이다.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아도 좋은, 반가운 부뚜막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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