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의사의 가운

의사를 연상할 때 대체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하얀색 가운이라고 한다. 그래서 왜 하필 하얀색인가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청결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그 이유를 물어보면 저항력이 약한 환자가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과연 그래서였을까? 가운의 역사를 살펴보면 의술과 의사가 걸어온 발자취도 함께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의사가 가운을 걸친 모습은 역사적으로는 중세 때부터 등장하는데 헐렁하면서 길게 입는 겉옷으로 무릎까지 오는 것, 발끝까지 덮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운은 상당 기간 동안은 그렇게 그저 작업용 외투의 개념이어서 양복 윗저고리까지 갖추어 입은 위에 헐렁하게 걸쳤고 색도 검은색과 베이지색 등으로 다양했다.

근대 이전의 의학은 요즘과 달리 미신과 비과학적 부분이 많았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로 과학은 급격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의학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옳은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인식돼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의사들은 의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실에서 연구와 실험을 시작했고, 그 결과 질병의 치료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뤄냈다. 이때부터 의사들은 스스로 과학자라 생각하게 됐고, 의사의 가운은 실험실에서 입는 흰색 코트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렇게 간략하게 지나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의사의 가운은 환자의 온갖 오염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고, 의학을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 실험실로 들어가면서 흰색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게 보면 흰색으로 바뀐 것도 실험실의 시약들과 가검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함일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염의 개념은 그 후에 도입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에 감염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아채면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수술하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기 시작했는데 독한 소독제 때문에 손의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미국의 외과의사인 할스테드가 수술실 간호사인 아내의 손을 보호하기 위해서 얇은 고무장갑을 만들어 씌어준 것이 1894년이었다. 수술 장갑도 의료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현대의학에서 흰색 가운의 첫 번째 목적은 두말할 나위 없이 환자를 감염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청결함이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의학 드라마를 보면 어디서 배웠는지 의사 역을 맡은 연기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가운을 풀어헤치고 펄럭거리면서 온 병원을 오염시키며 돌아다닌다. 기왕에 의사처럼 보이려면 굳이 어려운 의학용어를 어설픈 영어로 말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시청자들이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하고 제발 가운만은 좀 단추를 채웠으면 한다. 의사의 가운은 멋으로 입는 것이 아니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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