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에서 기르던 제비꽃이
꽃을 맺지 아니하거든
냉장고에 하루쯤 넣었다가 내놓으라고 합니다
한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보지 않은 푸나무들은
제 피워낼 꽃의 형상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차고 시린 눈이 꽃처럼 내리는 것은
바로 그 까닭입니다
잠든 푸나무 위에 내려앉아
꽃의 기억들을 일깨워줍니다
내 안의 꽃들을 불러외우며
나 오늘 눈 맞으며 먼 길 에 돌아갑니다
-시집 『목련꽃 브라자』(천년의 시작 2005)
그 옛날 처마밑에는 여러 가지 사연으로 복닥거린다. 우선 제비와 벌이 깃들여 산다. 이들이 자리를 비우면 호박고지나 곶감이 차지한다. 겨울에는 명태나 양미리가 목을 맨 채 꾸덕꾸덕 말라간다. 양지쪽엔 메주덩이가 내걸리고 뒤란 쪽 처마밑엔 시래기와 우거지가 살을 빼고 있다. 더러는 약으로 쓰는 들기름이 든 병이 삐딱하게 걸려 있기도 하다. 비가 오면 비를 긋는 사람들, 어두운 밤길을 걸어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백열등도 처마 밑이 자아낸 풍경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씨종자들이다. 옥수수, 조, 수수 등은 자루나 이삭 통째로 걸려 있다. 방에 들이지 않고 굳이 밖에 걸어 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겨울을 제대로 맛보지 않으면 발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칼바람도 맞고 눈발 맛도 보며 월동을 해야 속에 든 제 모습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실내에서 키우는 '제비꽃'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우리들의 삶도 사계절이 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겨울을 피할 수 없다. 사계절을 고스란히 겪는 만물과 다를 바 없다. 저마다의 내면에 있는 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눈 내리는 겨울들판을 반드시 건너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선은 머리에 눈꽃을 피워봐야 인생의 봄에 제대로 꽃을 피운다는 말씀이다. 설사 그 길이 '에돌아'가는 여정일지라도.
안상학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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