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한 번, 5년 동안 꼬박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병원을 찾던 할머니께서 벌써 3개월째 병원에 오지 않으신다.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으셔서 매번 딸이 겨우 부축해서 오시곤 했는데 아마도 이젠 거동조차 불편하셔서 병원에 오기 힘이 드신 모양이다. "우리 엄마가 2주에 한 번은 원장님 얼굴을 봐야 편안해 하세요"하던 따님의 얘기가 귓전을 맴돈다. 의사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된다.
2002년 1월 14일이 개원의로서 첫 진료를 시작하던 날이다. 나이는 서른일곱이었고 의욕만 앞섰던 젊은 의사라 환자들에게 얕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이려고 포마드를 듬뿍 바른 올백 머리를 한 채 진료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반백의 중년이 되었지만 말이다.
개원 첫날 내원한 환자는 22명이었는데 모두가 초진 환자일 수밖에 없고 나도 개원의로서 처음 진료를 하던 터라 진료 시작하고 마칠 때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온몸에 진땀을 흘리며 그렇게 하루가 지났던 것 같다. 통증 의사로서 수년간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며 준비를 하고 나름 자신감을 가지고 개원을 했지만 날 믿고 찾아주는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새로운 환자를 맞이할 때마다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게 당시의 나였다.
처음 병원에 와서 의사를 대하는 환자들의 태도도 제각각이었다. '네가 내 병을 낫게 할 수 있겠나? 내가 무슨 병인지 한번 맞춰봐라' 는 식의 불신의 눈빛으로 의사를 대하는 분도 계셨고, '선생님만 믿습니다. 낫게만 해 주십시오' 하는 읍소형의 환자도 계셨고, '안 낫기만 해봐라' 식의 협박형 환자들도 있었다. 진료 첫날 이런저런 유형의 환자들의 사연도 들어보고, 진찰과 치료를 하면서 '아! 이제 내가 정말로 의사의 길로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에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지' 하고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12년하고도 4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의사도, 직원도 많이 늘었고 병원 규모도 커지고 환자도 늘었지만 정작 의사로서의 나는 얼마나 발전하고 나아졌는지 스스로 반문해보게 된다. 매일 매일 아픈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치료하면서 요즘 많은 것을 느낀다. 특히 의사란 직업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고 낫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와 닿는다. 환자들은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지만 어떨 땐 치료라는 행위 자체보다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의사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 말고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의 지식을 두루두루 갖추어야 한다.
의사로 살아가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아플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매일 매일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배우가 연기하면서 타인의 삶을 살아 보듯이 의사도 환자를 만나고 얘기하고 치료하면서 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고 그를 이해하게 된다.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많은 경험을 하듯이 나는 환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는 셈이다.
개원의사로서 직업상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직급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의 경우 직급이 높은 공무원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낮은 직급의 공무원에게 공식석상에서 형님이라고 부르기는 쉽지 않지만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직급을 막론하고 누구나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 자신을 낮추고 먼저 다가간다면 어느 누구와도 쉽게 교류할 수 있고 친구나 형이나 아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의사로서의 좋은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2주에 한 번은 내 얼굴을 봐야 한다며 따님과 함께 병원을 찾으시던 할머니께서 다시 날 찾아오실 수 있을까? 만일 다시 병원에 오신다면 이렇게 맞이할까 한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저도 2주에 한 번은 할머니 얼굴을 봐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요"라고.
백승희/사랑모아 통증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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