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항상 주변국의 제1 타깃이었다. 역사상 930회쯤 된다는 외침. 단순 계산으로 5년마다 한 번씩 전쟁을 치른 셈인데, 그래서 한반도에서 성(城)은 숙명이었다.
단순 통계로 남한의 성곽은 1천 개를 넘어선다. 거기에 북한, 만주, 요동반도에도 한국 성들이 남아있고 우리 손길이 닿은 일본 열도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두 배는 늘어난다고 한다. 고대부터 대륙에서 일본으로 통하는 길목이자 남부지방 전략 요충지였던 대구, 대구와 성곽의 조합은 어쩌면 필연인지 모른다.
◆대구 성곽의 원형은 동천동 환호=고대 중국에서 주변국들의 미개와 문명을 논할 때 성곽의 유무로 그 논거를 삼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경세가 양성지(梁誠之)가 '조선은 동방에 있는 성곽의 나라'라고 웅변한 것은 중국에 우리의 문화적 자부심을 외친 제스처로 풀이된다.
역사상 기록으로 보이는 첫 성곽은 고조선의 왕검성이다. 성터 위치, 그 규모는 상세히 알 수 없지만 한(漢)의 침입에 1년 이상 버텼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단한 요새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검성에서 보듯 역사상 성곽의 등장 시기는 청동기시대였다. 본격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고 계급 간 갈등이 정복 전쟁으로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대구 첫 성곽의 흔적은 동천동 취락 유적에서 만날 수 있다. 2002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은 칠곡택지 3지구 발굴 과정에서 마을을 따라 둘러처진 환호(環濠'깊은 도랑)를 발견했다. 환호는 일종의 해자(垓子)로 마을의 중요 시설을 방비하는 시설이다. 도랑 옆으로 목책(木柵)까지 확인돼 꽤 중무장한 요새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충북 청원 쌍창리의 환호유적에서 7겹 목책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당시 부족 간 약탈이 전쟁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천동 환호유적은 점차 토성, 석성, 벽돌성으로 발전하는 한국 성곽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4, 5세기 대구 정치세력, 본격 성곽시대 열어=동천동 환호유적 이후 대구 성곽의 전통을 이어간 건 달성 토성이다. 대구 정신의 DNA로 불리는 달성은 대구 고대 역사를 펼친 대구의 원형질, 역사의 성지로 불릴 만하다. 일반적으로 달성은 4, 5세기 달구벌 성읍(城邑) 세력의 요람으로 알려졌지만 고대까지 역사를 소급하면 청동기시대까지 그 기원이 닿는다.
토성 맨 밑층에서 조개무지, 목책, 토기 파편 같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달성토성에 대한 간접 기록은 중국 사서에 언급된다. 삼국지 '한전'(韓傳)에 보면 '진변한엔 성곽이 많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진변한의 중요 축이었던 대구가 이 기록의 중심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4세기에 이르러 대구엔 대규모 정치체제가 등장한다. 이들이 국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상당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이 등장하면서 대구엔 본격적인 성곽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들은 대구 중심에 달성, 칠곡'북구 팔거리, 다사'화원'설화에 상당 규모의 읍락체제를 형성했다. 이들은 모두 경쟁하듯 성곽을 쌓고 있는데 달성 세력의 달성토성, 팔거리 세력의 팔거산성, 다사의 죽곡산성, 설화 화원의 성산리토성이 그것이다. 당시에 이들 집단 간 영토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성곽은 지역 정치체제 간 긴장 관계의 반영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 가야나 압독국, 신라 세력에 대비한 집단적 방어체계로도 해석된다.
◆낙동강변에 대가야 전술 성곽 급증=원삼국시대 대구 성곽의 원형은 적어도 삼국시대 초반까지는 전통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4, 5세기에 이르러 대구 주변에 심상찮은 전운(戰雲)이 형성된다. 긴장의 발단은 신라의 영토 확장이다.
일찍이 2세기 초 압독국을, 3세기에 영천 골벌국을 복속한 신라는 여세를 몰아 기수(騎手)를 서쪽으로 돌린다. 먼저 4세기 무렵 불로동 고분군 세력을 수중에 넣고 바로 달구벌 세력까지 수하로 끌어들였다. 동부 지역을 평정한 신라는 가야와 남부지방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대(對)가야 전선을 구축한 신라는 삼국 패권을 위한 정복전쟁에 나선다. 대구 성곽에 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건 이 시기다. 가야 국경지역에 축성이 급속히 이루어진 것이다. 화원'다사를 중심으로 하안(河岸)진지가 구축되고 낙동강 주변에 성곽이 집중된다. 문산리산성, 성산리토성, 죽곡산성 등이 그것이다.
원삼국시대 초기 각 정치세력의 성곽이 각각 영역 중심으로 불규칙하게 포진하고 있었다면 삼국시대 초, 중기 성곽들은 낙동강 상'하류에 걸쳐 일정한 방어패턴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성곽 벨트는 신라의 서진정책에 따른 가야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신라가 가야지역을 평정한 후에 이 산성들은 모두 신라의 영역으로 개편되고 전술적 정비를 거쳐 백제, 고구려 방어망으로 재편된다.
◆마무리하며=이제까지 대구에서 발견된 고대 성곽은 20곳이 넘는다. 청동기시대 환호시설부터 토성, 석성까지 모든 종류를 망라하고 있다. 양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숫자다. 고대 중국의 사서에도 기록이 보일 정도니 외국에서도 지역의 성곽을 주시했던 것 같다.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대구가 군사 요충지로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는 방증이다. 이런 적극적인 산성 축조 배경엔 내부적으로는 달구벌 내 정치세력 간 긴장'갈등관계가, 외부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 간 견제와 영토 전쟁이 대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하겠다.
현재 이들 성곽은 자치단체에서 모두 올레길, 산책로로 정비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 등산복 물결이 일렁이는 축대들은 1천500년 전 겁에 질린 초병이 강안(江岸)을 응시하던 긴장의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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