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목욕은 조금 특별합니다. 목욕에서도 공동체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목욕탕은 때만 벗기는 곳이 아니라 정을 쌓는 공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등을 밀어주며 한 뼘 가까워지고, 못했던 이야기도 탕 안에만 들어가면 자연스레 터져 나옵니다. '목욕을 같이한 사이'는 다른 말로 알몸도 스스럼없이 보여줄 만큼 친한 사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정을 쌓던 동네 목욕탕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인 욕조와 샤워 시설을 갖춘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되면서 대중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목욕탕, 그 끝을 붙잡으러 떠났습니다. 30년간 운영했던 목욕탕 문을 닫으며 아쉬워하는 80대 주인 부부, 목욕관리사와 이발사 등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또 대중목욕탕이 사라지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때밀이 문화도 담았습니다. 곧 새해입니다. 2015년 새해 결심 세우셨나요? 가까운 동네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기며 새해 결심을 세우는 건 어떨까요. 수십 년 뒤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지도 모를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으면서 말이죠.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동네목욕탕, 그래도 지킨다
갈수록 문을 닫는 대중목욕탕이 늘고 있다. 대구에서만 매년 수십 개씩 사라지는 형국이다. 대구시에 따르면 찜질방과 사우나 시설을 갖춘 대형 목욕탕이 대거 생기면서 2004년 목욕탕 숫자가 569개까지 증가했다가 올해는 392개로 곤두박질 쳤다. 자금난 때문에 남탕을 폐쇄하고 여탕만 영업하는 곳도 많다. 대구목욕장협회 대구시지회 김중원 사무국장은 "요즘은 집에 목욕 시설이 잘 돼 있어서 대중탕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4천~5천원대 목욕 요금으로는 유지가 안 되지만 찾는 사람이 없으니 요금을 올릴 수도 없다"며 "예전에는 보일러 기사들이 따로 있었는데 인건비가 많이 나가니까 사람을 내보내고 주인들이 직접 보일러를 고친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동네 목욕탕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30여 년간 한 동네를 지키며 손님들을 맞는 목욕탕도 있다. 계속되는 적자 속에 곧 문을 닫게 되는 곳도 있지만 그래도 버텨보려 하는 곳도 있다. 이런 동네목욕탕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봤다.
◆ 800원 요금이 지금은 5천원…그래도 적자, 30년 운영 뚝심…대구 중구 동인동 '라이온수'
대구 중구 동인동의 '라이온수'는 30년 동안 이 동네를 지켜온 뚝심 있는 목욕탕이다. 라이온수는 외관만 보면 30년 된 목욕탕처럼 보이지 않는다. 목욕탕에 애정을 갖고 80대 사장 부부가 시설을 꾸준히 고쳤기 때문이다. "작년에 사물함도 싹 다 새로 바꿨어. 10년 전 리모델링도 하고. 아 그리고, 사람들이 목욕탕 이름보고 우리 영감이 삼성 라이온즈 팬이라서 이렇게 지었느냐고 묻는데 아니야. 한자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이라는 뜻이야." 라이온수 안주인인 이모(80)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라이온수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984년. 당시만 해도 아파트가 많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에 화장실이 잘 돼 있고, 뜨신 물도 펑펑 잘 나오잖아요. 목욕탕에 올 이유가 없지. 아파트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진짜 많이 왔어. 남탕에 2명, 여탕에 3명씩 직원도 있었고. 보일러 기사도 따로 있었다니까. 요즘? 하루 손님 80명도 안 돼." 옛날 일이라서 가물가물 하다면서도 할머니는 정확한 숫자를 기억해 냈다.
라이온수의 전성기는 1990년대 초까지였다. 목욕탕 뒤편 500㎡(약 150평) 부지에 주차장을 만들 만큼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또 지금처럼 KTX가 없었던 시절, 여관도 함께 운영하던 라이온수에는 타지 사람들이 자주 묵어갔다. 이 할머니는 "한국은행 직원들이 일주일씩 자고 갔지. 지금이야 기차 타고 서울 대구 하루 만에 왔다갔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잖아"라고 했다. 목욕탕 입구에 앉아 할머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남편인 채모(82) 할아버지가 합류해 라이온수 자랑을 거들었다. "옛날에는 우리 목욕탕 물이 진짜 좋았어. 마산, 부산 전국에 물 좋다는 목욕탕에 다니면서 비결을 찾아냈거든. 그때 자화수( 자석 사이에 물을 통과시켜 자기처리한 물) 기계도 설치했어. 우리가 동인동에서 제일 먼저 도시가스 배관도 연결했다니까."
그 뒤 라이온수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30년 전 800원 하던 목욕비가 지금 여성 4천500원, 남성 5천원으로 올랐지만 상황은 지금이 더 열악하다. 채 할아버지는 "그때는 화력도 좋고, 값도 싼 벙커C유를 써서 경비가 적게 들어갔다"며 "지금은 도시가스를 쓰는데 요금이 5, 6배 올랐고, 수도, 전기 요금도 다 올랐다. 이 요금을 받아도 적자"라고 씁쓸해했다.
내년 3월이 되면 라이온수마저도 문을 닫는다. 계속되는 적자로 목욕탕 사업을 이어가기 어려워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30년간 정이 든 목욕탕 건물을 팔았다. "옛날에 이 동네 살던 사람들이 반야월, 가창에 이사 가서도 동네가 그리워서 우리 목욕탕에 온단 말이야. 이제 어쩌겠어. 문 닫으면 끝이지. 3월에 문 닫는다고 글을 써서 붙여야지." 괜찮다고 말하는 채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 정회원 있어도 이름 대신 '과일가게·채소가게'
원칙 대신 정으로…대구 동구 효목동 귀성탕
대구 동구 효목동의 귀성탕. 효목동 주민에게 "자주 가는 목욕탕이 어디냐"고 묻자 이 목욕탕 앞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목욕탕 앞에는 '목욕합니다'라는 간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귀성탕이 이곳을 지킨 지도 벌써 30년. 안주인인 성경희(67) 씨는 "10년 된 목욕탕 건물을 사서 20년째 영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30년 된 동네 목욕탕은 빡빡한 원칙보다 정으로 돌아간다. 귀성탕에는 정회원이 있다. 비용은 한 달에 7만원으로 인근 시장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다. 그래서 목욕탕 계산대 안쪽에 있는 종이에는 정회원 이름 대신 '채소가게' '과일가게'라고 적혀 있다. 전용 회원증을 만들 필요도 없다. 주인이 얼굴만 봐도 누가 누군지 다 알기 때문이다.
고객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귀성탕에는 고객을 유인하는 '마케팅 전략'이 있다. 바로 등밀이 기계다. 귀성탕에 목욕관리사가 2명이나 있는데도 등밀이 기계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혼자 목욕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예전에는 목욕탕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등을 밀어주며 정을 쌓았지만 요즘에는 이런 풍경을 찾기 어렵다. 이곳에는 카드 결제기도 있다. 7만원짜리 정회원도, 여러 장 묶어 파는 목욕 쿠폰을 사는 사람도, 4천500원짜리 목욕값도 카드 결제가 되고, 현금 영수증까지 끊어준다.
이날 오후 4시 30분까지 다녀간 손님은 약 120여 명. 얼핏 보면 많은 숫자 같지만 매출로 계산하면 54만원이다. 그래도 요즘은 겨울이라서 손님이 많은 편에 속한다. 귀성탕 주인 부부는 여름철에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물을 데우고 오후 7시까지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린다. 귀성탕 주인 부부는 목욕값을 올리자는 주변 의견에도 "그러면 손님이 더 안 온다. 절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친다. 성 씨는 "요즘은 겨울이라서 장사가 좀 되는 편인데 여름에는 계속 적자다. 여름에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면서"목욕탕이 큰 돈은 안 되지만 애들 공부도 다 시켰으니 영감이랑 죽을 때까지 계속 목욕탕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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