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간신: 왕 위의 왕

'흥청망청' 원조의 폭군…역사보다는 에로

폭정이 극에 달했던 연산군 11년, 왕과 간신, 그리고 '채홍' 사건을 소재로 하는 에로틱 사극 '간신'은 잔뜩 흥미를 끈다. 2005년에 개봉하여 천만 관객 기록을 달성한 '왕의 남자' 이래로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관상'(2013), '군도: 민란의 시대'(2014), 그리고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쓴 '명량'(2014)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웰메이드 사극은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영화 장르사적으로 사극을 볼 때, 196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 산업이 크게 성장한 황금기에 1차 사극영화 전성기가 왔고, 2000년 후반부터 최근이 2차 사극영화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프로덕션 비용이 매우 많이 든 사극은 보통 A급 제작으로 이루어지며, 그만큼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가 출연한다. 태조 이성계, 세종대왕, 영조, 정조, 이순신, 광해군, 연산군, 장희빈, 장녹수, 인현왕후, 명성황후 등 영화와 드라마가 자주 다룬 역사적 인물들은 당대 연기력과 인기를 인정받은 배우들이 맡아 짙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극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또 다른 요인은 한국형 영웅서사라는 점이다. 할리우드의 수퍼히어로물이나 중국의 무협물에서 주인공은 무법천지가 된 어지러운 세상에 나타나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대중에게 돌려준다. 대개 주인공은 권력자의 위치에서 군림하지 않고 평화로워진 그곳을 표표히 떠나는 결말로, 영화가 끝난 후에도 긴 여운으로 감동을 준다. 한국에서 사극은 정치사회적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진다.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해소해줄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는 대중적 무의식이 사극을 소환하고, 역사적 인물을 재평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 '간신'이 품고 있는 알레고리는 무엇일까.

연산군 11년, 조선 각지의 1만 미녀들을 강제 징집해 왕에게 바쳤던 사건인 채홍을 중심으로, 최악의 폭군이었던 연산군(김강우)마저 쥐락펴락하며 왕 위의 왕이 되고자 했던 희대의 간신 임사홍(천호진)과 임숭재(주지훈) 부자를 중심으로 치열한 권력 전쟁이 벌어진다. 채홍사로 부임한 임숭재는 미녀들을 강제로 징집했고, 이 여자들을 나라에서 관리하는 기생으로 구분하여 '운평'이라 칭했다. 그중 우수한 성적을 거둬 왕에게 간택된 자들을 '흥청'이라 하였다. 영화는 복수를 위해 운평에 들어온 단희(임지연)와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차지연)의 조종을 받는 기생 설중매(이유영)가 흥청이 되기 위해 벌이는 한바탕 경쟁으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 사건이다. 왕실 인물이 아니라 간신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엽기적 악행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하다고 한다. 단희와 설중매가 연산군과 맺는 관계는 매우 야하고 수위가 세다.

'천 년 이래 으뜸가는 최고의 간흉'으로 꼽히는 임사홍, 임숭재 부자의 사례는 역사 속 박제화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뼈아프다. 권력자에 아부하며 경쟁자를 밟고, 약자를 짓누르며 권세를 누리는 임 부자의 행각은 현실에서도 흔하게 목격되는 일이다. 리더가 달콤한 말에 취해 진실에 눈을 감을 때, 그 비극은 대중이 감당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각성하게 하며,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경고장을 보낸다. 채홍사라는 직업이 유신시대에도 버젓이 존재했고, 간신배들은 지금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는 대중의 분노를 화끈하게 발산할 매개가 되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노출 수위가 센 볼거리와 연산군의 엽기행각에 치중함으로써 다소 가벼운 오락물로 그치고 만다. 허구 인물인 두 여성 캐릭터의 개별 서사가 논리를 쌓아나가기엔 역부족이어서 역사 속 보편적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설득력을 놓친다. 영화는 화려하고 자극적이지만, 성찰적이거나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게 하지는 못한다. '역사'보다는 '에로'에 방점이 찍히고 말았다.

영화평론가'용인대 영화영상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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