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소 1인 주거면적은 13.86㎡(4.2평)이다. 옷장 하나 책상 하나면 꽉 차버리는 이 공간마저 사치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쪽방촌 사람들이다. 작은 매트리스만 한 공간이 그들에겐 몸 누일 곳 전부다. 취사, 수면과 유일한 여가생활인 TV 시청이 모두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에겐 일상의 삶조차 남루하다. 쪽방 문턱을 넘어서면 노숙자의 삶이 기다리고 있고 죽음이 바로 곁에서 동행한다. 우울, 비관 같은 부정적 정서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탓에 마음을 쉽게 열지도, 생각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절망으로 가득 찬 쪽방촌에 사랑을 퍼 나르고 희망을 비춰주는 사람이 있다. 쪽방상담소 장민철(40) 소장이다. 대학 때 현장학습을 나와 '6개월 실습 때까지만…' 하고 쪽방촌에 발을 담갔다가 15년째 발이 '묶여 버린' 장 소장을 평리동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초창기 쪽방촌'노숙인 복지 실무 주도
지금은 쪽방촌의 '수호천사'라는 닉네임이 자연스러워졌지만 장 소장이 처음부터 쪽방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처음 실습 장소로 배정받은 곳이 쪽방, 노숙인 시설이었다.
"비산동 쪽방촌을 방문하면서 깜짝 놀랐어요. 괭이부리마을, 꼬방동네 같은 소설 속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같은 도시 안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솔직히 이분들과 평생 같이할 자신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요. 실습기간 6개월만 채우자, 그다음엔 꼭 시설 좋은 '양지'로 가자. 그렇게 결심했죠."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갔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 소장은 발을 빼지도, 양지로 옮겨 가지도 못했다. "이때가 2001년이었는데 이 무렵부터 쪽방촌, 노숙인 복지정책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할 때였어요. 당시에 제가 일선에 있다가 보니 현장 정책 입안과 매뉴얼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어느덧 쪽방, 노숙인 복지의 현장 실무자가 돼버린 그를 자치단체도 복지단체에서도 놔줄 수 없었던 것이다.
◆여름이 더 힘든 쪽방촌 주민들
날씨는 자연의 섭리이고 인간 의지 밖의 일이지만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특히 쪽방촌의 여름은 무척이나 힘들다. 여름철 함석 지붕을 달군 열기는 쪽방 거주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보통 한여름 쪽방 실내온도는 30℃가 넘어간다. 더위에 지친 어르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리 밑, 가로수 그늘을 찾아가거나 집 앞 평상에 몸을 누이는 일뿐이다.
"차라리 겨울엔 최소한 전기장판은 있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등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여름엔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보통 방안에서 취사를 하는데 한여름엔 방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가요. 한 번 데워진 공기는 실내에 머물며 어르신들의 진을 빼버리기 일쑤죠."
쪽방상담소에서는 매년 혹서기마다 폭염대책 사업을 벌이고 있다. 기업체의 후원을 받아 선풍기나 냉방용품, 생수 몇 병을 넣어주고 있다. 대학생, 종교단체와 연계해 찜통 같은 골목을 돌며 주민들의 건강을 챙기고 말벗이 돼주기도 한다.
상담소에서 특히 신경을 쓰는 부분은 주민들의 건강상태. 장마철 일반인에게도 위험한 수인성 전염병이나 배탈, 설사 같은 질병은 면역력이 약해진 노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쪽방촌 노인들의 72%가 어지러움, 근육통, 두통, 구역질, 호흡곤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올 혹서기를 어떻게들 나실지 벌써 걱정이 앞섭니다."
◆소외계층의 쉼터 희망드림센터
대구에 공식적인 쪽방 거주자 수는 880여 명. 통계에 잡히지 않는 여인숙, 여관 거주자까지 합치면 1천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구 평리동에 있는 쪽방상담소는 '희망드림센터' 건물에 입주해 있다. 이 센터엔 모두 5개의 기관, 단체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동사업을 벌이고 있다. 건물 1층엔 '따신밥한그릇'이 입주해 있다. 기존에 운영해오던 반찬'도시락 배달, 무료급식소 기능을 확대 개편해 마을기업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기업체의 후원과 회원, 운영위원들의 출자로 이루어졌으며 일반인들도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수익금은 모두 센터로 선(善)순환되고 남은 음식도 모두 쪽방촌이나 불우시설에 배달된다.
이 건물 3, 4층엔 '희망하우스'가 있다. 장 소장의 역점 사업 중 하나다.
"2008년부터 노숙인, 쪽방 거주자들도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쪽방에서 나온 분들이 재활을 통해 임대주택에 들어가기 전에 머무는 곳입니다."
입주자들은 취업 후 임대보증금 100만원을 모으면 꿈에 그리던 '주거 상향'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제까지 6명이 쪽방에서 나와 희망하우스를 거쳐 임대주택으로 들어갔다.
쪽방상담소 사람들은 거의 매일 쪽방촌을 돌며 찬거리를 나르고 주민들의 안부와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 쪽방 거주자들은 사회와 오래 격리된 탓에 마음 문을 잘 열지 않고 대부분 건강 상태도 좋지 않다. 그럼에도 정기 방문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발길이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장 소장이 쪽방골목을 누빌 때 부모님들은 '저러다 말겠지' 하고 지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낮은 곳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 '그 일이 자식의 업(業)'임을 깨닫고 지금은 든든한 후원군이 되었다.
응원군은 또 있다. 바로 부인 김현애(33) 씨다. 자원봉사센터에서 처음 만나 바로 '필'이 꽂혔고 현장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 '내 반쪽'임을 알아챘다. 현장 사정을 잘 알아 서로 기피하는 까닭에 실현되기가 무척 어렵다는 '복지 커플'이 된 것이다.
매일 귀가가 늦고 집안일도 우선순위에서 밀리지만 둘 사이의 동지애(愛)는 웬만한 '외풍'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후원 문의 053)356-3494.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정민수 씨 쪽방 탈출기…10여년 간 쪽방·노숙인 전전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으로 출근해요
"음습한 지하에서 양지로 걸어 나온 저의 사례를 동료들과 나누고 싶어요."
정민수(가명'58) 씨가 서구에서 제조업을 하다 부도를 맞고 빚더미에 오른 건 2002년. 수억원대 연대보증금 때문에 친지들과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가족과는 결별해야 했다.
비산동 쪽방촌으로 흘러들어온 정 씨는 사는 듯 마는 듯 인생을 놓아 버렸고 밤에는 담배꽁초를 주우러 거리를 헤맸다. 곁에 있던 동료들이 '몹쓸 약'을 먹거나 철로 위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수도 없이 자살을 생각했다.
그 무렵 노숙자 캠프 재활 담당자에게서 참가 연락이 왔다. 프로그램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일당 1만5천원'이라는 조건이 그를 캠프로 이끌었다.
"2박 3일 갔다 오면 3만∼4만원 생기니까 그거 받아서 신나게 쓰고 죽자.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나 비슷한 처지의 노숙자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삶의 의지를 다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들 의지는 있었지만 그들을 재활로 인도할 사회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캠프가 끝날 무렵 그는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고, 귀가 버스 안에서 그와 동행했던 죽음의 그림자를 마침내 떨쳐낼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직업학교에 등록해 기능사 자격증에 도전했고 전기기능사 자격증까지 따냈다. 그러나 고령의 정 씨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대구경북에 이력서만 300장 가까이 뿌렸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쪽방상담소에서 정 씨에게 '따신밥한그릇' 배달부 자리를 제안했고 정 씨가 이를 받아들여 지금은 당당한 '직원'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이제 정 씨는 가정으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아직은 가족에게 진 빚이 있고 마음의 짐도 무척 무겁다. 아마 이를 모두 갚는데 1, 2년은 걸릴 것 같다고 말한다.(그때가 오기 전엔 얼굴과 실명 밝히는 일을 삼가 달라고 부탁했다.)
"기자 선생, 다음 인터뷰 땐 정면 사진으로 찍어줘." 우렁찬 시동 음을 남기고 정 씨의 오토바이가 배달장소로 바삐 달려갔다.
한상갑 기자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