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이욱열 한국가스기술공사 상임이사

"눈 오면 막혔던 이화령…민자 유치해 터널 뚫는 날 가슴 짠해"

▷1958년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동 출생 ▷구미초
▷1958년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동 출생 ▷구미초'대구 계성중'청구고 졸업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중앙대 행정학 석사'숭실대 정치학 박사 ▷국회 입법보좌관 ▷국민중심당'자유선진당 사무부총장 ▷건설교통부장관 비서실장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겸임교수 ▷강남대 행정학과 대우교수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 중앙회장 ▷한국가스기술공사 상임이사 겸 경영지원본부장(현)

이욱열(56) 한국가스기술공사 상임이사 겸 경영지원본부장은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인간관계가 최대 자산이다.

최연소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입법부에 발을 들여놓은 뒤 행정부, 정당, 대학 등에서 활약하면서 삶의 지혜를 배웠다. 대학 졸업 뒤 정치와 행정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행정학, 정치학 분야에서 석'박사 학위를 따냈고, 지금도 중국어 공부에 열정을 쏟는 등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 상임이사로부터 각 분야의 다양한 삶의 경험담을 들어봤다.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비봉산 줄기가 내려앉은 경북 선산읍 동부동에서 7남매 중 여섯 째, 쌍둥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정미소와 양조장을 하는 비교적 풍요로운 집안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같은 학교에 사촌형이 2명이나 있는 데다, 다툼이 생기면 쌍둥이 동생과 합세하는 바람에 아무도 우리 형제에게 시비를 걸지 못했다. 구미와 대구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친구들이 나와 동생을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나중에는 상대방이 아는 체를 하면 무조건 같이 아는 체를 하는 버릇이 생겼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동생 친구가 내 친구이고, 내 친구가 동생 친구가 되면서 우리 형제는 남들보다 친구가 2배가량 많다. 동생과 나는 운동신경이 발달해 구미중 2학년 때 전국소년체전 축구와 탁구 대표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한국가스기술공사는 어떤 회사인가.

▶한국가스공사가 100% 출자한 자회사다. 가스공사가 외국에서 액화천연가스(LNG)를 액화해 수입한 뒤 국내 4개 기지를 통해 전국으로 공급하는데, 이 기지와 파이프라인 등 생산시설을 유지'보수하고, 정비하는 회사이다. 시설관리와 정비, 관로 순찰이 주 업무이지만, LNG 탱크 설계와 초저온시설 유지관리기술도 갖고 있다.

-경영본부장 취임 이후 경영 방식에 변화가 있었나.

▶취임 당시 노조의 한 달간 파업 등 노사 관계가 극심한 대립 국면이었고, 정부에 의해 방만 경영 대상기관으로 지정돼 있었다.

노조와의 대화와 소통 강화로 상호 신뢰를 갖게 됐다. 방만 경영의 조기 해소와 노사 관계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고용노동부장관 기관표창을 받기도 했다.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의 정부기관 첫 경영평가에서는 A를 받아 30%의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특히 지난해 6월부터 올 5월까지 약 1년 동안 기술본부장을 겸직하면서 안전과 책임 정비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전국 13개 지사와 기지를 순시하는 등 사고율 '제로'를 달성했다. 그동안 전국 기지와 지사를 승용차로 순시한 주행거리는 6만2천㎞였다.

-향후 공사의 발전 방향은.

▶공사 매출액의 63%가 인건비일 정도로 노동집약적이다. 정원 1천359명과 외주 500여 명을 포함해 임직원이 약 1천900명이다.

모회사인 가스공사에 대한 의존 비율을 낮추고 해외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85% 이상인 모회사 의존 비율을 60% 대로 낮추겠다. 2019년까지 LNG 관로 공급은 산골 오지를 제외하면 거의 포화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해 기술력을 높여야 한다. 또 세계 여섯 번째 기술력인 초저온탱크 설계기술과 초저온설비 유지보수기술을 활용해 해외시장 확충에 나서겠다.

그동안 공사 신성장센터 내 연구팀만 있었는데, 올해 8월부터 이를 기술연구소로 승격시켰다.

초저온시설을 유지'보수하는 기술, LNG 탱크 설계기술, 도서지역 LNG 주유(벙커링)기술 등이 공사의 특화된 기술이고, 앞으로 경쟁력을 더 높여야 할 기술이다. 에너지기술기업인 만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기술 개발에 매진할 계획이다.

-국내 최연소 보좌관을 지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3년 한 뒤인 1988년(13대) 31세에 이정무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입법부에 입문했다. 이후 이승무 의원, 신국환 의원 등을 모시면서 13, 14, 15, 17대까지 16년 동안 보좌관 생활을 했다.

-보좌관으로서 기억에 남는 일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문경 이화령에 눈이 많이 오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주민 숙원사업이 이화령 터널을 뚫는 것이었다. 이승무 의원 보좌관 시절 문경 이화령 터널 공약을 내세웠으나 쉽지 않았다. 주무 부처인 국토부 부산국토관리청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전화를 하거나 방문하는 통에 '와 또 왔십니까?'가 담당자들의 인사치레였다. 처음엔 친절하던 공무원들도 이후 내가 나타나면 슬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국고에 민간자본을 투입해 터널을 뚫은 전례가 없어 공무원들이 난처해했다. 국무회의를 거쳐 관보에 고시해야 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절차가 복잡했다.

'국민이 편하도록 해야 할 일을 국가가 대신 하는 것 아니냐'는 끈질긴 설득과 집요한 구애 끝에 행정 절차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2월 초 매서운 추위 속에서 이화령 터널 민자 유치 공사 기공식이 열리던 날, 가슴이 짠했다.

-행정부 경험은.

▶1996년 4월 15대 국회 때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이 돌풍으로 50석을 얻었고, 13대 때 인연을 맺었던 이정무 의원이 자민련 원내총무로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원내총무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듬해 DJP연합으로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뒤 이정무 원내총무가 1998년 건설교통부장관으로 취임했고, 장관 비서실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않고 구미공단 우회도로, 낙동강 제방 둑 설치 등 구미시 숙원을 해결하면서 구미지역 민원해결사로 온 힘을 쏟았다.

-정당 경험은.

▶국민중심당 2년, 자유선진당 4년 등 6년 동안 정당생활을 경험했다.

17대 총선 때 신국환 의원이 행정고시 동기인 충청권 심대평 의원과 손을 잡고 국민중심당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이때 신 의원을 따라가 국민중심당 사무부총장을 맡았다.

2008년에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 인연을 맺었다. 자유선진당 홍보위원장을 맡아 1년 동안 보궐선거 등을 무난하게 치른 뒤 이듬해 5월 사무부총장 일을 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1년 6개월 동안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원안 사수를 위해 궐기대회를 비롯한 집회를 주도하느라 밤낮과 휴일이 없었다. 이후 이 총재의 정무특보와 특보단장, 대전시당 선거대책위 부위원장 등을 잇달아 맡았다.

-또 다른 경험은.

▶인터넷언론 단체 회장과 대학 강의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2010년부터 2012년 6월까지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 회장을 맡아 인터넷신문의 질 향상과 위상 제고에 저 나름의 역할을 했다. 전국 90여 개 회원사를 둔 협회를 비영리법인으로 등록하고, 세미나를 여는 등 지역 인터넷언론의 위상을 높이고 정화하는 역할에도 힘을 쏟았다.

한국체육대, 강남대, 대구대 등지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한 것도 보람이었다.

-대학 강의를 통해 느낀 점은.

▶경제적 현실이 대학생들을 지나치게 옭아매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와 토익 공부 등에 매몰되는 등 취업 경쟁과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간접 체험했다. 대학 졸업 전부터 학자금 대출로 힘겨워하고, 졸업한 뒤에는 인턴직 등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리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대학 본래의 기능을 살리지 못하고 청년층 일자리 부족을 양산하는 사회구조적 문제 해결 필요성을 절감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지난 20여 년간 입법부, 행정부, 정당, 대학교수 등 다양한 경험으로 균형감각을 얻게 됐다. 특히 폭넓은 인간관계와 함께 인생의 멘토를 얻었다.

이정무 전 장관으로부터 '겸손'을, 봉명그룹 출신의 이승무 전 의원으로부터 '베풂의 덕'을 배웠다. 또 산업자원부장관을 두 번 지낸 신국환 전 의원에게서는 불리한 환경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추진력과 용기',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로부터는 '원칙과 소신'을 배울 수 있었다. 이들 정신적 멘토들은 결국 '성실성'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내 삶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향후 계획은.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고향 발전과 후진 양성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겠다. 특히 대학에서 다양한 경험을 자산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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