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검사 생활 21년을 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온 정상환(51) 변호사.
정 변호사의 그동안의 주 관심사는 공명정대한 법집행이었다. 특히 억울한 사람, 소외받는 이들에 대해 주목했다. 실체적 진실, 객관적 사실에 천착했다. 그러다 보니 주범이 바뀐 서울 양재동 다방 여주인 살해사건의 실체를 기소 후 밝혀냈다. 대구지검 의성지청장 시절에는 재소자와 그들 자녀의 재활을 돕기 위해 한빛장학회 설립을 주도했다. 또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과 주미 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을 거치면서 흑인에 대한 스스로의 편견을 깼다. 이후 흑인 인권운동에 대해 관심을 쏟았고, 그 결과물이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를 법률가적 입장에서 다룬 책 '검은 혁명-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이다.
앞으로 억울한 이들을 위한 변론에 더 관심을 쏟겠다는 정 변호사의 검사관(觀)과 경험담을 들어봤다.
-검사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이태원 살인사건과 유사한 성격의 서울 양재동 다방 여주인 살해사건이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담당 검사로 있을 때였다.
옛 동서지간인 남자 2명이 유력한 용의자로, 서로 상대방이 죽였다고 했다. B씨는 A씨에게 수차례 '무선호출기'(삐삐)로 연락해 결국 현장에 A씨가 왔다고 했고, A씨는 삐삐 소리를 듣지 못해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A씨는 자신이 살해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B씨는 자신은 망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A씨가 흉기로 여주인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이들 2명은 강도 등 강력범죄를 같이 한 전력이 있었다. 2명 모두 살인죄로 기소한 뒤 20일 이상 조사를 벌였다. A씨가 처음 주장한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가 A씨의 부인에 의해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고,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가 사체부검 결과 등을 종합할 때 A씨가 주범이고 B씨가 종범이라고 판명했다.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나.
▶경찰, 법의학자까지 A씨를 주범이라고 여겼지만, '너무 억울하다'는 A씨 주장을 듣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에서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통상 기소를 하면 조사를 끝내는데, 이후 더 면밀히 추가적인 조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A씨의 부인도 알리바이에 대해 '내가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사건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보면서 두 사람의 진술이 모순되는 점은 없는지, 알리바이는 확실한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왜 거짓말을 하는지 등을 살폈다. 결국 당초 판단이 잘못됐다고 보고 공소장을 변경했다.
-결론이 어떻게 뒤집혔나.
▶기소한 뒤 마지막 현장검증이라고 하고, A씨와 B씨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억울하다는 A씨 주장의 진위 여부를 밝히기 위해 A씨 몸에 소형 녹음장치를 부착하고, 현장검증 마지막 쉬는 시간에 단둘이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A씨와 B씨의 대화는 이랬다. A씨는 "기소도 됐고 이제 다 끝났다. 솔직히 말해봐라. 왜 그런지 이유나 알자"고 말했다. B씨는 "형이 나를 경찰에 꼬질렀잖아(소재지를 알려줬잖아)"라고 했고, A씨는 다시 "나는 네가 살인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나한테 얘기했을 것 아니냐. 그냥 경찰이 연락처를 묻기에 말했을 뿐이다"고 답했다. 결국 B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과 자백을 받아냈다. 검사 생활을 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고 보람이 있었던 사건이다.
대구지검 특수부장을 할 당시 대구의 사학비리를 수사해 밝혀낸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일부 사립 전문대학 설립자들이 공금횡령 등 비리를 저지른 사건이었다.
-검사로서의 바른 자세나 태도는.
▶양재동 살인사건에서 보듯 사실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그 사건을 조사하면서 '실제로 억울한 사람이 처벌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검사는 억울한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사건처리를 공명정대하게 해야 한다.
스스로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게 사건을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실체적인 판단을 잘못하면 곤란하다. 기계적으로 사건 기록이나 증거 여부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의 하소연도 새겨들어봐야 한다. 힘들더라도 (가해 및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 특히 억울하다는 사람의 얘기는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경청한 뒤 판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건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의지와 집념이 필요하다. 또 주변의 부탁이나 윗선의 압력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
-검사 시절 위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이 있나.
▶대구지검 특수부장 할 때 아주 민감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는데, 당시 법무부나 대검에서 전화 한 통 받은 적이 없다. 다만, 검사를 하다 보면 명시적인 압력뿐 아니라 '잘 좀 처리해 달라'는 등 우회적이거나 세련된 방식의 부탁 또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같은 방식에도 부담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 부담을 갖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검은 혁명'이라는 책을 출간한 배경은.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검사 시절인 1996년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1년 동안 유학을 갔다. 집값이 싼 뉴욕 맨해튼 할렘에 살면서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에 다녔다. 미국 간 지 며칠 만에 가게 주인이 흑인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생겼다. 이후 한동안 해만 지면 무서워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흑인들과 어울려 생활하면서 편견을 깰 수 있었다. 특히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유치원에 가면 우리 아이가 흑인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하는 것을 보면서 '다음 세대는 이 같은 편견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백인보다 흑인들과 동행할 때 오히려 정서적인 공감과 푸근함을 느꼈다. 당시 킹 목사, 말콤엑스 등에 대한 책을 많이 읽으면서 미국에 한 번 더 올 기회가 있으면 법률가 입장에서 흑인에 대한 책을 써보자고 생각했다.
이후 10여 년 만인 2007년부터 3년 동안 주미 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근무하면서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를 쓰게 됐다. 흑인 오바마가 대통령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고, 결국 당선돼 취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책 출간을 결심했다. 그동안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들은 흑인 인권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법률가 입장에서 흑인 인권과 법률상 지위 등에 대해 쓴 책은 보지 못했다. 흑인 인권운동이 미 연방 대법원 판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도 짚었다.
-재소자와 자녀들을 위한 장학회 설립을 주도했는데.
▶1990년대 말 의성지청장 당시였다. 청송감호소(현 경북북부교도소)가 관할이었는데, 그곳에 흉악범과 문제 재소자가 많았다. 이 중에서도 다시 제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거나,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생활하는 이들 자녀의 재활 지원을 위해 한빛장학재단이 출범됐다. 이 재단에 지금도 자그마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수입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라'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학교 다닐 때부터 모범생으로, 양지에서 순탄하게 살아왔다. 공직에 있을 때는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뒤도 돌아보고 주위도 살펴보면서 살겠다. 특히 변호사를 하면서 돈 되는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보람 있는 일에 열정을 쏟겠다. 오해나 억울한 일에 얽혀 가해자나 피의자의 처지에 놓인 사건에 대해서는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더라도 사건을 맡아 진실 규명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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