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시아파 지도자 집단 처형이 중동의 양대 맹주이자 라이벌인 사우디와 이란 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하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가 시아파 지도자가 포함된 테러 혐의자 47명을 집단 처형하고, 이에 시아파 본산인 이란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수니-시아 간의 오랜 종파 갈등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3일(현지시간) 이란 반관영 ISNA 통신과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사우디 당국은 2일 시아파 지도자 셰이크 님르 바크르 알님르 등 테러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47명의 형을 집행했다.
처형된 47명 가운데 시아파는 알님르를 포함한 4명이었다. 알님르는 이슬람 수니파 맹주를 자처하는 사우디 내에서 인구의 15%에 불과한 소수 시아파 권익 보장 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사우디는 특히 알님르의 혐의에 대해 '타크피리(이단·시아파) 사상을 품고 외부 세력과 결탁해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설명함으로써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테러 지원 세력으로 공공연하게 지목했다.
종파·반(反)테러 프레임을 이용한 사우디의 도발에 이란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란 외교부가 주테헤란 사우디 대사대리를 불러 처형에 항의한 데 이어 3일에는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까지 나서 "사우디 정치인들은 신의 복수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반응에 사우디 외무부와 아랍에미리트(UAE) 외무부는 2일과 3일 자국 주재 이란 대사를 불러 "내정간섭으로 간주되는 적대적 발언"이라며 맞섰다.
사우디는 또 3일 별도 성명을 통해 "이란이 테러리즘을 지원한다는 민낯을 드러냈다. 이란은 중동 테러리스트의 파트너"라고 역공했다.
양국 정부와 수뇌부가 설전을 이어가는 사이 이란에 있는 사우디 외교공관이 2일 밤 규탄 시위를 벌이던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수도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 일부가 불에 타고 파손됐고 이란 제2도시 마슈하드의 사우디 총영사관 앞에서도 이란 시위대가 총영사관에 돌과 불붙은 물건을 던지고 사우디 국기를 찢었다.
이와 관련, 이란 당국은 항의 시위 도중 사우디 대사관에 침입해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른 혐의로 40명을 검거했다.
이란에 있는 사우디 외교공관이 물리적인 피해를 당하자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3일 오후 트위터를 통해 "사우디 외교공관을 공격한 것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극단 성향의 개인적인 행동"이라며 "내무부와 정보당국, 사법부가 협조해 공격한 이의 신원을 밝히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란 사법부의 골람호세인 모흐세니 에제이 대변인도 3일 "사우디 공관 공격은 이란의 현행법에 어긋난다"며 "법에 따른 처벌이 이뤄질 것"이라고 과격 시위를 비판했다.
테헤란시는 이날 사우디 대사관 앞에서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비상조치를 취했고 이란 외무부도 사우디 외교공관 주변에서 시위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성난 군중에 의한 이란 내 외교공관 공격은 국교 단절까지 이어진 사례가 있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시 주테헤란 미국대사관을 444일간 대학생 시위대가 점령하고 대사관 직원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터져 미국과 국교가 끊어졌다.
2011년에도 11월 영국이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에 동참하자 이에 항의하는 강경파 이란 대학생 시위대가 주이란 영국대사관과 관저를 점거하면서 양국 대사관이 폐쇄됐다가 핵협상이 타결된 지 한 달 뒤인 지난해 8월 재개됐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중심국인 사우디와 이란은 종파 갈등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 패권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해온 앙숙이다. 최근에는 예멘과 시리아 내전, 이란 핵협상 등 역내 주요 이슈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웠다.
일각에서는 극단주의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를 위해 양국이 손잡을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됐지만 이번 처형과 대사관 공격으로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이란뿐 아니라 주변 시아파 국가나 조직의 분위기도 심상찮다.
시아파 정부가 통치하는 이라크에서는 지난해 25년 만에 개설한 사우디 대사관을 다시 폐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라크 시아파 최고지도자인 아야툴라 알리 알시스타니도 사우디에서 처형당한 시아파 지도자들을 '순교자'로 규정하고 그들이 부당한 공격으로 피를 흘렸다고 비난했다.
자국 영토 내에서 IS와 전쟁 중인 이라크는 사우디가 같은 종파인 IS를 적극적으로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구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조직 헤즈볼라는 성명을 발표해 "알님르 처형은 암살이자 추악한 범죄"라며 "사우디 체제를 보호하는 미국과 그 동맹들도 여기에 도덕적이고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다.
갈등이 번지자 국제사회에서는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사우디의 우방이지만 최근 핵협상 타결로 이란과도 거리를 좁히며 IS 격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사우디 정부를 향해 인권을 강조하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국 국무부 존 커비 대변인은 2일 "알님르 처형으로 종파 갈등이 악화될 위험이 있다는 점이 특히 우려스럽다"며 "사우디는 긴장 완화를 위해 모든 공동체 지도자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알님르 처형은 이미 중동 전체에 큰 피해를 입힌 종파 갈등을 더욱 키우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외무부도 "중동의 커지는 갈등과 깊어지는 균열에 대한 우리의 우려가 더욱 강해졌다"고 사우디의 처형 강행에 유감을 표명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설명에서 사우디의 집단 사형에 유감을 표하고 이란 시위대에는 자제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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