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튼 트럼보. 그는 194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에 40여 편 이상의 영화 각본을 썼을 뿐 아니라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스타작가였다.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던 그는 냉전시대에 '공산주의자 색출'을 구호로 결성되었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HUAC)가 만든 영화계 블랙리스트 '할리우드 10'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매카시 상원의원이 시작하여 미국 전역에 악명을 떨친 '빨갱이 사냥'은 황금기를 구가하던 할리우드를 온통 뒤흔들었다. 이 사건 이후 할리우드의 황금기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영화 '트럼보'는 영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사건이 배경이다.
'할리우드 10'의 중심인물이었던 달튼 트럼보가 바로 주인공이다. 관객들은 그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의 영화를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트럼보는 오드리 헵번을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로마의 휴일'(1953)을 쓴 실제 작가로서, 1947년부터 1960년까지 11개의 가짜 이름으로 활동하며 '로마의 휴일'과 '브레이브 원'(1956)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엑소더스' '스파르타쿠스' '영광의 탈출' '빠삐용'이 그가 쓴 시나리오다. 그리고 '로마의 휴일'이 개봉한 지 40년 만에 오스카상(아카데미상)은 원래의 주인을 찾아갔다.
1943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그 후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고 급기야 의회 모독죄로 감옥에 가게 된다. 출소 후에도 트럼보는 본인을 고용해 줄 영화사를 찾지 못하는 등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그는 B급 영화 제작사인 킹 브라더스와 손잡고 필명으로 극본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매카시즘이라는 광기와 할리우드의 여파를 다룬 작품으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영화 '추억'(1973)이 있다. '트럼보'는 '추억' 이후 할리우드의 매카시즘을 가장 잘 다룬 영화인 듯하며, 최근 개봉한 코엔 형제의 영화 '헤일, 시저!'의 진지한 드라마 버전이다. 007 패러디 영화 '오스틴 파워' 시리즈의 감독 제이 로치가 연출을 맡았으며, 브라이언 크랜스톤, 다이안 레인, 헬렌 미렌, 존 굿맨, 엘르 패닝 등 쟁쟁한 연기자들이 출연한다.
영화는 황금기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이면과 실명으로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한다. 근육질 스타라고 생각했던 커크 더글러스가 강단 있고 영리한 제작자였음을, 서부극의 영웅이자 고독한 사나이의 표상 존 웨인이 당시 소심하고 쩨쩨하게 행동했음을,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며 영화 역사상 가장 힘센 배우임을 증명한 도널드 레이건이 어떻게 정치적 존재감을 확고히 드러냈는지 등, 깨알 같은 정보를 알아가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자잘한 이야기들 가운데 트럼보라는 한 작가의 흥망성쇠 및 극적인 개인사가 주요 이야기로 전개된다. 영화는 트럼보의 작가로서의 직업적 영역과 가장으로서의 가족 영역을 서로 교차시키며, 미국 근대사의 집단적 광기가 재능, 열정, 소신을 간직한 한 개인의 명예와 실존을 어떤 식으로 짓밟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작가가 주인공이니만큼 재기 넘치는 대사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거나 새롭게 재연한 거친 질감의 흑백 다큐멘터리 영상이 삽입되어 역사적 사실성을 더욱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부유한 좌파에서 교도소 생활 이후 생존을 고민할 정도로 피폐해졌음에도 지적인 유머 감각을 버리지 않는 모습은 우리 삶에 큰 귀감으로 다가온다. 목욕을 하는 중에도 글을 쓰고, 쉴 새 없는 노동의 와중에도 걸작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것은 스스로를 끝까지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자존감과 어른으로서의 품위일 것이다.
자유주의 시스템에서 한 사람의 뇌 속까지 샅샅이 검토하고자 했던 무모한 행위가 전체에게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지 역사는 말해준다. 7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지만, 국가기관의 개인 사찰 사건이 흔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오버랩되며 개인의 표현과 권리가 유린되는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등장하는 볼거리와 극적인 이야기 구조, 트럼보 가족들의 소신 있는 선택, 저항과 전복의 시대인 1960년대가 어우러진 매우 의미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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