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여성앵커 1호 박찬숙

"결혼했다고 잘리고 이유없이 잘리고…그래도 꿋꿋하게 용기냈다"

사진 최민아 객원기자
사진 최민아 객원기자

여성 앵커 1호, 달리 소개가 필요 없는 방송인이다. 1968년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방송을 해오고 있다. KBS 9시 뉴스, 심야토론, 무엇보다도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 의 진행자였다. 지금도 경기방송에서 를 진행하고 있다.

순탄하기만 한 인생은 아니었다.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해야 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해직을 당했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방송을 하지만 2003년 이후 또다시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당했다. 그리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4년을 보냈다.

그런 인생을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보통의 방송인이 잘 하지 않는 일을 많이 했다. 동네에서 작은 옷가게를 하기도 하고, 소설을 써서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여러 차례 전시회를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가 2015년 대구 세계 물포럼의 전시였다.

좋은 계절,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는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박찬숙 앵커를 만났다. 그의 인생과 방송, 그리고 깊은 마음을 담아내는 사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병준: 목소리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특별히 관리를 하시나 보다.

박찬숙: 잘못 들으신 것 아닌가? 귀가 나빠지셨거나…(같이 웃음). 사실 목소리뿐만 아니라 피부나 미용 등 신체에 관한 것을 특별히 관리한 적은 없다. 건강한 몸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김병준: 타고난 방송인이신가 보다. 방송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셨나?

박찬숙: 1968년, 대학졸업 후 KBS 공개채용 1기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당시는 문화공보부 소속 방송직 5급을,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시험 같은 것이었다.

김병준: KBS 아나운서를 5급 공무원으로 뽑았다는 것이 재미있다.

박찬숙: 그때는 그랬다.

김병준: 여성이 시사 프로그램을 하기 쉽지 않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시사 쪽으로 성장할 수 있었나?

박찬숙: 프로그램도 여성이 하는 것과 남성이 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여성은 주로 어린이프로 가족프로 음악프로 등을 맡았다. 그런데 나는 묘하게도 좌담 프로그램 같은 걸 많이 맡게 되었다. 당시는 남성들도 꺼리는 일이었다.

김병준: 꺼릴 이유가 있었나?

박찬숙: 모시기 어려운 분들을 만나는 것이라 겸손해야 하고 예의를 차려야 했다. 그러면서 질문은 질문대로 해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런 일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질문도 별 두려움 없이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이런 걸 담당하는 사람으로 되어 갔다.

김병준: 젊은 여성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박찬숙: 체질인 것 같다. 사람이나 일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덕택에 방송이 아니면 만나지 못할 분들을 많이 만났다.

김병준: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있나?

박찬숙: 모두 귀한 분들인데 그중에서도 1970년대 초반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의 인터뷰를 잊을 수 없다.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전투를 같이했고,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다. 일정 기간 인터뷰를 해 나갔는데 여러 일이 있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김병준: 어떤 일인가?

박찬숙: 자유중국(대만)의 장개석 당시 총통을 만나러 가게 되어 있었는데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애를 태우셨다. 인터뷰를 해 나가는 중에 여권이 나왔다. 너무 좋아하셨다. 마침 항일 독립운동을 다루었던 회고록 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주시며 대만을 갔다 올 테니 잘 읽고 독후감을 써 놓으라 하셨다. 그런데 그 며칠 후 갑자기 돌아가셨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영결식 때 나와 인터뷰하셨던 말씀이 육성으로 나갔다.

김병준: 입사 초년생,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런 큰 인물들과 인터뷰를 해 나갔다? 참으로 대단하다. 앵커가 된 건 언제였나?

박찬숙: 1976년이다. 사실은 방송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들어왔다.

김병준: 무슨 말인가?

박찬숙: 1973년 결혼을 한 뒤 KBS를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KBS가 공사(公社)로 바뀌면서 결혼한 여성들을 내 보냈다. 그래서 유학을 간 남편과 함께 외국에 머물고 있는데 KBS 최고위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거기서 밥해주고 있을 사람 아니니 들어오라고 했다. 회사로 돌아오니 보도방송 쪽으로 발령을 내주었다.

김병준: 그래서 여성 앵커 1호로?

박찬숙: 여성이 진행하면 뉴스가 가벼워진다는 생각이 있을 때였다. 남자 앵커 역시 자신의 권위가 떨어질까 봐 여성과 진행하기를 꺼렸다. 내 경우도 남자 앵커들이 받아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다 어떻게 주말 뉴스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김병준: 1호라는 것에 자부심이 클 것 같다.

박찬숙: 그렇지 않다. 여성 의사나 변호사 1호라고 하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자기 노력으로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회사가 발령을 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김병준: 아무 근거 없이 발령을 냈겠나. 인터뷰 실력이나 상황 분석력, 의미 전달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박찬숙: 언젠가 서울시립박물관이 도전적인 삶을 사는 여성을 주제로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사양을 하다가 결국 여성 앵커 1호로서 이력과 활동을 소개하게 되었다. 그런 뒤 어떤 신문에서 칼럼을 읽었다. 1호의 진정한 가치는 첫 번째라는 숫자보다 그것을 통한 사회적 확산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여성 앵커가 된 이후 MBC를 비롯한 다른 방송사도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런 부분은 솔직히 뿌듯하다.

김병준: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다가 험한 일을 당하셨다. 해직 말이다.

박찬숙: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뒤 해직을 당했다. 담당이사를 찾아가 해직 사유를 물었더니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어디선가 명단이 왔다는 거다.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 "진흙탕에 박힌 수레바퀴도 위로 올라올 때가 있다. 오늘의 해직이 내일의 영광이 될 날도 있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김병준: 그대로 받아들인 건가?

박찬숙: 그렇다. 그냥 해직이 아니었다. 3년간 재취업 금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갑갑한 마음에 아파트 텃밭에 고추를 심고 가꿨다. 그러던 중 동네의 작은 옷가게 주인 아가씨가 문을 닫고 대학원을 간다고 했다. 바로 내가 하겠다고 했다. 새벽에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에 나가 옷을 사다가 가게에 진열해 놓으면 아침 7~8시가 됐다. 이렇게 2년을 했다.

김병준: 소설도 썼던데.

박찬숙: 친구가 문화센터에 가서 시를 배우자고 했다. 마지못해 따라갔는데 그 반은 이미 다 차고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등록한 게 소설반, 선생님이 작가 이호철 선생이었다. 습작을 내었는데 이를 읽은 선생님이 왜 신춘문예에 내지 않았느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게 계기다. 아하, 내게 글 쓰는 재주가 있나 보다 했다.

김병준: 그래서 본격적으로 쓰게 되나?

박찬숙: 아니다. 띄엄띄엄 신문에 칼럼을 썼다. 당시 잘나가고 있던 여성잡지 에 이란 기명 칼럼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유명 잡지에 기명 칼럼을 쓴다는 게…. 그러면서 소설도 조금 썼다.

김병준: 조금 쓴 정도가 아니다. 로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이 작품이 포함된 소설집 를 내기도 했다. 그 길로 계속 갔어도 되는 것 아닌가?

박찬숙: 능력이 부족한 걸 안다. 평생 글쓰기에 매진해 오신 분들이 있다. 문장 하나를 놓고 쓰고 또 쓰고, 국어사전이 닳도록 단어를 챙기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그분들과 같은 길을 갈 수 있겠나.

김병준: 아무튼 그러다가 다시 프리랜서로 방송으로 돌아가게 되고, 1994년에는 를 맡게 된다.

박찬숙: KBS 라디오 정오뉴스 뒤에 시사프로가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책임자를 찾아가 나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수십 년 방송을 하면서 어떤 프로그램을 맡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하고 싶었다. 또 잘할 것 같았다.

김병준: 좋은 프로였고 또 잘하셨다. 적절하고도 날카로운 질문으로 청취자들을 사로잡았다. 나도 간간이 출연하곤 했다.

박찬숙: 질문이 공격적이라는 항의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인기가 좋았다. 시사프로그램은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 청취율이 높다. 그런데 이 프로는 점심시간인데도 청취율이 높았다.

김병준: 그렇게 아끼던 프로그램을 왜 그만두셨나?

박찬숙: 2003년 6월까지 9년을 했다. 그리고 그만둔 게 아니라 잘렸다. 이것만 잘린 게 아니라 맡고 있던 다른 방송사 프로에서도 차례차례 잘렸다. 이유는 모른다.

김병준: 당시 정부에 있던 사람으로서 당혹스럽다. 그때로 돌아가 무엇이 이유인지 알아보았으면 좋겠다.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한 방송사가 아니라 복수의 방송사가 차례차례 그만두게 하나.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박찬숙: 를 그만두는 날 마지막 멘트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납니다"가 아니었다.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김병준: 그리고는 곧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셨다. 방송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어떻게 했겠나? 방송과 국회 어느 쪽을 택했겠나?

박찬숙: 당연히 방송이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억울한 것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하기 위해 방송을 그만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방송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병준: 사진을 찍으신다.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박찬숙: 2011년이었다. 사업가이면서 30년 이상 사진작가로 활동한 분이 40년이나 찍혀봤으니 찍는 것도 잘할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카메라를 샀다.

김병준: 주로 무엇을 찍나?

박찬숙: 새벽이나 이른 아침, 물을 많이 찍는다. 새벽빛에 반응하는 물과 그 결, 물에 비친 거미, 비를 맞고 있는 꽃 등이다. 너무 아름다운 소재들이다. 물은 빛과 바람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빗속에 있는 꽃은 빛 속에 있는 꽃보다 더 아름답다. 스스로 많이 놀란다.

김병준: 전시회도 여러 차례 한 것 같다.

박찬숙: 2011년과 2014년 개인전을 했다. 그리고 2015년 대구에서 세계 물 포럼이 열렸을 때 조직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일주일 동안 전시를 했다. 여러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들까지 참석한 포럼이었다. 정말 큰 영광이었다.

김병준: 첫 전시가 2011년이면 찍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개인전을 했다는 말 아닌가?

박찬숙: 그렇다. 6개월 만에 개인전을 했다. 사계절을 찍어 보지도 않고 무슨 개인전이냐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꼭 얼마 만에 하라는 법이 있나. 이렇게 하는 것이 '박찬숙 스타일'이라고 했다.

김병준: 기술이나 숙련의 문제라면 얼마나 길게 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사진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6개월 만에 왜 못하느냐는 말에 동의한다.

박찬숙: 누구나 다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그래서 시선이 어디에 멈추느냐, 즉 무엇을 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또 그를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찍는 것 자체는 오토에 놓고 그냥 누른다. 특별한 조작도 하지 않는다. 누구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다.

김병준: 스스로 아마추어인가, 아니면 프로페셔널 작가라고 느끼는가?

박찬숙: 당연히 아마추어다. 우리 같은 사람을 프로라고 하면 이 일에 수십 년 헌신해온 분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두말할 것 없다. 아마추어다.

김병준: 여전히 용기가 대단하시다. 젊은 시절 두려움 없이 인터뷰를 할 때나, 냅다 옷가게를 시작하는 것, 소설을 쓰는 것, 그리고 이렇게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여는 그런 용기가 부럽다.

박찬숙: 용기로만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용기는 주저하다가 하는 것인데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한다.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망설이지 않는다. 그런 자세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김병준: 용기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묻자. 세상이 똑바로 안 돌아가니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미래에 큰 불안감을 느낀다.

박찬숙: 인공지능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으로 5년 안에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10만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한다. 엄청난 속도의 변화 때문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걸 인정하면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처만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김병준: 많은 분들에게 용기를 줄 것 같다. 오늘 감사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