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미가 낳은 항일 의병장 왕산 허위] <8> 서대문형무소에서 횃불 사그라들다

단두대에 선 허위 선생은 죽음 앞에서도 단연코 흔들림이 없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도 있을 법한 데 그는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부르짖었다. 항일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고 나서도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더 이상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국내외에서 항일의병운동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허위를 사형시키기로 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항일의병정신은 이병채와 김규식, 권중설, 고재식, 김좌진, 홍범도 등으로 이어지면서 항전을 불태웠다.

왕산 허위 선생이 처음으로 사형당했던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전병용 기자
왕산 허위 선생이 처음으로 사형당했던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전병용 기자

◆부하의 배신으로 일본군에게 잡힌 허위

1908년 5월 중순 일본 통감부(統監府)는 바빠졌다. 허위의 은신처를 알아챘다. 허위의 부하 중에 한 명이 일본군에 밀고한 것이다. 통감부는 즉각 군사 300여 명을 보내 허위를 체포할 것을 일본군 유산헌병분견소와 철원헌병분견소에 명령을 내렸다.

6월 11일 밤 일본군 300여 명은 영평군 서면 유동(현재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유동리) 허위의 은신처를 급습했다. 급습을 당한 허위 부대는 손 쓸 틈이 없었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한 허위는 곧 서울로 압송됐다.

서대문형무소 12옥사 1호 방에 갇히게 된 허위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탄을 했다. 의병 탄압의 최고 지휘자였던 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이 직접 고문을 했다. 비록 체포된 몸이었으나, 허위는 조금도 굽힘이 없이 일제의 침략 상을 성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허위는 의병을 일으킨 동기에 대해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대한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이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고 했다.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좌시할 수 없어 구국의 대열에 동참했으며, 국권수호와 일제축출, 이것이 바로 의병을 일으킨 동기이자 투쟁목표였던 것이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이 곧 의병을 일으킨 기인(基因)임을 명쾌히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임하는 것을 비유하면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팔·다리와 신체를 주무르고 두드리면 일견 병자를 고통에 떨어뜨리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마침내는 병자의 병이 낫게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

명석원이랑의 말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이 일시적으로 한국민에게 고통을 가져올지 모르지만, 종국적으로 보면 한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하게 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허위는 겉은 붉지만 속은 남색으로 된 책상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을 보라. 일견 붉은색이지만, 그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일본이 대한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이 없이 명백한 것이다"고 일본 침략의 기만적 속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허위를 심문하던 명석원이랑은 그의 고매한 인격과 강직한 성품에 감복해 그를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존경했다. 심지어는 허위의 구명운동까지 벌였다고 전해진다.

명석원이랑이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허위를 가리켜 "몇백 몇천의 의병장 가운데서도 열력(閱瀝)과 성망(聲望)이 뛰어나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아 중민(衆民)의 섬기는 바 되어 이르기를 선생(先生)의 경칭(敬稱)으로 대한 사람이다"고 했다.

일본 최고의 사령관이던 명석원이랑조차 허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격과 덕망에 감회를 받아 그를 '선생(先生)'으로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는 것이다.

왕산 허위 선생이 투옥됐던 서대문형무소. 전병용 기자
왕산 허위 선생이 투옥됐던 서대문형무소. 전병용 기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통감부는 답답했다. 날이 갈수록 의병들의 항일전쟁이 국내를 넘어 만주 등 해외로까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더욱 철저하게 허위가 외부와 연결할 수 없도록 차단했다.

그렇지만 서대문형무소 내 교도관 김형소는 허위의 고매한 인품에 감동해 외부와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김형소의 덕택으로 허위는 영어(囹圄)의 몸이 됐지만,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메모지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결국 통감부는 허위를 사형시키기로 했다. 허위는 1908년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서대문형무소에는 사형시설이 없었다. 일본은 허위를 사형시키기 위해 서대문형무소 옥사 옆에 사형장을 급히 만들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허위는 33일 만에 사형을 당했다.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는 차가운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의병을 가두기 위해 일제가 서대문형무소를 지은 이래 첫 번째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포승줄에 묶인 허위는 형형한 눈빛과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형장을 향해 걸어갔다.

행여 난동이라도 부릴까 봐 양쪽에 선 일본 헌병들이 자신의 양팔을 붙들자 허위는 가벼운 몸부림으로 헌병들의 팔을 떨쳐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사형장 앞에 다다른 허위는 나뭇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미루나무를 잡고 한탄을 했다. "아직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는구나."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밖에 있는 미루나무.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하기 전에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을 했다고 해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밖에 있는 미루나무.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하기 전에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을 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린다. 전병용 기자

사형장 앞을 지키고 있는 미루나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애국지사의 억울함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미루나무는 사형장 건립 당시에 심어졌던 것으로 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이 나무를 붙들고 통곡을 하며 생을 마감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사형장 안에도 미루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았는데, 억울한 한이 서려서인지 잘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애국지사들은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을 했다.

사형장에 들어선 허위는 당당했다. 사형장은 교수형 집행을 위한 마루판과 교수줄, 의자 등이 있었고, 마루판이 밑으로 내려가는 구조이다. 형이 집행되기에 앞서 왜승(倭僧)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읽으려고 하자 허위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라고 대성일갈하며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또 검사가 그에게 사후 시신을 거둘 이가 있느냐고 묻자 허위는 "죽은 뒤의 염시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이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변을 했다.

이로써 일생 구국의 일념을 견지하고 항일투쟁으로 일관했던 허위는 54세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처음에는 경성감옥이었다가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 서울형무소(1945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87년)로 바뀌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함에 따라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수감인원이 500여 명으로 일본의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주로 수감됐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의열투쟁과 비밀결사 요인들이 주로 수감됐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 민족대표 33인을 비롯 3천여 명에 육박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다.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비밀결사, 각종 의열투쟁, 해외 무장투쟁, 사회·문화·노동·농민·학생운동 등의 활동을 펼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해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 됐다.

비록 허위는 순국을 했지만, 그의 영향을 받았던 이병채와 김규식, 권중설, 고재식 등의 부하 의병장들이 그의 뜻을 받들어 의병투쟁을 이어나갔다. 이병채와 김규식은 그뒤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만주 독립군의 핵심간부로 무장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권중설과 고재식 등은 국치 전까지 항일전쟁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창의원수부대장이 돼 김천일과 이인용 등과 함께 포천지방에서 의병들을 지휘하고, 징발문을 발포하면서 1910년 3월 13일 적성 헌병분견소에 체포되기 전까지 혼신의 사력을 다해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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