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의 공간 '書院' <끝>-유교와 불교문화의 공생

지난해 2월 유교·유학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안동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통
지난해 2월 유교·유학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안동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통'화합'봉사를 구현하고자 천주교·개신교·불교·유교·민간신앙 등을 하나로 아우른 '종교타운'이 들어섰다. 안동시 제공


조선 500년은 유학과 불교의 대립 속에서 유학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민·대중들에게는 불교가 신앙의 대상이었다. 유학이 귀족 계층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불교는 서민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학은 자연스레 상류 계층을 형성했고, 불교는 하류 계층에 파급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들에게 불교는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양반 사대부가와 불교의 교류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동은 주자학을 한국적 성리학으로 집대성한 퇴계 이황 선생을 배출할 만큼 조선조 500년을 지탱해 온 정치적 철학을 제공했던 지역이다. 조선조 대표적인 유교의 고장이었다. 이런 유교문화·선비문화·양반문화가 팽배했던 안동이었지만, 유교와 불교의 공생과 교류는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건물인 법흥동 임청각은 불과 100여m 곁에 국보 7층 전탑과 함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도산서원과 용수사가 그랬고, 봉정사와 도심 속 대원사 포교당이 그랬다. 유교의 고장에서도 불교문화가 찬란히 꽃피울 수 있는 종교적 공생의 토양이 가능했던 안동이었다.

◆삼국시대에도 공생한 유교와 불교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에서는 침류왕 원년(384),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법흥왕 5년(518)에 국교로 성장했다. 불교는 통일신라시대까지 개인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행복을 비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신라가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 시절에 불교의 사상적 비약이 이뤄졌다. 주역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다.

유교 역시 고구려가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불교가 들어왔던 소수림왕 2년에 태학을 건립해 유학을 교육했다. 고구려의 학제는 귀족을 위한 태학과 평민을 위한 경당이 있었는데 두 곳 모두에서 유교 사상을 가르쳤다. 백제에도 건국 초기에 유학이 전파됐고 4세기 무렵에는 완전한 교육제도를 갖추었다. 신라는 이보다 늦은 6세기 무렵에 유학이 전해졌다. 신라는 가장 늦게 유학을 받아들였지만 설총(薛聰) 같은 뛰어난 유학자를 배출했다. 설총의 아버지는 한국 불교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원효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불교와 유교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공생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불교는 서서히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신유학이라 불리는 주자학을 도입한 신진 사대부들이다.

안향(安珦'1243~1306)의 제자 백이정이 주자(朱子)의 신유학을 들여왔다. 신진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무기로 불교의 약점을 공격했다.

특히,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유교와 불교의 명암을 표현했던 '숭유억불'과 관련해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조선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고, 20세기 이후 일본 학자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말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 문헌 사료에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요시한다는 '숭유중도'(崇儒重道)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유교와 불교를 극명히 대비시킨 정치·이념적 선전 문구인 숭유억불은 나오지 않는다"며 "이미 고려 때부터 성리학을 수용하고 1340년대에 주자의 사서집주가 고려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면서 유교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했다.

◆대유학자 퇴계, 유교와 불교 사이 칸막이 걷어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조선 대유학자 퇴계는 7세부터 도산서당 자리에서 7㎞ 떨어진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유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지만 퇴계는 유교와 불교 사이에 칸막이를 쳐놓은 시대적 제약을 넘어섰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 종가 뒤편 퇴계 선대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재사(齋舍)인 수곡암(樹谷庵). 이 암자는 퇴계 선생이 50세 되던 해 집안 묘소를 관리하고자 용수사의 설희(雪熙) 스님에게 부탁해 지었다고 전한다. 노송정 종가 이창건 종손이 건넨 수곡암 기문에는 '동당(東堂)은 유생이, 서당(西堂)은 설희 스님이 거처한다'는 내용과 재사에 불교 건물에 붙여지는 '암'(庵)자를 붙인 것이 유독 눈에 띈다.

이에 대해 이동승 전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는 정리(情理)라고 해석했다. 묘소 앞에서 지내는 제사의 법도는 원래 종가의 의례였으나, 지파의 후손이 참석하는 것을 정리상 나무라지 못하듯 나라의 억불정책에도 몸과 마음으로 체득된 불교와의 인연을 무자비하게 끊어내는 것은 선비의 처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퇴계 선생의 '불교 수용관'이었다는 것.

경기대 김창원 교수도 자신의 글 '도산십이곡의 형상 세계와 불교'를 통해 유학과 불교의 융합, 퇴계 선생의 철학 속에 녹아 있는 불교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글에서 "조선전기 향촌사회의 유생들은 16, 17세기 그들의 독서 공간이었던 서당 및 정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 대부분 암자나 원찰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독서, 휴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며 "그러다가 암자를 개축해 서당 또는 정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퇴계 이황의 집안에는 두 곳의 분암(墳庵·선영 인근에 지어 제사를 지내고 묘지를 관리하던 역할)이 있었다. 고산암(孤山庵)은 첫째 부인 김씨 분암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수곡암이었다.

도산서당이 지어지기 전 수곡암은 퇴계 선생이 독서하고 공부하면서 쉬었던 곳이다. 분암과 정사에는 스님들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글에서 "서당 및 정사는 양반들의 독서처였던 절과 암자의 연장에서 지어졌다. 그것들 대부분은 스님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졌으며 도산십이곡이 담아내고 있는 불교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안동 종교타운 등 전국 곳곳에서 유·불 공존과 상생

유교와 불교 등 종교적 상생은 지금도 곳곳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안동은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가 꽃을 피우고,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가 만개했다. 다시 가톨릭이 들어왔을 때에는 전국 대표적 가톨릭농민회 세력이 강했던 곳으로 주목받았다.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안동은 100년 역사의 경안노회가 존재하는 등 다양한 종교가 공생해 온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근현대 민족의 수난기에 왜소해진 천도교와 증산도 계통의 민족 종교와 원불교 등 자생 종교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종교 박물관 같은 도시다.

안동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개신교·불교·유교·민간신앙 등을 하나로 아우른 '종교타운'이 조성돼 있다.

천년고찰 밀양 '표충사'(表忠寺) 남쪽 별원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 처영대사를 모시는 유교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이곳은 불교와 유교문화가 공존하는, 종교의 벽을 허문 복합문화공간으로 해마다 어울림 축제와 유교와 불교가 만나는 사명대사 춘계향사가 봉행된다.

청송군 청송읍 보광골에 위치한 청송 '만세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9호)도 유교와 불교의 상생공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광사 사찰내에 본존불을 모시는 극락전과 문중의 시조묘를 추모하기 위한 묘재각인 만세루,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 등 유'불'선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유교와 불교, 도교가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판단하고 있다.

조형도 안동시 문화유산과장은 "안동은 조선조 대표적 유학의 고장이었지만, 대유학자 퇴계 선생의 유학과 불교의 융합 철학이 널리 전파되면서 유·불 공생 관계가 지속돼 왔다"며 "이 같은 종교 간 상생 분위기는 최근까지 이어지면서 종교 간 화합과 상생을 바탕으로 한 안동 종교타운 조성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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