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알프레도-비올레타)를 남자의 아버지(제르몽)가 억지로 떼어 놓는 이야기다.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남성 사교계 모임에 종사하는 여성이다. 어느 정도 지식과 교양을 갖춘 '화류계 여성'으로 보면 된다. 알프레도는 그녀를 사랑한다.
오랜 연모 끝에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의 사랑을 얻고, 그녀와 동거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돌아서서 사교계로 다시 가버리자 '배신자'로 간주하며 모멸을 준다. 사실 비올레타가 알프레도 곁을 떠난 것은 '자신의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아버지 제르몽의 간곡한 당부 때문이었다. 이 오페라를 두 번 관람했는데, 그때마다 여주인공 비올레타를 안쓰러워했고,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 트라비아타'를 세 번째 관람한 것은 작은 민간극장에서였다. 무대는 소박했고, 음악은 피아노 반주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 공연에서 나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아들이 사교계 여성과 동거하고 있음을 안 아버지 제르몽은 그들의 거처를 찾아간다. 아들이 집을 비운 사이, 아버지 제르몽은 비올레타에게 아들 알프레도가 어린 시절 어떤 아이였으며,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며, 아들이 장차 집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지, 자신이 아들과 함께 바라보고 싶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잔잔한 바리톤으로 노래한다. 그리고 부디 자신의 아들과 헤어져 달라고 당부한다.
내게 그날 공연의 주인공은 비올레타나 알프레도가 아니라 아버지 제르몽이었다. 이전까지는 아버지 제르몽이 두 연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보였는데, 그날은 비올레타가 아버지 제르몽의 삶과 사랑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보였다.
아버지 제르몽 역을 맡았던 바리톤의 노래와 연기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 아들이 이제는 소년이 아니라 청소년이고, 오래지 않아 어른이 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내 속에서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연인의 입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입장에서 공연을 감상했던 것이다.
문학과 음악, 미술 등 예술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줄기(혹은 줄거리)가 아니다. 줄기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누구나 이미 아는 줄거리임에도 예술작품이 세월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견뎌내고 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감상하는 사람의 처지와 시선에 따라 하나의 작품이 다른 작품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창의성을 강조한다. 창의적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하다. 늘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그렇다고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자니 무기력과 우울감이 밀려온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곁에는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있고, 인간에게는 하나의 작품을 여러 가지로 감상할 줄 아는 재능이 있다.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창조를 경험할 수 있다면, 밋밋한 일상도 얼마든지 리듬을 탈 수 있다. 19일(금)과 20일(토) 2018 대구국제오페라축제 폐막작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다. 이번 주말엔 리듬을 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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