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그이는 가야만 하나요?

권영재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1961년 12월 31일 7시 반 한국에 처음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할 때까지 KBS는 라디오 방송만 했다. 그 무렵 어느 해 4월1일 대구 KBS 방송국의 이교석 아나운서가 아침 뉴스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만우절이 꽤 의미 있는 날처럼 대접받던 시절이라 이 아나운서도 '오늘 정오까지 대구 방송국에 오면 선착순 5명에게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준다'고 장난기 있는 방송을 했다. 요즘 가치로 치면 대형 TV나 김치냉장고 쯤 될까 그 귀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타보겠다고 대구 시민들이 개미떼처럼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방송국이 있는 공회당 앞마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방송국 사람들은 만우절이라 웃자고 한 소리인데 설마 했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방송국 홀이 부셔질 뻔하고 사과에 또 사과를 거듭한 뒤 군중들은 흩어져 갔다.

이교석은 결국 KBS에서 쫓겨나고 CBS 기독방송국으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단 혼자 방송을 하게 되니 또다시 웃지못할 일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방송 중에 용변이 급해 화장실을 가야할 판인데 그런 형편이 못되어 결국은 신문지에 실례했다는 소리도 들렸고 종합운동장에서 야구 중계를 마친 뒤 방송국으로 올 동안에는 아나운서가 없으니까 음악만 홀로 안테나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 무렵 국영인 KBS도 아나운서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서울말을 할 줄 모르는 유필기 아나운서, 서울말 가능한 이원춘 아나운서 그리고 홍일점 박숙희 아나운서 정도가 있었다.

이 무렵은 전쟁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시기라 시민들은 서양 음악에 목말라 했다. 양키 시장 약장수의 유행가, 칠성시장 신천변에서 부르는 약장수 판소리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미군방송 AFKN에서는 미군들과 함께 들어온 서양 노래 '당신은 나의 태양(You are my sunshine )'이 흘러나오고 '삐빠빠 룰라(Be-Bop-A-lula )'가 춤을 추는데 한국 K.B.S의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나 현인의 '고향만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시류에 부합해서 대구에 단 두 개 있던 라디오 방송국 KBS와 CBS에서도 낮과 저녁때 짧게 '뽀뿌라 송(Popular song)'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일본식 발음인 '뽀뿌라 송'도 결국 유행가라는 말의 영어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게 서양 뽕짝도 외국말로 하니 있어 보였다.

그 어설픈 일본영어가 매끈한 '팝송'이란 본토 발음으로 바뀌면서 서울 KBS에서 '5분만 쉽시다(Take five)'라는 시그널 음악으로 본격적인 팝송의 시대가 열렸다. 한동안 다방에서는 도끼 빗을 든 음악 DJ 오빠들이 손님들에게 신청곡도 받고 음악 해설도 하며 설래발 치고 있었다. 동아 방송에서 김동욱이 '행복한 날은 다시 오고(Happy day come here again)'라는 오프닝 음악으로 방송국 신청곡을 받는 제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울 KBS에서는 '빗줄기의 리듬(Rhythm of the rain)' 대구 KBS에서는 '그이는 가야만 하나요?(He'll have to go?)'를 오프닝 음악으로 신청곡 받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이 오니 젊은 팬들은 이날 만은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방송을 들었다.

"당신의 부드러운 입술을 전화기에 더 가까이 갖다 대요/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시다/ 나는 노래방 직원에게 쥬크 박스 소리를 아주 작게 하라고 할게요/ 그러면 당신은 당신과 거기에 같이 있는 친구에게 가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나에게 말해줘요/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고/혹시 그 친구가 나와 같은 방법으로 당신을 붙잡고 있나요/ 사랑이란 사람을 눈이 멀게 하는 것/ 당신의 마음을 결정해요/ 나는 알아야 겠어요/

내가 전화를 끊을까요. 아니면 당신이 그에게 가라고 말을 할텐가요."-그이는 가야만 되나요? (블룩 벤턴 작사 작곡, 짐 리브스 노래.)

이 노래가 나오면 대구의 젊은이들은 가슴이 녹아내린다. 혹시 나에게 보내는 사연은 없는가하고 귀를 쫑긋하고 라디오를 들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버린 그때 그 사람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Art is long, life is short!-히포크라테스. )'라는 말을 실감하며 늙어 가겠지.

권영재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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