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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8만 시간, 너무 버거운 자유…은퇴자의 '씁쓸한 꼬리표'

한 은퇴자는
한 은퇴자는 "해외여행 시 출입국신고서나 세관신고서, 은행 대출 서류의 직업란을 쓸 때 비로소 직장에서 물려난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직장생활 30년, 어느날 갑자기 내 자리가 사라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아침을 챙겨먹고 지하철, 버스를 타고 가던 직장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아도 된다. 1주일에 168시간. 은퇴하자마자 너무나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자다가 일어나서 밥 먹고, 등산을 가거나 TV 앞에서 리모콘 돌리는 것도 하루 이틀. 도대체 저 많은 시간을 무엇을 하면서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경제 기적을 일군 산업역군이라는 자부심도 이제는 희미해진다. 가족, 건강도 뒷전으로 하고 금쪽같은 청춘을 바쳤지만 계급장을 반납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은퇴 후 사라진 것들

▷우울증= 30년 넘게 한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다 1년 전 명예퇴직한 김찬영(57) 씨는 요즘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30년 동안 죽어라하고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지금이야 주 52시간 근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이르는 말)을 주장하지만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인 김 씨는 회사 다닐 때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다. 평일에는 아이들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고, 주말에도 쌓인 피로 푸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 그렇게 30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현장에서 밀려났다. 수십 년 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뀔 리는 없었던 김 씨는 은퇴 후 초기에는 출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몸에 밴 습관 때문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을 배회했다. 등산 외에는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김 씨는 "베란다 창문에서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나 이른 아침 출근하는 회사원을 바라보면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자신만 뒤처진 기분이 들어 한숨을 쉬는 시간이 늘었다"고 했다.

김 씨는 또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존재감도 사라졌다고 했다. "존경스러운 아빠, 멋진 남편에서 힘없고 무능력한 아빠, 늙은 남편으로 돼 가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무게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고 했다. 김 씨는 공연히 죄를 진 것도 없는데 아내 보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아내의 시선도 예전 같지 않고, 자식들도 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 같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사소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이면 불란의 소지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런 이유로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 "이런 우울증이 진행돼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로 바뀔까 걱정된다 "고 했다.

▷지위와 각종 특혜 사라져=32년 넘게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은퇴한 이동원(가명·61)씨는 퇴직 후 아내와 함께 동남아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기쁨도 잠시 출입국 신고서와 세관 신고서를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이 씨는 직업란에 이르자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는 당당하게 공무원이라고 썼는데 퇴직하고 나니 무엇이라고 써야 할지 망설여졌다. 무직이나 공란으로 비워놓으려다 결국 예전대로 '공무원'으로 기입해 제출했다. 이 씨는 이런 일을 있는 후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씁쓸한 기분과 함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그런 것 있잖아요."

공기업에서 28년 간 일하다 2년 전 은퇴한 박찬수(가명·58) 씨는 최근 딸 혼사에 필요한 돈이 필요해 은행에 들렀다 자괴감을 느꼈다. 직업란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서류를 내밀자 직원이 "직업란이 비었네요"라며 다시 서류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꼭 써야 하냐"고 묻자 직원은 "직업이 없으면 대출이자가 차이가 난다. 특히 소득이나 직업이 없으면 신용등급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순간 박 씨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퇴직했다는 사실을 또 한번 실감했다" 털어봤다.

▷인간관계 단절=대기업에서 기술 업무를 담당했던 박영수(가명·60) 씨는 관련 분야에서는 회사 안팎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입사 동기보다 승진도 빨랐고, 함께 일한 부하 직원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또한 호탕한 성격으로 마당발로 통했다. 지난해 말 정년퇴직한 박 씨는 요즘 같은 시기에 그래도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했으니 남보다는 혜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푹 쉬자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늦잠을 자면서 빈둥거리기도 하고,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평소 좋아하는 등산도 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전에는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한 전 직장 후배들을 만나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지나서 생각해보니 자신은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현직에 있는 후배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은 후배들과의 만남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삼식이와 부엌 해방을 외치는 아내=2년 전 퇴직한 심의겸(가명·61) 씨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내와 자주 부부싸움을 한다. 김 씨는 "이렇게 삼식이 남편이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심 씨는 아내와 자식에게 서운하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아내는 알아주기는커녕 매 끼 밥상을 차려야 한다며 귀찮아한다. '친구들 만나 저녁까지 먹고 오라'며 노골적으로 외출을 강요하기도 한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르는건지 억울함까지 든다"고 했다.

반면 김선영(가명·58) 씨의 남편 박기열(가명·61) 씨는 2년 전 30년간 다닌 직장에서 은퇴했다. 퇴직 전에는 남편이 창원에서 근무해 일주일에 하루 내지 이틀만 대구로 올라왔던 터라 남편의 식사를 챙겨주는 데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은퇴 후 한 달 사이 갈등이 시작됐다. 평소 김 씨는 약속이 많고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집에서 혼자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남편 때문에 오후 6시면 귀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 씨는 "'내가 없다고 해서 왜 식사를 못하냐'고 따지자 남편은 '내가 평생 일하고 이제 좀 쉬려는데 그거 하나 못해주냐'고 반박하더군요. 이젠 외출할 때 국, 반찬 세끼 정도를 준비해둬요. 남편이 혼자 챙겨 먹을 수 있게 타협을 본 거죠. 어쩔 수 없이 준비는 해두지만, 도대체 왜 혼자는 못 해 먹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김 씨는 이어 "남편에게는 있는 정년퇴직이 왜 나에게는 없는 건지, 죽을 때까지 이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면서 "요즘엔 외출할 때마다 남편이 '같이 가자'며 따라 나서 괴롭다"고 했다. 김 씨 "황혼이혼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1막이 내리기 전 2막을 준비하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오래 전 히트한 광고 카피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 후 삶을 즐길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 은퇴 준비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대구대 실버복지상담학과 고익환 명예교수는 "평균수명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020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90세의 수명을 누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면서 "100세 시대 행복한 삶을 위해선 생애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은퇴는 '인생 2막'의 출발이다. 순수한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라면서 "지금까지는 회사의 주인, 상사를 위해 살았다면 은퇴 이후는 내 의도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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