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미완의 고백 / 김은집

김은집 씨
김은집 씨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받았었다. 그 손길을 뻗어주었던 분들은, 혈연이 있었거나 지연 혹은 학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우연히 만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람도 있었으므로, 나는 늘 사람이면 누구나 나의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인연이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꽃피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나 고마웠던 분들과의 사연을 글로 써서 남기는 것이 그 분들에 대한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경북지방에서 제법 명망이 높았던 유림 김정기님과 양소선님 사이에 태어난 7남매 중 막내였고 늦둥이 외아들이었다.

원래는 무인(1938년)생이었으나 태어날 때 너무 허약하였으므로 출생신고를 늦춘 탓에 호적상에는 기묘(1939년)생으로 되어 있다.

내가 태어난 직후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최고조로 극악해질 무렵이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은 물론, 내선일체를 앞세워 우리말, 우리글도 사용하지 못하게 억누르던 때였으니까. 그런 중에 일본이 하와이군도를 기습 공격하여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유럽지역에서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에 병합되면서부터,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공격이 강화 되었으므로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패전으로 끝을 맺었던 것이다. 따라서 36년간 일제의 강압통치를 받아오던 한반도가 광복을 맞았으나, 연합군의 양대 세력인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으므로 북위 38도선을 경계삼아 조국산하가 양분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였기에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의 틈바구니에 빠진 채 살아온 것이 어느 듯 70주년을 넘긴 것이다.

수성 못 아래에 자리 잡은 중동에서 태어난 나는 수성국민학교(입학 당시에는 사대부속국민학교였음)를 졸업하고, 선지원 후시험인 국가고사를 치르고 경대사대부속중학교에 진학 하였었다.

6.25 전란 중이었으므로 벽돌건물에 담장이넝쿨이 뒤 덮여 운치가 있던 본교건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 건물 정문 앞 큰길 건너에 있던 가교사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치루었는데 나의 학업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아버님은 청렴한 선비셨으므로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평소 붓글씨를 써주시거나, 남의 편지를 대필, 대독해 주고받은 사례물품으로 생계를 이어 왔으므로, 당시 중학교 공납금 중 제일 액수가 적었다는 그 학교의 학비마저 제때에 내지 못하여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버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옛날에는 소학교만 나와도 면서기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요즘 세상은 중학교 졸업장 가지고는 학교소사도 못해.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말단 공무원이라도 할 수 있다구. 네가 나와 함께 인천으로 가면 우리가 너를 고등학교 까지는 다니게 해 주마」

아버지의 장례식에 왔던 둘째 누님의 말에 함께 왔던 자형도 동의하였으므로 어머님과 다섯 누님들이 나에게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선뜻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무렵 우리국민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결혼한 누님들 모두 생활이 어려웠었고 나의 바로 위 누나는 그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쉽게 취직하지 못 할 것 같아 혼자서 어머니를 모시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여겨졌던 때문이다.

「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 내 걱정 말고 넌 둘째누님 따라 가거라. 외아들인 네가 잘돼야 돌아가신 아버님도 마음 편하실게 아니냐?」

「그래, 어머닌 우리가 힘을 합해서 모실테니 넌 누님 따라 가거라」

「여러 곳에 이력서 내어 놓았으니 곧 좋은 소식 올게다. 그러니 넌 염려 말고 언니 따라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라」

어머님 말씀에 첫째누님과 막내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장은 받아가지고 가야 할 것 아녜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말미를 얻으려고 내가 말했다.

「그건 그래. 그럼 네가 오는 걸로 믿고 우린 준비하고 있으마」

둘째누님의 말이었다. 그 무렵 둘째누님 내외분은 인천의 남녀 고등학교 교사로 각각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해 2월 하순에 졸업장을 받아든 나는 어머니와 막내누나의 배웅을 뒤로 하고 완행열차편으로 상경하여 다시 경인선 열차를 타고 제물포역에서 내려 둘째누님 집을 찾아갔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진학도 선지원 후 국가고사를 치르고 채득한 점수가 지원한 학교의 모집인원수 속에 들어야 입학이 허용되었었는데, 진학을 포기하였던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도 원서를 제출하지 않았었고, 고입을 위한 국가고사도 치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J고교에 들어간 건 그해 입학식이 끝나고도 며칠 후였다.

교무실까지는 그 학교교사였던 자형이 동행해 주었었고 배정받은 학급에는 담임선생과 함께 들어갔다.

「합격한 학생 하나가 등록금을 내지 않아 입학취소가 되었는데, 이 학생이 그 학생 대신 입학허가를 받아 제군들과 함께 공부하게 된 김은집이다. 대구에서 사대부중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 온 학생이니 사이좋게 지내기 바란다.」

담임선생의 소개를 받은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에 가름하였고, 그 반 학생들은 일단 박수로 환영의 뜻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의 학업도 순탄하지가 않았었다. 동급생은 물론, 선배들도 경상도에서 올라와 보결로 들어온 나를 반겨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요즘말로 왕따 시켰기 때문에 늘 외로웠으며, 게다가 2학년 겨울방학 때 자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누님네 생활도 전보다 궁핍해졌었는데, 그 누님에게도 학교에 다니는 3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어렵게 그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J고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누님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 서울로 일자리를 구하려 떠날 때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만 이 편지, 충무로에 계신 이봉래감독에게 드려 보렴」

제법 도톰한 봉투하나를 누님이 내게 주셨다. 얼결에 받아든 나는 누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봉래감독은 네 자형과 호형호제하던 시인이신데, 지금은 영화감독을 하고 계셔. 내가 알기로는 영화사도 하나 차리신 것 같아. 그러니 그 편지 보면 도와 주실지도 몰라」

누님의 말을 들은 나는 따사로운 혈연이 다시 한 번 고마워 눈시울이 젖어오고 있었다.

그 편지를 가방에 넣고 서울로 간 나는, 달리 찾아갈 곳도 없었으므로 영화인들의 활동지역인 충무로에 가서 이봉래 감독부터 찾아보았다. 그는 D영화사 사장이었고 감독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력서 갖고 왔는가?」

D영화사를 세 번째 찾아간 오전, 나는 비로소 이 감독을 만날 수 있었고, 누님의 편지를 읽어본 그가 한참동안 나를 건너다보다가 불쑥 물었으므로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 저어 보였다.

「잠자리는 구했는가?」

다시 물었을 때도 나는 역시 고개만 가로 저어 보였다.

「길 건너가면 문방구점이 있으니, 가서 이력서 용지 한 장 사다 써 놓고 기다리게. 난 또 촬영장엘 가봐야 하니까」

말하고는 휑하니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주인 없는 사장실에 혼자 앉아 있기도 거북스러워, 나는 길 건너 문방구점에 가서 이력서 용지 1권을 사들고 다시 돌아와 여직원이 앉아 있는 사무실에서 이력서를 쓰려했지만 정말 쓸 것이 없었다.

이 감독이 다시 돌아온 것은 세 시간쯤 지난 후였다.

나는 그동안 여직원이 쟁반에 담아서 건네준 빵과 우유로 점심식사를 하였었다. 그 빵과 우유는 촬영장에서 연기자와 스텝들이 먹는 간식이라고 여직원이 말해 주었었다.

나는 본적과 성명, 생년월일과 성별, 그리고 내가 졸업한 초, 중, 고교명만 기재한 이력서를 이 감독에게 건네주었다. 주소란도 메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편하겠지만, 당분간은 내 사무실에서 자고, 제작부의 조부장 일을 도와주게. 월급은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많이 사귀게 될걸세.」

이력서를 살펴본 이 감독의 말이었다. 정말 뜻밖의 호의였으므로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고맙습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D영화사 제작부차장」이란 직함이 인쇄된 명함을 사용하게 되었고 연기자나 스텝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으며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 받은 월급들을 모아 두었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충무로에서 가까운 남산동에 자취방도 구할 수 있었으며 이듬해 신학년도에는 비록 야간부이긴 하지만 K대학의 사학과에 진학도 하였던 것이다.

동강 조수호선생을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여 뒤였다.

동강선생은 내가 중3때 미술을 지도하셨던 분인데 그 무렵 선생께선 배제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신 후였고, 졸업 후 내가 처음 만난 은사님이셨다.

나는 그 무렵, 하숙이나 자취할 수 있는 방을 구하려고 서울의 주택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그 무렵 많은 서울사람들은 대구에서 올라온 학생에게는 방을 세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입자의 친구들이 모이면 마치 싸움판이 벌어진 듯 시끄러웠기 때문이라 하였다. 해서, 내가 처음 자취방을 얻었던 남산동 집에 세 들어 갈 때도 시끄럽게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주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어느 일요일 오전, 내가 신당동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가고 있다가 동강선생과 마주친 것이다.

나는 국민학교 3,4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었는데 당시 담임선생도 수채화를 잘 그리셨고, 그 선생의 눈에 든 내게 수채화 그리는 법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시다가 6.25때라 입대 하셨으므로, 나는 김용환선생의 조언을 들으며 처음으로 유화그리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으나, 아버님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시면 호되게 꾸짖으셨으므로 숨어서 그리기를 계속하였고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늘 미술부에 몸담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동강선생도 나를 기억 하시고 반겨 주셨던 것이다.

골목길 찻집에 마주 앉은 후 내가 방을 구하려 다니게 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나 하고 같이 청운동엘 가 보세. 마침 청전선생님 댁에 방이 하나 비었을 것 같으니 내가 부탁드려보겠네」

그래서 나는 그날 청전이상범 선생님 댁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제가 대구에서 중학교에 근무할 때 미술부에 있던 제자인데, 지금도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유화를 그렸답니다. 헌데 셋집 주인이 기름 냄새가 역겹다고 방을 비우라 한답니다. 마침 선생님의 아드님이 분가했으니 그 방이 비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제자에게 편의 좀 베풀어 주실 순 없을까요?」

「동강의 제자라면 문인화 기초는 착실히 익혔을텐데 왜 유화를 그렸답디까?」

「김군은 당시에도 수채화와 유화를 잘 그렸습니다. 해서 제1회 한미학생 미술교류전 때도 경북대표 작품으로 선정되어 영남일보에 사진까지 실린 적이 있습니다. 6.25때 피난 오셨던 김용환화백이 김군 집에서 한동안 사셨고, 그때 그분을 만나려고 여러 번 내왕하였던 도상봉화백과 강우문화백과도 인연이 맺어졌던게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긴, 광복 후 우리나라 미술풍조가 그쪽으로 기운게 사실이지. 학교에서 문인화나 수묵담채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쳤어야 했는데 말일세.」

그날 두 선생님께서는 한국미술계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시며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셨고 그 덕분에 나는 그 집에서 1년여를 하숙하게 된 것이다.

「굳이 기름 냄새 풍기는 유화를 그리지 말고, 이 기회에 청전선생님에게 수묵담채화를 배우게. 그리고 사학과에 다닌다 했으니 수묵화에 대한 고전들도 좀 많이 구해 보게나」

그날 작별할 때 동강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취미로 그리던 유화에 손을 떼고 틈날 때마다 청전선생에게 수묵담채화를 사사 받았고 문인화에도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하는 사람이 문인화나 수묵담채화를 배우면, 자작한 시나 시조 등을 화제로 써 넣을 수 있고 그 화제가 관람자들과 소통을 용이하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지금까지 그 작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은 6.25와 4.19, 5.16과 6.3사태, 1.21사태와 부마항쟁, 그리고 신군부 쿠데타와 광주항쟁 등 숱한 고비를 넘어왔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4.19와 5.16, 그리고 1.21사태이다.

4.19때는 D영화사에 근무하며 K대학 야간부에 다녔으므로 K대학과 Y대학이 주축이 되었던 서울시위에 나도 적극 참가 하였었고, 5.16이후 사회정화 차원에서 각종 단체들을 법인화 시킬 때 발족된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이봉래 감독이 추대 되었으므로 그가 영화산업을 포기하여 내가 실업자가 되었고, 그 동안 연기해 오던 군복무를 마쳐야 했기 때문이며, 1.21사태는 순수문학을 하려던 나를 반공작가와 계몽작가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2년 8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막내누나가 모시고 있었다.

그 누나는 내가 인천으로 떠난 후 오래지 않아 대구전신전화국에 취직되어 교환수로 3년여 근무하였고 그때 친지의 중매로 내당동에서 조그마한 직물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사람과 결혼 하였었는데, 영일만이 고향이던 그는 6.25때 부모님을 여위고 대구로 나와 비산동에서 직물공장에 취업하여 자금과 기술을 축적한 다음, 내당동에서 독립하였으므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장모이며 내 어머니였던 분을 친어머니처럼 모셨던 것이다.

제대 후 나는 한 때 서울로 가서 충무로 일대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영화사에 다시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T.V 연속극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한국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내가 D영화사에 있을 때 사궜던 영화인들, 특히 제작부 직원들은 나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었다. 혹시 내가 자신들의 일터를 빼앗고 들어 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리라.

그래서 다시 대구로 돌아온 나는 누님네 공장 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시나리오 습작을 하고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제2의 중흥기가 한국영화계에 도래할 것 같았고 또 T.V 단막극 작법이 영화시나리오 작법과 대동소이 하였으므로 「T.V 극작가라도 되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류화가 K의 유화개인전 초대장을 받았다.

그는 내 고향인 중동에서 이웃하며 자랐었고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던 1년 선배였는데 나와는 매우 친숙하게 지냈었으며 제일여중을 거쳐 경북여고에 진학해서도 미술부에서 활동하다가 2학년 때부터는 부장까지 역임하였던 열성파였으나 가정형편상 미대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 결혼하였던 여인이었다.

그녀의 첫 개인전 오픈식에는 경북여고 미술부 출신 선후배들이 많이 참석하였으므로 나는 축하인사만 하고 전시장을 나와야 했었다.

1주일 후 그 개인전이 끝나갈 무렵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그녀는 후배인 한 아가씨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워낙 바빠서 오픈식 날은 미안하게 됐어. 오늘 잘 왔다. 내 졸업 후 한참 뒤에 미술부장을 하였던 후배인데, 인사하고 지내. 얘도 너처럼 아버지가 그림 못 그리게 하셔서 지금은 H여대 국어국문과에 다니고 있어.」

여류화가 K가 자신을 소개하자 아가씨가 고개 숙여 먼저 인사했다.

「이 친구, 사대부중과 인천 J고교를 졸업했고 서울 K대학을 다녔어. 또 영화사에도 근무했고, 그때 배운 시나리오 작법으로 지금은 습작을 하고 있다니 언젠가는 훌륭한 작가가 될거야. 한 번 사겨 봐. 그림도 잘 그려」

여류화가 K는 이어서 나를 소개해 주었으므로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나의 지난날을 소상히 아는 것은 형이라 부르며 나를 따르던 그녀의 남동생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외아들이었던 나는 그녀의 남동생이 형이라 부르는 것이 좋아 대구 와서는 자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여류화가의 후배인 아가씨와 나는 주말이면 이따금 만나 전시장 순례와 영화감상, 문학토론 등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자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음을 느꼈고, 반려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갖게 되었으나 두 사람의 결합에는 걸림돌이 많았었다.

그것은 내가 이렇다 할 직장이 없는 백수의 신세였고, 그녀 역시 1년 이상 지나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형부의 반대가 극심하였던 것이다. 영천이 고향인 그녀는 그때 대구에 사는 언니 집에 하숙하며 등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영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B형과도 사귀고 있었다. 밖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정도 방문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68년 2월 초, 구정 다음날 B형이 내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린다고 내당동 누님네 집으로 찾아왔었다.

세배가 끝난 후 누님 집에서 나온 B형과 나는 반고개 아래에 있는 신진극장 앞 대포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이번에 공보부에서 시나리오 현상공모가 있던데 김형 거기 한번 응모해 보지 그래?」

막걸리 몇 잔을 주고받다가 B형이 말했다. 너무나도 뜻밖의 소리였으므로 나는 멀거니 그의 얼굴만 건너다보고 있었다.

「하긴 마감 기일이 좀 촉박하긴 하네만…….공보부에서 현상공모 하는 주제는 뻔-하지 않은가? 반공 아니면 농촌 계몽물이지」

「언제까진데?」

「이달 20일까지」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B형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 친구, 시나리오 한 편 쓰는게 뭐 치약 짤 듯 하는 줄 알어? 20일까지면 열흘 남짓 밖에 안 남았잖어?」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게. 마침 좋은 소재가 있었잖어? 1.21사태 말일세. 육로로 왔던 놈들이 실패하였으니 다음에는 낙하산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해상을 이용하지 않겠어? 그러니 그 쪽으로 가상적 이야기 하나 만들어 보라구. 시나리오 작법이야 그 동안 계속 연구해 왔으니 참신한 소재 하나 잡으면 열흘 동안 끝내지 못할 것도 없잖어?」

듣고 보니 그랬다. 그림이나 문학작품은 붓이나 펜을 들기 전에 구상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그것을 집필하거나 형상화 시키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지 않은가?

그날 B형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밤을 새우며 참신한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은 소재로 1주일 만에 원고를 작성하여 소포로 보낸 「파래섬의 딸」이 뜻밖에도 입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여류화가 K의 소개로 사귀던 아가씨 집의 반대는 그동안 그녀의 언니가 애써 완화 시켜 왔었는데 내가 공보부 현상공모에 입상한 것은 그 언니에게도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 언니가 아버지와 남편을 설득시켰으므로 사귀던 여인이 졸업한 그해 가을에 우리는 결혼할 수 있었는데, 내가 대구를 떠나 산 것이 10년 가까이 되다보니 주례를 부탁할 만한 지인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식장에서 계약해 놓은 직업적 주례자를 세우는 것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 고심하던 중 문득 중학교 때 은사님이셨던 김판영선생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영어를 가르쳤지만 2학기부터는 상급반 지도를 하셨고, 내가 그 학년에 이르렀을 때는 고등부 교감으로 떠나셨으므로 두 번 다시 강의를 듣지 못하였던 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맺어진 것은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해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고 일직이 된 나와 당직이 되신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만난 것이었다.

「은집인 장래희망이 뭔가? 그동안 지켜봤더니 문예부와 미술부에서 활동하며 온실 출입도 잦던데?」

「글쎄요. 아직은…… 싹이 나오는 것 봐서 결정해야겠지요」

「녀석, 꼭 눈 덮인 산 같은 소리를 하는구먼」

그날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나에게 소산(素山)이란 아호를 지어 주셨다.

그러나 그 선생님도 졸업 후에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였었다. 내가 대구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가서 주례를 서 주십사고 부탁드리기에는 낯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여러 날 고심하면서도 그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여 B형에게 물어 보았더니 경상북도 도교육감으로 재선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찾아뵙고 축하 인사 겸 내가 공보부에서 현상 공모한 시나리오부문에 입상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 기회를 봐서 어렵지만 주례를 부탁드려 보기로 하였다.

경상북도 도교육위원회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고 여비서에게 차를 내어 오라고 하셨다. 차를 마시며 선생님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고, 나는 그 동안 체험한 일들, 특히 시나리오 작법을 배운 과정과 현상 공모에 응모하여 입상되고 상금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사람하나는 잘 보았었구먼」 하시며 웃으셨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주례를 서주실수 있겠느냐고 여쭈었었는데 뜻밖에도 선생님은 쾌히 승낙하셨던 것이다.

당시에는 누군가의 결혼식에 누가 주례를 섰느냐 하는 것이 신랑의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으므로 내 결혼식에 왔던 양가의 하객들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감사인사까지는 치루었으나 이듬해 봄에, 내가 문화공보부에 특채되어 아내와 함께 상경하였으므로 다시 그 선생님을 찾아뵙지는 못하였었다.

내가 상경하여 문화공보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인사계장 이달형씨였다. 그는 내가 현상공모에 응모하였을 때 문화과에서 현상공모 담당주무였으므로 시상식 때 처음 만났던 사람인데 첫눈에 호감이 갔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인사계장으로 승진하였고, 문화과에서 필요한 작품 집필에 내가 적격이라 여겼으므로 총무과장에게 나의 특채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화과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당분간은 인사계에서 근무하시며 문화과에서 의뢰하는 작품을 집필하도록 합시다. 김작가는 필체가 좋으니 인사카드와 연금카드를 일괄정리 좀 해주시오」

그는 나를 총무과장과 문화과장에게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켰다. 출근은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

나는 6개월 동안 인사계에서 바쁘게 지냈다. 요즘은 모든 기록이 전산화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육필로 작성하였었는데 문화공보부산하 공무원 전원의 인사카드 및 연금카드는 오래된 것이 많았으므로 한사람의 기록에도 필체가 다른 것이 있어 보기에 좋지 않다고 모두 재작성하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따금 문화과의 호출을 받고 가서 소재와 주제를 받아 퇴근 후 집에서 작품을 집필하여야 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두 편의 장편 시나리오와 다섯 편의 단편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문화과에 납본하였었다. 그 작품들은 모두 반공사상 고취와 농촌계몽운동이 주제였다.

「힘드시지요? 작가 분들은 소재나 주제가 창작적이어야 집필의욕이 생긴다는데 김작가는 늘 주어지는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야 하니 의욕이 감소될겝니다.」

농촌계몽물 시나리오인 「물은 위로도 흐른다」의 원고를 문화과에 넘긴 날 퇴근시간에 인사계장의 제안으로 안국동에 있는 어느 술집에 마주 앉았을 때 그가 한 말이다. 하지만 면전에서 즉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어 나는 멋쩍은 웃음만 보여 주었다.

「국립국악원 서무과 주무자리가 비었는데, 김작가가 그리로 가시겠오? 그 자린 아주 한직이오. 마침 김작가가 세 들어 살고 계신 장충동에 사무실이 있으니 출퇴근시간도 많이 단축될거요」

나는 그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나를 위한 진심인가? 아니면 나를 떠나보낼 작정인가 하고. 그런데 그의 표정은 정말 진지해 보였다.

「국립국악원은 뭘 하는 곳입니까?」

나는 원래 음악에는 소질도 취미도 없었으므로 전통음악이나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국립국악원이 무얼 하는 곳인지 정말 몰랐던 것이다.

「해방 전에는 이왕직 아악부라 불리던 곳인데 우리나라 전통음악과 무용의 계승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화공보부산하 기관입니다. 장악과와 서무과가 있고, 부설인 국악사양성소가 있는데 그 기관 주요업무는 대부분 장악과 소관이고 서무과는 그 보조역할만 하는 곳이지요」

인사계장의 설명을 듣고 유혹을 느낀 것은 전통음악과 무용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언뜻 뇌리를 스쳐가던 우륵과 왕산악, 그리고 박연선생의 이름과 세종대왕 때 편찬되었다는 악학궤범 등의 고서적 제목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사계장에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국립국악원 서무과로 보내주기를 빌었다.

1주일 후 나는 국립국악원 서무과로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그 국악원의 원장은 인간무형문화재 제1호인 성경린씨였다.

국립국악원 장악과에는 판소리의 명창인 박동진씨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는 그 무렵 신축 중이던 국립극장 산하단체인 국립창극단의 임원이기도 하였다.

평소에도 유-머와 재치가 많아,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오던 그는 내가 서무과 주무로 가던 날도 원장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성경린원장에게 부임인사를 끝내자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으므로 대구라고 대답하자, 박동진씨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한바탕 그 특유의 사투리를 쏟아 놓았다.

「당신 고향이 대구랑께 문디이구먼, 경상도보리문디이. 그래서 난 더 반갑당께. 대구는 이놈 소리꾼 제2의 고향이여. 6.25때 피난 가서 내가 소리연습 하던 곳이랑께. 영선못과 안지랭이 골짜기가 내 연습장이였지라.」

서무과 사무실은 원장실 입구에 자리하였고 원장이 출입할 때는 내가 앉은 책상 앞을 지나 다녔는데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고지를 꺼내 놓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은 내 마음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묵은 서류철 하나를 펼쳐 놓고, 그것을 검토하는 척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집에 가서 원고지에 옮겨 쓸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박동진씨와 가깝게 지냈다. 그것은 국립창극단 임원인 그를 통해서 창극본 집필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한 때 인기가 높았던 임춘앵, 김경애 등이 보여준 국극이란게 바로 창극과 비슷한 거여. 그들이 대화체로 말하던 것에 중모리, 중중모리, 혹은 휘모리 등 가락을 덧붙인게 창극이니께 말이여.」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역사속의 이야기 한 토막을 창극 본으로 습작을 시작하였었다.

반년쯤 지났을 때 나는 문교부에 자주 출입해야 했었다. 그것은 국립국악원이 10년 가까이 노력해 왔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사업, 즉 국악사양성소를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시키는 일 때문이었다. 당시 국악사양성소는 초등학교 졸업생 40명을 전국에서 모집하여 중등과정 3년, 고등과정 3년, 도합 6년 동안 일반교양과목과 전통음악 및 무용을 국비로 가르치던 곳이었으나, 그 양성소를 졸업해도 학력인정이 되지 않았으므로 성경린원장의 전임인 이주환원장 때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승격을 도모해 왔었으나 대를 이은 그때까지도 성사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성원장도 고령이라 정년퇴임이 3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해진 그가 나를 앞세웠던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는 문화공보부 소속이고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되면 문교부 산하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예산도 지금까지는 문화공보부에서 편성하고 지원하던 것을 학교로 승격시키면 문교부가 책임져야 했던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립학교 설치령을 참고하여 신청서를 작성제출 하였었으나 그 서류는 보통교육국장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1년 가까이 문교부에 드나들었지만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제2종합청사 9층에 있는 문교부에 가기 위해 승강기에 올랐다가 뜻밖에도 김판영선생님을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선생님도 나를 알아보시고 반가워 하셨다. 승강기가 오르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나의 신혼생활을 궁금해 하셨고, 나는 선생님이 경상북도 도교육감 자격으로 문교부에 출장 오셨나 보다고 생각하였었는데 9층에서 승강기를 내렸을 때

「저게 내방이니, 용무 끝나면 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시게」

하시며 장학실장실을 가리키셨다.

정부기관 중 일반기관은 장, 차관 아래 기획관리실장이 최상급이지만 당시 문교부 체재는 기획실장 보다 장학실장의 발언권이 더 힘을 받고 있었으므로 나는 「선생님! 차부터 먼저 주세요」하고 장학실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 방 입구의 비서실에는 전날 경상북도 교육감실에서 보았던 여비서도 있었다.

선생님과 마주 앉은 나는 여비서가 내다준 차를 마시며, 그동안 내가 문교부에 출입하게 된 과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다. 선생님도 국악고등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공감 하셨다.

보통교육국장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서류들은 다음날부터 차상급자의 결재가 났고 5일 후에는 장관의 결재도 받았으며 며칠 후에는 법제처로 이관되었다가 승인이 떨어져 국립국악고등학교 설치령이 관보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장선임 문제에 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국악인들이 추천하였던 성경린씨의 학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문교부가 인정하는 졸업장이 한 장도 없었다. 승동교회에서 운영하던 야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국악사양성교육을 받은 것이 그의 학력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당시 서울음대와 이화여대 음악과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장자격도 인정 않으면서 서울음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하는 건 왜 인정하느냐?」

나는 담당공무원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먹혀들지가 않았다. 그 무렵 김판영선생님은 장학실장 자리를 떠나 인천교육대학 학장으로 가신 후였으므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문교부 측에서는 서울음대의 장사훈 교수를 교장으로 앉히라 하였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 그는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장선임 문제는 반년이 넘어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8월20일경에 나는 문교부의 복도에서 김판영선생을 다시 만났다. 당시 선생님은 인천교육대학 학장 겸 경기도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계셨는데 차관실에 출장차 오셨던 것이다.

선생님을 따라 차관실에 들어간 나는 그동안의 고충을 선생님과 차관에게 말씀 드리고 도와주십사고 부탁을 드렸다. 김판영선생께서도 선처해 주라고 차관에게 부탁하셨다.

그해 9월 4일, 성경린씨는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발령 받았고, 그동안 나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던 그의 할애요청을 두 부서에서 승인하였으므로 그때까지 문화공보부 소속이던 내가 문교부 소속이 된 것이다.

성경린교장이 평가한 나의 역량은 순전히 김판영선생님 덕분에 높아졌던 것이다.

국립국악고등학교 개교식 준비 때문에 나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모표, 뱃지의 도안 및 제작, 교기 도안 및 제작, 초청장 기안과 인쇄 및 배포, 교사초빙, 학교건물 대청소 등,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니면 앞장 서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성경린교장이 개교기념행사로 그 무렵 사용이 가능해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할 방아타령, 즉 백결선생의 이야기를 극본화 할 것을 나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극본은 퇴근 후 집에서 밤새워 쓰고 있었다.

건강한 30대 초반이었으나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다. 오후만 되면 으슬으슬 추웠고 식욕도 감퇴 되었다. 처음에는 몸살 정도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증상이 5일 이상 계속 되었으므로 집 가까이 있는 개인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다.

두 살짜리 아들의 잔병 치료를 위해 아내와 함께 이따금 드나들던 그 병원의 의사 김중환씨는 포항 출신으로 경대의대를 졸업한 사람이며, 파는 달랐지만 본관이 나와 같은 성씨였고 나이도 동갑이였으므로 가끔 만나면 농담도 주고받으며 함께 소주잔도 기울이던 사이가 되었던 터였다.

「몸에 열이 많아 창자에 염증이 생겼으니 거친 음식 먹지 말게」

그의 말을 듣고 이틀 동안 통조림으로된 복숭아와 포도 등으로 끼니를 때우며 출근을 하였다.

그날 점심때 구내식당에 맡겨 둔 통조림을 찾으러 갔을 때 주방요리사는 양배추를 곱게 채 썰어 무치고 있었다. 새콤한 식초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내 코끝을 스쳐 갔을 때 갑자기 식욕이 생겼다. 원래 나는 육식보다 채식을 좋아하였고 특히 식초나 참기름을 넣고 무친 나물로 비벼 먹기를 좋아 했었다.

「아주머니, 오늘은 나도 밥 한 그릇 주세요. 무치시는 나물 보니 군침이 도네요」

그래서 그 날 점심은 그 나물에 비빈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었다. 그런데 퇴근 후 집에서 잡다한 일을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랫배가 몹시 아파왔다. 당시 아내는, 우리가 상경하던 해 가을에 출산한 아들을 돌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 번 째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아내가 나의 신음에 놀랐지만 원래 밤에는 겁이 많던 여인이라 어둠을 헤치고 병원까지 달려갈 수가 없어 주인집 아들에게 부탁하여 가까운 병원에 가서 왕진을 청하였다.

「음식 조심하랬는데 거칠게 먹었군 그래. 창자가 뚫어졌으니 수술해야겠오. 천공성복막염이라고.」

급히 달려왔던 의사 김중환은 내 몸을 두루 살펴보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아

「헛소리 말고 진통제나 한 대 놔주게」 말했다.

「그래 진통제 놔 줄테니 빨리 준비하고 병원으로 오게. 난 먼저 가서 수술준비 할테니까」

진통제 주사를 놓아준 그는 서둘러 돌아갔다.

아랫배의 통증이 잦아들고 있었으므로, 나는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아내는 내 곁에서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굽어보고 있었으리라.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였는데 의사가 가고 난 후 얼마 아니 되어 통금 사이렌이 울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기 조금 전까지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원고 집필 한답시고 밤잠을 설친 날이 많았었는데, 그때 부족하였던 잠을 몰아서 잤었나보다.

통금해제 사이렌 소리가 끝나고 채 10분도 아니 되었는데 다급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주인집 남자가 나가서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우리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내 곁에 앉아서 밤을 지새웠던 아내가 방문을 열자 뛰어 들어온 사람은 지난밤에 왕진 왔던 그 의사였다.

「이 사람 죽으려고 작정 한거야? 일어나! 일어나라구. 빨리 병원 가서 수술 받아야 해」

그는 누워 있는 나를 끌어 일으키며 말했다. 그 때문에 다시 아랫배의 통증이 느껴졌다.

「애기엄마! 이 친군 내가 업고 갈테니 입원준비 좀 해 가지고 병원으로 오세요」

말하고는 나를 등에 업고 방을 나섰다.

「내 창자 정말 뚫어진건가?」

「가서 X레이 찍어 확인시켜 줄테니 잠자코 있으라구」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을 때 그는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병원에서 찍은 X레이 필름에는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검은 부분이 세 곳 나란히 있었다.

「어제 밤에는 한 곳이 뚫어 졌었는데 당신이 꾸물거리는 바람에 두 곳 더 뚫어졌다구.」

의사는 그 검은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꾸짖고 있었다. 반항할 수도 없이 수술대에 눕혀진 나는, 허둥지둥 달려온 아내에게

「교장선생님 댁에 전화해서, 내가 오늘 출근 못한다고 전해줘요」

부탁하고는 마취제주사를 맞았던 것이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입원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남산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내와 교장도 초조한 눈으로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개교기념 행사는 내년 3월초로 연기할 테니 아무 염려 말고 몸조리 잘하시오. 그리고 병원비도 내가 준비할 테니 걱정 마시오」

성경린교장의 말이었다. 그날부터 한 달 동안 나는 그 병실에서 지내야 했다.

배꼽 바로 밑에서 한 뼘 가까이 배를 가르고 창자를 모두 꺼내어 뚫어진 부분을 제거한 다음 다시 꿰매고 집어넣은 후 봉합한 바깥 부위가 쉽게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학교직원은 물론, 국립국악원직원, 문화공보부의 인사계장과 문화과장 등이 번갈아 가며 문병을 왔었고 성교장은 5번이나 다녀갔었다.

퇴원 후 나는 다시 바빠졌다. 연기 시켰던 개교기념 행사준비와 딸을 출산한 아내도 산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일도 많았던 것이다.

나는 병원에 누웠을 때도 교장이 부탁하였던 백결선생 이야기를 일반극본이 아닌 창극본으로 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여겨졌으므로 교장에게 말씀 드렸더니 아주 좋아 하셨다. 그래서 퇴원 후 박동진씨의 자문을 받으며 그 원고를 마무리 지었는데 그 작품에 출연할 연기자는 학생들로 충당 시켰지만 연출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연습기간 중 나는 연출자 역할도 해야 했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막을 올린 「방아타령」은 내가 처음으로 집필한 창극본이였는데 절찬리에 막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작품발표를 위해 제작자나 감독을 찾아 다녀야 하는 영화 시나리오 보다 창극본 집필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 생각은 박동진씨가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개교식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졌을 때 아내의 건강도 회복되었으므로 나는 다시 전에 습작하다 중단하였던 창극본을 마무리 지어 보려고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문화공보부에서 문예작품 현상공모가 있었고 그 속에 창극본부문도 있어 나는 습작하던 작품 「당태종과 안시성」을 정리해서 응모하였더니 그것이 입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또 그 입상이 계기가 되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강감찬장군의 일대기를 창극본으로 집필해 달라」는 의뢰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나는 문교부와 문화공보부에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문교부는 학사문제 때문이었고, 문화공보부는 예산 편성 때문이었다.

내가 가기 전 국립국악원에서는 국악사양성소를 무조건 승격시켜 달라고 하였으므로 매년 거절당하였었는데 나는 문화공보부에서는 예산을 지원하고 문교부에서는 학사만 참견하는 형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산부담을 느끼지 않은 문교부가 국립국악고등학교 설립을 인가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랬다손 쳐도 나는 그 일이 김판영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하였을 것이라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별정직이던 성경린씨가 교육공무원이 되었으므로 그의 정년은 4년이나 늘어나게 되었었는데 1년이 지나자 그는 나에게 또 중책을 맡겼다.

당초 한 학년 1학급이던 학생정원을 두 학급으로 증원시켜 줄 것과, 그때까지 공간으로 있던 건물 1층에 방을 만들어 기숙사로 활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학급증설은 문교부 소관이지만 문화공보부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학생 모두가 국비생이었으므로 문화공보부에서 예산증액이 승인되어야 했기 때문이며 기숙사 설치는 전적으로 문화공보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었다.

학급증설은 김판영선생의 도움으로 알게 된 차관과 원고의뢰를 자주하던 문화과장이 힘써 주었으므로 겨우 성사 되었지만 그 뒤에 접수시킨 기숙사 설치 문제는 쉽게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나를 문화공보부에 특채해 준 인사계장이 그때는 이미 문화공보부를 떠나 한국방송공사 사업국장으로 가신 후였고 학급증설 때 도와주었던 문화과장도 바뀐 뒤였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으며, 문화공보부에서는 예산절감을 위해 식비는 학생에게 받으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하면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반찬투정을 하는 등 부작용이 많고, 학교설립 취지에도 어긋나니 전액지원 해 달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도 심심찮게 원고청탁이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그 무렵에 국립 창극단 단장으로 추대 받은 박동진씨가 후삼국시대의 이야기 하나를 창극본으로 집필해 달라 하셨고 문화과에서도 이따금 단편시나리오를 집필해 달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밤낮 구분 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아침에 세수할 때면 코에서 피가 나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

나의 건강을 염려한 아내의 권유를 받고 사직을 결심 하였었으나 성경린교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기숙사 문제를 매듭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그 학교의 교사나 강사들의 이동도 잦았다. 그것은 국립이란 말에 호감을 갖고 지원 하였던 사립학교 교,강사들이 봉급을 받아보면 일반학교 보다 액수가 많이 적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국어선생이 말없이 사라졌으므로 그 후임자를 교섭하려고 내가 뛰어 다녔었는데 교장선생이 부르더니

「작품 써서 두 번이나 장관상을 받았으니 국어는 당신이 가르치시오」

그래서 정식 교사가 교섭될 때까지 한동안 내가 교실을 드나들었는데 그야말로 힘든 일이었다. 다른 학교처럼 학급수가 많으면, 국어선생도 학년별로 있었을테지만 그 학교는 한 선생이 전 학년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주일에 학년 당 1시간씩 출강하던 미술 강사도 말없이 결강하였으므로 찾아가서 만났더니 강사료가 너무 적고 교통비가 많이 들어 못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미술도 당신이 가르치시오. 당신 그림솜씨는 국전작가 못지않잖소?」

그의 결강사유를 들은 교장의 말이었다. 교장이 그런 말을 한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국립국악원 서무과 주무로 근무할 때 어느 일요일, 집에서 그렸던 수묵담채화 한 점을 원장에게 선물로 주었었고, 그 뒤 충북 영동지방에 있는 난계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박연선생의 영정을 마련하기 위해 대표 두 분이, 그 영정원본이 있는 국립국악원으로 성원장을 찾아 왔었는데 그때 원장이 나에게 초상화작가를 교섭해 보라 하셨으므로 운보 김기창화백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다들 사례금이 적다고 거절하였기 때문에 내가 대신 그려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 강사도 한 학기동안 해 보았는데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국어도 그랬고 미술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래서 참고 될 서적을 두루 구입해서 읽어 보았지만 큰 효험은 없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사직서를 내어 보았지만 또 다시 반려 되었으므로 방법을 바꿔 주거지부터 멀리 옮기기로 하였다.

그 무렵, 서울의 철거민을 강제이주 시켜 시끄러웠던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되었으므로 나는 장충동 셋방보증금에 조금 더 보태어 성남의 단독주택을 한 동 구입하고 일요일을 이용해서 이삿짐을 옮겼다. 학교직원이나 국립국악원 직원 누구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다시 사직서를 써서, 서울음대 강의 때문에 자리를 비운 교장의 책상위에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성남으로 이주한 후 나는 부탁 받았던 작품원고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필할 수 있었다.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므로 그때까지 막내 누님이 모시고 있던 어머니도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 같아 내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고, 객지를 전전하며 늘 외로웠던 아내도 의지할 곳이 생겨 좋아 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내 자녀인 남매의 재롱을 보시며 아주 흐뭇해 하셨으므로 고부간이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 쓴 원고를 의뢰자에게 전달하기가 용의하지 않았다. 당시 성남시는 「한국판 아메리카 합중국」이란 별칭을 받았을 만큼 8도에 본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의 일터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성남과 서울을 오고가는 버스노선 3개는 늘 콩나물시루같이 만원이 되었으며, 백색전화, 청색전화란 별호가 붙은 전화도 신청자가 너무 많아 반년이상 기다려야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새로 이주한 우리 집에도 전화가 없었다. 맨 먼저 완성된 것이 국립창극단 단장 박동진씨가 의뢰하였던 「포석정의 한」이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완성된 원고들을 모두 전달하고 나니 새로운 원고청탁이 없었다. 우리 집 주소는 알려주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

원래 무료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신을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던 나는, 한 달 가까이 할 일없이 지내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독서신문성남지사였다. 당시 그 신문은 문화공보부가 지원하고 출판협회에서 주관하였었는데 유익한 기사가 많은 주간교양지였지만, 팔도에서 모여 든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사실 흥미 없는 신문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독서인구의 저변확대」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어걸고 부지런히 구독자를 찾아 다녔다.

내가 독서신문지사를 운영하게 되자 성남우체국장이 서둘러 전화를 가설해 주었다., 언론사에 대한 특혜였으리라.

사업에는 워낙 문외한이던 내가 의욕 하나만 가지고 3회 분할납부형식으로 정기독자를 모집하였으나 수금에는 자신이 없어 그 일을 맡길 총무를 채용하였었는데, 성적이 별로 좋지 않더니 2년 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성남을 떠나 버렸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직접 수금을 하려고 카드를 들고 나가 보았더니, 다들 납부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본사에서는 지대독촉이 성화같고 수금할 돈은 몇 푼 남지 않았으므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지만 나는 그때 많은 지인을 얻었으므로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었다.

그래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국방송공사를 찾아 갔었다. 나를 특채해 주었던 이달형씨가 또 한 번 도움을 주실까 해서 였다. 그는 기획실장으로 옮겨 앉아 있었고 어렵게 찾아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날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퇴근 후 여의도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김작가는 사학과 출신이니 전설도 많이 아실게 아니오? 그리고 역사에 이름 남긴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실테고……, 내 한 번 담당PD에게 말해 보리다. 「전설의 고향」과 「일요사극 맥」이란 프로가 있으니 김작가가 필요할 것 같구려」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리고 3일 후, 여의도에 와서 담당PD들을 만나보라는 전화가 그로부터 왔었다.

이튿날 나는 방송공사에 가서 담당PD를 만났었고 그때부터 「전설의 고향」과 「일요사극 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회갑 때 넌 세 살이었어. 그런 네가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큰절을 올리며 「아버님 생신축하 드려요」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대견스러워 하면서도 「쟤가 언제 커서 자식 값 하겠느냐」면서 안쓰러워들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방송극도 쓰고 있으니 정말 장하다. 네 아버지도 지하에서 기뻐하실게다.」

내가 쓴 전설의 고향 첫 작품이 방영될 때 어머님께서는 무척 좋아 하셨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해 가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데 담당PD들은 사례를 많이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방영해 주었으므로 내가 쓴 원고는 1년 동안 몇 편 방영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언쟁을 하게 되었고 화가 난 나는 이달형씨를 찾아가서 집필을 그만두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김작가는 동양화도 잘 그리시니 이참에 화단으로 한번 옮겨보면 어떨까요? 요즘은 화가들이 문인보다 수입이 좋다고 알고 있는데……」

그날 이달형씨가 진지한 얼굴로 해 준 말이었다. 그가 내 그림솜씨를 알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다시 수입 있는 글을 쓰게 해 준 그의 정이 고마워, 한 달 쯤 후에 내가 산수화를 그려 만든 병풍 한 벌을 그에게 선물하였기 때문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처럼 당시 나에게는 지속적으로 생계방편이 될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며칠 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예총화랑에 들려 전시장 임대계약부터 하였었다. 그림부터 그려 모아 전시하기보다, 전시일정을 잡아 놓고 작품 준비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해 10월 26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전국이 비상상태에 들어가 버렸으므로 많은 화가들이 계획하였던 전시를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었는데, 나는 전시장에 지불하였던 계약금이 아까워 강행하였던 것이다.

그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전통수묵화와는 달리 「한가해진 소」, 「병든 왜가리」, 「산불」, 「기계화된 농촌」 등 현대감각과 시사성이 가미된 것들이었다. 그렇게 개최된 첫 개인전은 그나마 성황을 이루었다. 동강 조수호선생과 청람 김판영선생님도 오셔서 격려해 주셨고 동주 박진목선생을 처음 만난 것도 그 전시장에서였다.

동주선생은, 대구 달성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박상목선생의 아우 되시는 분인데, 형님의 부탁을 받고 대구지방에서 모금된 군자금을 만주로 전하려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던 민족주의자이다. 그러한 동주선생이 내 첫 개인전에 관람 차 오셨다가, 인사를 청하셨으므로 알게 되었었는데 선생은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림도 잘 그렸고 시사성도 높으니 내가 제안 하나 하겠네. 자료사진은 내가 줄테니 북한의 명소를 한번 그려 보시게. 혹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이리로 연락해 주면 그 뒷일은 내가 추진해 보겠네.」

선생이 주신 명함에는 「민족통일촉진회」 공동대표란 직함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전시가 끝난 후 동주선생을 찾아 갔었고, 선생이 주신 「두고 온 산하」라는 책자의 사진을 보며 2년 반 동안 준비하여 안국동에 있던 덕수미술관에서 개최한 것이 「그리운 산하전」이었다.

당시에는 신군부의 반공법 적용이 최고조로 강화되고 있을때이므로 주변에서는 나의 신변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았었다.

「자칫 잘못 되면, 북한을 찬양하였다는 누명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실향민들에게 향수심을 되살려 주는 한편, 비록 이데올로기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산천이나 문화유적은 남북이 동일하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재인식시켜 줄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의욕이 넘쳤던 것이다.

그 전시는 대성황리에 끝났고, 나는 그 전시로 인하여 윤길중, 박권흠의원 등 수 많은 정치인과 송지영, 서영훈선생 등 각계의 명사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고향을 떠나 서로의 생사마저 모르던 많은 이산가족들이 전시장에 왔다가 다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산가족 찾기는 K.B.S보다 소산 형이 먼저 시작했던거요」

내가 문화공보부에 근무할 때 알게 되어 호형호제하던 한국일보 문화부기자 K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를 T.V로 보다가 웃으며 한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출발한 나의 화단생활은 경희대, 고려대 강사와 조달청 및 한국도로공사의 초빙강사로 10여 년 간 출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경희대는 안치열학장이, 조달청에는 남두진국장이, 그리고 한국도로공사는 손진호본부장이 초빙에 앞장서 주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운 산하전에 관람 차 와서 알게 된 분들이었고, 고려대는 경희대 미술교육학과에 자주 강의를 들으려 왔던 「고대수묵화연구회」란 동아리회장 C군의 요청으로 출강했는데, 그때 나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미술을 잠시 지도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참고서적을 사서 보았던 것과 동강 조수호선생의 권유로 여러 권 읽어보았던 수묵화에 대한 고전들이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수묵화의 이론과 실기」라는 책도 출간하게 된 것이다.

동강선생과 김판영선생님도 그때부터 자주 뵙고 조언을 들었었는데 그때마다 두 선생님은 자신의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 하시면서 실제보다 과분하게 치켜 주셨고, 박권흠의원은 대한체육협회 이사장일 때 내 아들의 결혼식에, 서영훈선생은 대한적십자사 총재 때 내 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시는 등, 계속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서울예술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서울예술신학대학은, 내가 D영화사에 근무할 때 이봉래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이상열씨가 설립했던 개신교 쪽 신학교였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성남에 이주한 후였다. 그 무렵 나는 독서신문성남지사장을 하면서도 문학적 창작의욕이 강하였으므로, 서울의 판자촌에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의 애환을 소재로 한 단막극본 「대이동 그 후」를 습작 하였었는데, 독서신문 독자 중에는 「경북학생극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던 한세훈이 있었고 그 무렵 그는 K.B.S 성우로 활약하면서 성남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더니

「시승격 3주년 기념으로 시민위안의 밤을 개최하고 그때 이 단막극을 공연하면 좋겠오. 마침 내가 그동안 노역을 많이 맡아왔으니 작품에 나오는 복덕방영감은 내가 맡고, 주인공인 회사원은 후배 성우 박성규에게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거요」

그래서 나는 그것이, 독서신문 홍보에 도움이 되겠다싶어 성호시장입구에 자리잡은 천일극장을 빌려서 행사를 치루었는데, 그때 구경 왔던 사람 중에 이상열씨와 영화배우 이대엽도 있었던 것이다. 영화배우 이대엽씨도 내가 D영화사에 근무할 때 이미 친숙해진 사이였는데 그는 나보다 먼저 성남에 들어와서 남한산성 라이온즈클럽 회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독서신문 독자확충에도 도움을 주었던 터이다.

그 공연이 계기가 되어 이상열씨는 나에게 선교극본 집필을 의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원래는 신실한 불교신자였었는데, 결혼 후 개신교 쪽 신앙을 가진 아내와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다가, 가정의 평안을 위해 스스로가 개신교 쪽으로 개종하고 신학대학을 거쳐 그 무렵에는 성남에서 개척교회 목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써 준 선교극 두 편은 그의 교회에서 부흥회 때 공연하였고, 소록도에 있던 애양원 원장 손양원목사의 삶을 극화시켰던 「카인의 후예와 아벨의 후예들」은 성남시민회관 신축개관기념공연으로 발표하였었는데 이때 그가 연출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이목사는 개척교회를 운영하다보니, 미안해하면서도 소액의 원고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1주일에 한번 씩 조달청과 한국도로공사, 그리고 경희대와 고려대에서 수묵화와 문인화 지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누가 보아도 겸업작가였었고 그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목사가 성남을 떠나 서울의 N교회 담임목사로 갔었는데 그는 「생명」이라는 선교극단까지 운영하면서 계속 나를 찾아와 선교극본을 의뢰하였었다. 그 극본들은 그가 부흥목사로 초빙된 전국의 교회에서 공연되었다.

강압적이던 신군부의 집권 제1기가 끝나갈 무렵, 이목사는 다시 나를 찾아와, 자신이 예술신학교를 하나 설립하였으니 문창과 교수로 출강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에서 해당과목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문인협회나 미술인협회에서 실력을 인정해 주면 교수직이 허용 되었었고, 특히 신학교는 문교부의 간섭이 그리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학교에서 문창과학생 지도뿐 아니라, 회화과학생들의 수묵화도 지도하는 겸임교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화가이기 보다는 문인으로 불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때문에 청송으로 내려온 후 대구시민회관에서 개최하였던 「통일염원전(2008년)」의 도록 서시에도 「화가이기 보다는 문인이고 싶었는데/ 세상사람들은/ 희곡작가 보다는 동양화가를/ 쉬이 기억하더군/ 그래서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짧게 줄여서/ 그림 속에 써 넣기를 좋아한다네」라고 썼던 것이다.

아직도 고백하지 못한 사연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관계상 마무리 지어야겠다.

앞에 언급한 사람들 중에는 아직 살아 계신 분도 많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많다.

살아있는 분들과는 서로 통화하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진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인생의 무상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삼가, 고인이 되신 분들의 명복과, 살아계신 분들의 건승과 평안을 다시 한 번 빌면서 이제 자판에서 손을 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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