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비행기가 낮게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마당에서 백구와 뒹굴고 있는 나를 사색이 된 할머니가 집으로 잡아끌어 문을 잠근다. 학교에 입학하고 더듬더듬 책읽기에 재미를 붙여갈 즈음 비행기 소리와 포쏘는 듯 한 소리가 잦아지고 있었다. 어느날 해는 지고 어두운데 벽 한 켠에 걸린 남포불도 켜지 않고 나와 동생의 입을 막아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쉿, 난리가 났다나…….
키가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아버지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엄마는 쪽머리에 한복차림의 여느 엄마들과 달리 뽀글뽀글 파마머리와 양장차림에 뾰족구두를 신었다. 뾰족구두가 신기해되똑이며 끌고 있으면 엄마는 " 야 이게 얼마짜린데 "기겁을 하며 높은 곳에 올려 놓았다. 엄마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무언지 몰라도 기분은 좋아져 하던 짓을 놓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황해도 사리원 빨간 벽돌의 2층집이 있고 넓은 마당을 가로 질러 여러 칸의 집이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 간호사와 또래의 사내아이등 우리식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이 있고 할머니와 하얀 앞치마를 두른 고모가 밥이며 빨래며 살림을 맡아하셨고, 할머니 손에는 늘 걸레인지 수건인지 들려있어 2층을 오르는 난간이며 계단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엄마가 밥을 짓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고모부는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총포사와 사냥을 하셨고 긴 총을 만져보고 싶어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니의 잰 걸음에 텃밭의 남새들은 초록 빛을 더하고 초여름 땡볕에 양귀비는 선혈을 뿌려놓은 듯 붉었다.
무적자(無籍者)
영문도 모른 채로 어느 날 나는 혼자가 됐고 군부대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를 돌봐주던 육군상사가 한분 계셨는데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니 그나마 나에 대한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왜 내가 혼자 떨어졌는지, 정확한 생년월일도 알지 못한 채로 군인들과 함께 살았다. 어름짐작으로 열 댓 살 무렵 장교 한 분의 알선으로 군부대에서 나와 병원에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청소와 물자가 귀한 시절 붕대도 빨아서 쓰니 피 묻은 붕대를 세탁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이 전부였다. 전쟁고아가 넘쳐나던 시절이라 먹고 잠 잘곳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간호사는 내가 안쓰러운지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주고 자기 방 한 켠 에 따뜻한 잠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엄마 같고 누나 같아서 시커먼 남자들만 있는 군부대와 달리 포근함을 맛보며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되었다. 병원 생할도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하고 나는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삶은 보리쌀을 소쿠리에 담아 처마 밑에 달아 놓은 것을 통째로 훔쳐다 먹기도 하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견디기 힘든것은 혼자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세상 인심이었다. 어쩌다 싸움이 붙으면 전후 사정이 어찌되었든 일방적으로 내 잘못으로 몰리는 것이 억울해 나는 점점 악바리가 되어갔다. 덩치 큰 아이들과 싸우려니 오래 끌면 불리해 단번에 승부를 내야했다. 한방이 필요했고 기술이 점점 늘어 발등 올려 차기 한방이면 끝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심심한 시골 남자애들의 괜한 시비에 항상 걸려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 싸움대장이 되었다. 지는 날이면 혼자 분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밤중 그 집 장독대를 돌로 깨뜨려 마당을 간장으로 진창을 만들었고 그아이가 지나기를 기다려 어떻게든 되갚음을 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차츰 나를 건드리는 횟수가 줄었고 나름 시골 동네에서 자리 잡아 살게 되었다. 지금도 흉하게 뭉뚝한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보면 그때의 무모함에 쓴웃음이 나온다. 동네에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아이들에게 등 떠밀려 해 본적도 없는 씨름판에 나서게 되었다. 상대는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힘이 센 아이였으나 응원하는 아이들 앞에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리 몇 판을 모래밭에 내동이 쳐진 나는 쳐다보는 아이들 보기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야 이런 법이 어디 있냐 ? 양회다리 가서 다시하자 "
동네 개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로 돌다리가 대부분인데 유일한 시멘트 다리였다. 난간이 없어 가끔 술 취한 어른들이 떨어져 물에 떠내려 가고 다치기 일쑤였다.
" 양회다리 가서 다시하자"
억지를 써 양회다리로 가서 다시 한판 붙었으나 기술로나 힘으로나 상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나는 씨름이 아닌 나의 특기인 발차기로 상대를 넘어 뜨렸다. 넘어진 아이는 매달리며 내손가락을 깨물었다. 물고 늘어지는 아이를 다리 밑으로 힘껏 차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 쳐 왔다. 집에 와보니 새끼손가락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도 없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고약을 붙여 칭칭 동여매었다. 풀어보지도 않고 내버려두니 퉁퉁 부었다 빠졌다 만지지도 못할 만큼 아팠다 하길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 풀어보니 손가락 끝이 부러져 뼈는 따로 놀고 끝은 흉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지금은 이동갈비가 유명한 먹거리촌이지만 당시에는 정육점 한곳이 있었다. 정육점 주인은 뚱뚱한 과부댁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려 달려가 보니 과부댁이 물에 빠져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어른들도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영을 못해 뛰어들지는 못하고 아래로 한참을 달려가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간신히 끌어내었다. 이후로 과부댁은 가끔씩 나를 불러 고기를 썰어주어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자주 고기를 주는 것이 부담스러워 정육점을 피해 멀리 돌아서 다녔다. 수리시설이 되어있지 않던 시절 봄철 모내기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논바닥을 깊이 파서 물을 퍼 올리느라 밤샘을 해야 했다. 방앗간에서 쓰는 피대와 펌푸를 개조해 양수기를 만들었다. 쩍쩍 갈라진 논에 물을 퍼 올려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자기논에 물을 대기 위해 나를 데려 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자기들이 알아서 기계를 걷고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가면 다시 펼쳐 설치만 해주면 되었다. 양수기는 봄에는 물을 퍼 올리고 가을에는 탈곡기가 되었다. 벼를 베어 동네 마당으로 싣고 와서 탈곡을 해야 했지만 논에서 바로 탈곡을 하여 사람들의 품을 줄여주는 획기적인 기계였다. 곡물로 삯을 받아 나도 모처럼 양식 걱정 없는 풍요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툇마루에 쌀이며 고구마 잡곡들까지 수북이 쌓였으나 그것을 돈으로 환전 할 줄은 몰랐다. 혼자 먹고 남아 당시 끼니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겨우 밥걱정을 덜었나 싶은 중에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동네에 버려진 네 다섯 살 된 사내아이를 데려와 같이 살았다. 애가 애를 키운다고 동네 어른들 모두 혀를 차며 말리셨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며 고아원에 갖다 주라고……. 그러나 그 시절 고아원이 아이들에게 밥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보다는 눈 빠지게 나를 기다리는 그 아이와 피붙이는 아니지만 한 이불속에서 느끼는 온기가 좋아 보낼 수가 없었다. 가끔씩 엄마한테 간다고 무작정 신작로 길을 내달리는 아이를 붙잡고 나도 엄마가 보고 싶고 고달픈 현실이 서러워 같이 울었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능력도 없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 불법이라 하며 관에서 사람이 오더니 아이를 데려가 버렸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군부대에 살면서 미군들이 몰고 다니는 군용차를 태워달라 떼를 쓰면 미군들은 나를 태우고 초콜릿이며 껌이며 당시 우리나라에 없는 귀한 간식거리를 주었다. 군인들도 문맹자가 많던 시절이라 부대에서 저녁이면 야학이 열렸다. 다행이 잠시 다닌 초등학교에서 한글은 깨우친 터라 통신강의록으로 초등과정과 중 고등과정을 엉터리지만 배웠기에 일자무식은 면 할 수 있었다.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생시찰을 위해 헬기를 타고 온다고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볼거리 없는 시골동네에 대통령의 시찰은 놓칠 수 없는 귀한 행사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어른들은 대통령을 뵙는데 예를 갖추어야 한다며 갓 쓰고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기다렸다. 대통령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구멍가게며 쌀집 등에는 조사반이 나왔다. 현물가와 다른 대답을 정해주어 대통령의 눈과 귀는 철저히 가려졌다. 나는 솔직히 대통령은 관심이 없었고 헬기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뽀얀 먼지 날리는 군중들 틈 맨 앞으로 끼어들었다. 헬기의 강한 바람에 허술한 초가지붕이 날아가고 싸리나무를 엮어 세운 울타리들이 일제히 넘어졌다. 바람과 먼지를 뚫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은 몰려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앞줄에 있던 나에게도 손을 내미니 얼떨결에 대통령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내가 본 이승만 대통령은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였지만 동네 어른들은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박수를 치면서 한적한 시골동네가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불법영업 택시
양수기와 탈곡기로 돈을 조금 손에 쥔 나는 미제세단 삐꾸 (브익)를 200만환을 주고 샀다. 부대에서 들은 오케이 댕큐 영어 몇 마디와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실력으로 번호판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는 택시영업을 시작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부대가 있는 산골짜기를 오갔다. 처음에는 얼마를 받아야 할지 몰라주는 대로 받았다. 그랬더니 말도 못하는 나를 무시하고 돈도 안주고 부대 안으로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닭 쫓던 개 울타리 쳐다 보기로 다른 수를 찾아야 했다. 계산도 쉽고 거스름도 필요 없이 무조건 한 명당 1달러 오케이? 손가락을 일곱 번 세어 보이며 7명 7달러 오케이? 일곱 명이 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렸다. 바쁘다고 재촉하면 7달러를 받았고 불법이지만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파출소(지서)에는 한 달에 한번 백양담배 한 보루를 사다주면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다 싶으면 지서장이 오늘은 하지 마래이 미리 연락을 주었다. 그런 날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읍내에 내다 팔았다. 어른들이 하루에 나무를 오전에 한 짐, 점심 후에 한 짐씩 할 수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지게에 한 짐을 채우고 큰 나무 하나를 톱으로 잘라 끌고 내려왔다. 끌고 온 나무를 자르면 대여섯 짐은 족히 되어 하루하루 돈 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서랍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 어른들은 돈이 필요하면 내게 달려왔다. 조건이나 이유를 묻지도 않고 원하는 만큼 서랍에서 돈을 꺼내주었다. 말은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고 받지도 않았다.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도 모르고 번 돈을 어찌해야 할지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를 못했다. 시골에서 은행을 본적도 없고 읍내에 은행이 있어도 돈 많은 유지들이나 어른들이 가는 것으로 알고 갈 생각을 못했다. 몇 단짜리 서랍장에 달러와 지폐가 가득 쌓인 어느 날 화폐개혁이 되었다 했다. 지금까지 쓰던 돈은 쓸 수가 없으니 은행에 와서 새 돈으로 바꾸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가마니 석장에 돈을 담아 리어카에 싣고 털털거리며 은행이란 곳을 난생 처음 갔다. 동네 청년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가니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다. 실랑이 끝에 들어가 가마니를 열어보이자 소동이 일어났다. 혼자 사는 애가 돈을 가마니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오다니…….순사가 달려오고 돈의 출처를 의심받아 지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지서장이 나를 알고 있었고 돈을 잘 벌고 있다는 이웃 주민들의 증언으로 세가마니의 돈은 한보자기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더 이상 택시영업은 할 수가 없게 되었고 내 마음도 심란해져 시간만 보내다가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가자.
가자 서울로
갖고 있던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와서 팔았다. 평소에 검은 고무신이나 군화 말고는 신어 본적이 없었다. 신고 싶었던 운동화를 사고 구김이 없어 다림질도 필요 없다는 새로 나온 나일론 남방셔츠를 사 입었다. 이발소에 들러 이발도 하고 한껏 멋을 부린 차림으로 서울로 와서 청량리에 내렸다. 말로만 들어본 남산팔각정을 가보자 걸어서 남산 팔각정을 올라갔다. 올라가서 내 모습을 보니 새로 산 검정 운동화와 새 셔츠, 누가 봐도 시골서 올라온 촌뜨기, 눈에 확 띄었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저렇게 집들이 많은데 오늘 밤 어디로 가야하나 상념에 빠진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댓 명의 불량배로 보이는 아이들이
"야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기 왔냐?"
순간 나는 여기가 허락 받아야 오는 곳인가? 속으로 움찔했으나 시골이지만 싸움이라면 누구에게 져 본적이 없는 내가 아닌가.
" 산에 오는데 무슨 허락을 받아 니가 주인이야 뭐야"?
덤벼들었고 우리는 뒤엉켜 치고받는 중에 순사가 와서 남산 밑자락에 있는 파출소로 끌려갔다. 몰매를 맞은 나는 입술이 터지고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으나 연고도 없는 촌뜨기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른들이 와서 애들은 하나 둘 데려가고 나만 종로경찰서로 인계되어 며칠 구류를 살고 나왔다. 입성기를 톡톡히 치르고 서울 살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깡패이자 경찰들의 정보원들로 보였다. 우선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했다. 신문이라도 팔아 보고자 동아일보에 가서 신문을 받아 광화문 사거리로 나왔다. 국제극장 앞에서 다른 애들이 하는 대로"석간 동아요 동아" 를 외치며 두 세부 팔았을까 어디서 시커먼 애들이 나를 에워 쌓았다. 누구 맘대로 여기서 신문을 파느냐 시비를 걸었고 싸움이 되어 파출소로 잡혀갔다. 이번에도 다른 애들은 나가고 혼자 남았다. 팔에 무슨 완장을 두른 남자가 오더니 동아일보 옆 건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입구에는 상이군인 감찰대 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두리번 거리는 내게
"너 갈데없지? 어디서 온 놈이야?"
이것저것을 캐묻더니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면서 심부름을 하란다. 어떤 꼼수가 있을까 두렵기는 했지만 우선 밥걱정 잠자리 걱정을 면하는 것만 다행이다 싶어 주저앉았다. 팔아보지도 못한 신문뭉치를 둘러 메고 광화문 거리에 가서 하늘을 향해 힘껏 뿌렸다. 내 나름 억울함에 대한 화풀이였다. 신문은 호외라도 뿌려진 듯 거리에 날리고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줍기에 바빴다. 전후 상이군인들은 팔에 쇠갈고리를 한 채로 자신들의 희생에 보상이 없는 국가와 세상을 향해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그들을 관리하는 곳이 상이군인 감찰대였다. 힘들이지 않고 의 식 주를 해결한 나는 장차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다. 종로 Y M C A 옆에 중앙라디오 전기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던 나는 졸업을 하고 나서는 신입생들을 가르치는 얼치기 강사노릇을 한동안 했다. 이것저것 회로를 연결하고 납땜을 하여 라디오를 조립해서 당시 유행하는 노래도 듣고 저녁이면 연속극도 들었다. 최 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 한명숙의 노란 사쓰의 사나이, 박재란의 산 넘어 남촌에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도 조금은 순화가 되었다. 하지만 라디오가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밥벌이는 안되어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신문물이 밀려 들어오고 거추장스러운 한복보다는 편한 일상복을 선호하는 시기였다. 기술을 배우고자 양재학원을 다녔다. 서울생활에 적응하며 살고자 애를 써도 세상은 혼자인 내가 편안하게 살게 놔두지를 않았다. 혼란한 가운데 종로와 동대문 시장 일대는 상권과 이권을 두고 불량배들의 폭력이나 패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공기관이나 사회의 통제나 보호가 미치지 않는 가운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중심에서 몸과 마음이 성할 날이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싸움판에 끼게 되었다. 싸움에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나는 몇 명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모를 만큼 사력을 다했다. 잡혀가면 나만 남는 여러번 의 경험이 있어 용산 역으로 가서 인천행 기차를 탔다. 용산 역에는 새까만 무연탄이 역 가운데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개찰구 반대편에는 기차표 없이도 탈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역들이 개찰구는 허술했고 검표 없이 제물포에 내려 인천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항구가 있는 하인천은 서울보다 일자리 구하기는 수월해 세탁소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주로 빨래를 하다가 서울서 몇 달 배운 양재기술을 밑천으로 수선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옷이 미국의 구호물품이다 보니 우리 체격에 맞지 않는 큰옷을 줄이는 일감이 많았다. 성질은 급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내성격상 누구보다 많이 했고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눈 여겨 보던 이웃 양복점 주인이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하며 맞춤양복점 기술자로 나를 불렀다. 기술자로 일이 손에 익어갈 즈음 함께 일하며 챙겨주고 환한 미소를 보내는 C에게 딱히 말로 설명 안 되는 묘한 감정이 솟아났다. 휴일이 따로 있지는 않았으나 일이 좀 한가한 날에 근처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고 영화도 가끔 보았다. 험하고 거친 삶을 살아온 나에게 C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렘으로 기다림을 품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아마도 첫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양복점 건물 주인인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체구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아주머니가 있었다. 건물이 여러 채인 부자라는 소문이다. 딸 둘을 두었는데 작은딸을 내게 소개해 줄테니 데이트를 하라며 자꾸만 찾아왔다. 퇴근 때를 기다려 식당으로 나를 끌다시피 데려다 놓고 가버린다. 성당으로 불러내어 붙잡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졌다. 자기 딸과 결혼하면 시청 옆에 있는 제일 값나가는 건물을 줄테니 거기서 양복점을 하라고 했다. 곤란한 이상황도 벗어나고 남자인데 남들가는 군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사는데 별문제 없었으나 호적도 없이 군대는 갈수가 없었다. 동네 어른 두 분이 보증을 서고 대서소에서 생년월일을 만들어 호적을 취득해 비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생년월일은 대서소 주인이 자기 딸과 같은 날자로 만든 것이 1946,6,6 일이다. 내가 태어난 해가 단기와 서기에 같은 숫자가 두 개씩 있다는 얘기를 벽에 붙여놓은 한 장짜리 달력을 보며 들은 기억이 있다. 1944년도가 단기로는 4277년이니 아마도 내가 태어난 해가 1944년이 아닌가 추측만 해본다. 물론 날짜는 알지 못하고... ...
해병대 입대
인천항에 들어온 해군함에서 내려오는 해군들의 하얀 제복이 멋져 보였다. 이왕 가려고 마음먹은 군대니 배를 타고 먼 곳으로 나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해군에 자원을 하였으나 불합격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나오는 중 벽에 붙어있는 해병대 모집공고를 보았다. 해병대는 지원자가 적으니 의도적으로 붙여놓은 벽보였다. 내침 김에 어디든 가보자 해병대에 지원을 했다. 1966,5,28 입대를 해서 훈련을 받으니 혼자 독하게 살아온 나도 거품을 토할 만큼 혹독했다. 하루에도 몇 명은 죽어도 못 하겠다 집에 간다며 군복벗어 팽개치고 알몸으로 달아나다 잡혀왔다. 사회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해병대 안으로 도망 오는 애들도 부지기 수였다. 무슨 사고를 치고 왔든지 일단 들어오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니 그 당시 사회구조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고단하지만 젊은 패기로 하루하루 견뎠지만 고된 훈련에 비해 먹는 것은 부실해서 늘 배가 고팠다. 요즘 군대처럼 식판이 아니라 양은으로 만든 양재기 두 개에 국과 밥이 전부였다. 한 병사가 더 주기를 청하면 양재기로 머리를 내리쳤고 얇은 양재기는 찌그러져 밥은 더 줄어 들었다. 배고픔을 못견딘 한병사는 설거지 물에 떠내려오는 밥알이며 콩나물 꼭지를 손으로 받쳐 건저 먹기도 했다. 해병대가 창설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훈련을 마치고 신설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신설부대 이니 가는 날로 선임이 되어 장교 말고는 모든 병사들이 후임이다. 처음부터 군에서 가장 어렵다는 쫄병 생활없이 곧바로 선임이 되었다. 개병대로 불리는 군 생활은 모두들 힘들다고 투덜 대었다. 나는 C가 보내온 연서를 받으면 좀더 멋진말로 끙끙대며 답장을 쓰고 기다리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온 내게 두려울게 없었다. 오히려 숨 돌릴 틈 없는 빡빡한 일정에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정신이 성취감을 넘어 묘한 희열을 느꼈다. 전쟁직후 이승만 정부나 군이나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빨갱이 색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울산으로 포항으로 군인이면서 민간인으로 잠복하여 작전을 나가느라 부대 앞 민가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부대 안에서 세탁소를 하는 분이었다. 어느 날 부터 조카라는 아가씨를 온갖 구실을 만들어 내 주위를 맴돌게 하였다. 내가 묵는 방을 말끔히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해놓고 먹거리를 들고 무시로 내방을 들락 거렸다. 불편해진 나는 부대로 들어가 버렸다. 중대장은 자신도 고향이 이북이라며 가족이 없는 나를 무던히도 아껴주었다. 제대할 날이 3개월 남짓 남은 어느 날 양복점 주인 아주머니 한테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C가 인천의 아주 유명한 건달 보스와 결혼을 했다. 제대하기 전에 알려 주는게 도리일 것 같아 연락을 하니 편지 하지마라. 생각해 보니 얼마 전부터 편지가 뜸하다 싶었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손에든 편지를 떨어뜨렸다. 믿어지지 않아 이게 꿈이 아닐까? 벽을 힘껏 쳐보니 꿈은 아닌데 당장 쫒아갈 수도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읽어보니 그 건달이 납치하듯 데려가 성대한 결혼식을 했다. 너하고는 인연이 아니니 잊어버려라……. 내무반에 틀여 박혀 꼼짝 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겨우 내린 희망의 실뿌리가 통째로 뽑힌 기분 이었다. 또다시 아무도 없는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머릿속이 텅비었다.
귀신 잡는 청룡부대
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지 하는 마음으로 월남파병을 지원했다. 중대장은 지금이 가장 치열한 전투중이고 열 명 중 여덟은 죽는 전쟁터야 놀러가는게 아니라구, 뽑혀도 안 가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데 제대가 낼 모랜데 돌았냐? 하면서 신청서를 찢어버렸다. 다시 신청서를 넣고 찢기를 반복하다 하루는 술을 잔뜩 마시고 중대장을 찾아갔다.
"정말 가야 되겠니 왜 가야 되는데?"
실랑이 끝에 1966년 5월28일 부산에서 월남 가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부두에 몰려온 가족들과 대대적인 환송인파의 물결을 뒤로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라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지났다. 난생 처음 타보는 배 멀미와 알 수 없는 설사병으로 병사들이 쓰러졌다. 처음 보는 좌식 변기에 군화를 신고 올라 앉아 미끄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며 15일을 항해하여 월남 다낭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미군과 월맹군의 전투라는 것이 진지를 뺏고 뺏기는 우리의 6,25 전쟁과는 달랐다. 한 가족 중에도 아버지는 월맹군, 아들은 월남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직장 안에도 적군과 아군이 섞여있으며 오랜 전쟁으로 사회 깁숙히 전쟁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총쏘고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 넘어져도 죽은 사람 옆을 개구리 한 마리 죽어 있는 양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전쟁을 하러온 우리들이 이상해졌다. 도착한지 한 달도 안 되어 많은 동료들이 눈앞에서 스러졌고 우리들은 말을 잃었다. 아침에 보았던 동료들의 얼굴이 저녁이면 보이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의 작전도 적군을 찾아내는 첩보작전으로 가정집에서 두어 달을 지내기도 하고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많았다. 자연스레 월남 말을 배우게 되었고 말이 되니 월남군과의 협력은 수월했다. 키가 작은 나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현지인 속에 섞여 더 많은 작전수행에 앞장을 서야 했다. 적군의 요충지로 판단한 그곳은 민가도 있고 일상의 삶의 터전이었다. 전쟁이란 얼마나 억울한 희생을 수반하는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어차피 삶의 미련을 버리고 온 나로서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작전을 나가면 맨 앞에 섰고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숨막히는 긴장속에 내 뒤를 따라오는 병사는 내 발자욱을 찾아 따라오지만 펑 소리와 함께 불바다가 되었다. 1년 내내 더운 날씨는 우리를 더욱 지치게 했다. 건기와 우기로 구분되는 날씨는 우기에는 석달동안 비가 내렸다. 집집마다 처마 끝에 작은 보트가 매달려 있는데 우기에 도로는 뱃길이 되어 보트를 타고 다녔다. 이어지는 작전중 네명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닷새가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소변을 받아 마시는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몇걸음 앞에 물이 있고 헬기가 비상식량을 떨궈 놓았으나 머리만 살짝 들어도 사방에서 포가 날아오니 눈앞에 뻔히 보이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구출작전이 시작 되었다. 목이 타들어가 의식은 멀어지고 헛것이 보였다. 치열한 사투 끝에 두명의 전우가 희생되는 댓가를 치루고 우리는 사지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더위와 굶주림에 탈진했던 한병사는 끝내 의식을 못찾고 낯선 이국땅에서 별이 되었다. 그 병사는 귀국을 십여일 앞두고 있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호이안에서 보트에 시레이션을 싣고 해안선을 따라가면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 파는 곳이 있었다.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교환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보트의 시동 거는 줄이 끊어졌다. 몇 시간을 바다를 표류하다가 헬기가 와서 구출되어 중대장한테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 차였다. 비포리라고 하는 화포가 몸을 훓고 지나가 온몸이 불고기가 될 만큼 화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헬기로 독일 군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전신을 붕대로 싸매고 한 달 넘게 치료를 받고 병원을 옮겨 서너달 치료를 받았다. 나는 화상을 입었으니 당연히 온몸이 일그러지는 흉터가 남을 것이라 짐작하고 치료를 거부하며 죽기를 청했다. 한국의 남자보다 훨씬 체격이 큰 독일 간호사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주사도 거부하고 식사를 가져오면 내던졌다. 하지만 간호사는 표정한번 찡그리지 않으며 서툰 한국말로 참으세요, 참으세요를 연발하며 나를 달랬다. 두려운 마음으로 붕대를 풀자 어디 한곳 일그러짐 없이 말끔했다. 주근깨가 자글하던 얼굴은 박피효과로 오히려 더 깨끗해져 행패를 부린 간호사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청용부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는데 월남 전투에서 가장 치열하고 어려운 고지를 탈환해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우리부대에 가수 남진, 진송남, 태원. 이명진이 연예부대가 아닌 전투병으로 왔다. TV가없던 시절이니 얼굴을 알 리 없고 그렇게 유명한 가수인지 알지 못했다.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 왔는데 사격실력을 핑계로 훈련을 시키며 진상 선임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전투중인 병사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선임의 의무이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네가 그렇게 유명한 가수라며? 노래 한번 불러보라 군대이기에 가능한 선임병 갑질을 했다. 라디오에서 들어본 목소리로 가수임을 알았고 치열한 전선의 시간표도 세상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가끔 있었다. 최고의 가수들이 왔지만 젊은 장병들이 가장 환호하는 것은 아슬아슬한 무대의상의 무용수였다. 여자가수의 흥겨운 노래는 그 순간 이곳이 숨 막히는 전쟁터라는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죽은 자가 되어
붕대도 풀고 흉터걱정도 없어지니 병원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병원 측에 일언반구도 없이 부상병을 싣고 온 헬기를 타고 근무하던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기록이나 전상망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나는 3개월 전 화포공격에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귀신도 아닌 내가 나타나니 채 순구 주 월 사령관은
" 너 이 새끼 이게 어케된 거이야 방수병 맞네?"
하며 부등켜안아 되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리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전사 처리 되었다니 웃음이 나왔다. 이미 제대 날짜가 몇 달을 넘은 터에 귀국절차만 남아 있었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PN이라는 냉동전문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원서를 내 채용결정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차피 돌아가도 혼자인데 미국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귀국날짜가 임박해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뻔데기 장사를 할망정 같은 민족이 사는 내 나라가 낫지 않을까 며칠을 갈등을 하다가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2주가 넘는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 해서 군 트럭에 실려 부대로 갔다. 제대를 위한 특별교육을 받고 밖으로 나오니 세탁소 아주머니와 조카인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선이 올 때마다 항구에 와서 찾았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벌써 죽었다는 소리에도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며……. 기다렸다는 것이다.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온 것처럼 나를 부등켜안고 울어 민망했다. 복무기간이 남은 병사는 부대로 복귀하고 나머지는 제대증을 받고 사지에서 돌아온 영웅이 되어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흩어져갔다. 전사자가 되어 있는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웃지 못할 처지가 되어 있었다. 세탁소 아주머니의 간청에 딱히 갈 곳도 없어 우선 그 집에 짐을 풀었다. 무엇보다 주민증을 살려야 어디를 가던 일을 하던 할 게 아닌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모든 서류가 수기로 작성되는 시절 이었다.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나에게 대대장은 백지에 자필로 귀향증이라 써주며 해병대 본부로 가서 해결을 하란다. 차비 2만원을 받아들고 기차에 올랐다. 쫓기며 숨어 들었던 용산역을 지나 서울역에 내려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 본부를 찾아 갔다. 귀향증을 내밀었으나 누구 하나 내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더러 믿지를 않았다. 군복에 붙은 명찰과 대대장이 써준 귀향증으로 내가 본인이라는 말도 안되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사망자가 되어 국립묘지에는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나 내 핏줄이라 증명해줄 사람 하나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서류하나 해다 내밀면 또 다른 증명서를 요구했다. 서울에서 울산과 포항으로 몇 달을 쫓아다닌 후에 나는 죽은 자에서 산자로 복권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장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끊겼던 내 젊은 시간의 한 장이 그렇게 이어졌다. 전투수당과 제대 위문금등 무연고자로 국고에 귀속되었던 약간의 돈을 손에 쥐고 파란 만장한 제대를 하니 1969,10월,30일이다.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가는 것을 극구 말리는 세탁소 아주머니에게 서류상 죽은 사람을 살려야 사람 노릇할 것 아니냐 다시 오마 하고 서울로 왔다. 다시가면 세탁소 아주머니와 조카 아가씨에게 잡힐 것 같아 짐도 포기하고 가지 않았다. 짐 속에는 어릴 적사진 등 그나마 내 삶의 흔적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북이 고향인 중대장은 이러저러한 물건을 자기 집에 갔다 주라며 나를 불렀다. 가끔 심부름을 가본 적이 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짐을 들고 갔다. 중대장님의 무슨 사전 언질이 있었는지 사모님은 고향이 평안도이며 친척도 없고 외로우니 동생 누나로 같이 살자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한 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는 망설이다가 그러마하고 눌러 살게 되었다. 누님 댁 에는 초등학생 아들 하나와 딸이 셋이 있었다. 아이들도 별 거부감 없이 나를 삼촌으로 받아들여 난생처음 식구라는 구성원으로 살아보게 되었다. 누님을 자청한 송 정자 여사는 그야말로 평양 피난민 또순이였다. 남자도 힘든 집을 ( 집장사 )직접지어 팔아 군인 월급으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큰돈을 벌었고 무슨 일에나 거침이 없는 여장부였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서울엔 집이 부족했고 지으면 팔려나가니 누님의 집장사는 호황이었다. 그 무렵 서울시장은 난립하는 무허가 건물도 막고 서민들의 집 문제를 해결한다며 산중턱에 아파트를 지었다. 입주한지 4개월 된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 아파트 한동이 통째로 붕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나가다 보게된 현장은 폭격을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6개월의 짧은 시공 기간과 터무니없이 적게 쓴 철근이 직접적인 붕괴원인이라 했다. 애초 서울시가 예상했던 건축비의 절반으로 시작한 건설사는 원래 써야하는 철근의 십분의 일도 쓰지 않았단다. 서민들의 생활의 편의성 제고와 도시계획의 측면에서는 훌륭했지만 졸속행정과 부정부패의 결합이 만든 인재였다. 붕괴의 조짐이 있었으나 안일한 대응이 애꿎은 서민들만 희생된 안타까운 사고였다.
말단 공무원이 되다
일자리를 찾아야했고 우선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자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십대부터 운전을 했으나 한남동 면허시험장보다는 수월하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 하기로 하였다. 두 달이 지나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후 나는 문화공보부 지금의 문화체육부에 기술직 말단 공무원으로 취업을 하였다. 당시 공무원은 월급도 적을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복지혜택이 전무한지라 인기가 없는 한직 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행차에 카메라맨들과 함께 따라다니며 청와대를 오갔다. 극장에서 영화에 앞서 나오는 대한 뉴스를 만드는 일도 우리가 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모든 영화들이 문공부의 검열을 통과해야 상영이 되었다. 책이든 잡지든 신문이든 대중가요의 가사도 검열을 거쳐야 노래가 되어 세상에 나왔으며 공연도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루는 인기가수 남진이 무슨 일인지 들어 왔다가 나를 보고는 특유의 미소와 사투리로
" 앗따 방수병님 아니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여기서 보요이"
손을 잡아 흔드니 직원들은 궁금해 물었다. 그렇게 아주 얇은 월급봉투 말고는 내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국장님이 어느 날 부터인지 문공부 근처 호텔로 출근을 하는가 싶더니 부서원들은 퇴근도 안하고 합숙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공표하고는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시위도 날로 격화 되어갔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잘살아 보자는 구호 속에 이지구상에 가장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와 변두리에는 무허가 집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누님은 가정을 꾸리라며 결혼을 재촉하셨다. 친구 조카딸, 누구동생, 선을 보라 약속을 잡아 놓았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번번이 거절을 하였다. 그즈음의 나는 하루 열심히 일하고 술 먹고 다른 욕심이 없었다. 여자든 결혼이든 내 머리 속에 지운지 오래였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꿈이 없었기에 돈을 모을 필요도 욕심을 낼 일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술사고 밥 사고 퇴근 길 손내미는 아이들에게는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면허중을 받은 운전학원 아가씨한테 연락이 왔다. 면허증 받았으면 밥을 한번 사야 되지 않느냐? 그러마 어려운 일도 아닌데 퇴근길에 사무실로 가니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다. 근처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가끔 지나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다주고 커피도 얻어 마시며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내 마음은 화장기 없는 옆자리 직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몇 번을 가도 눈길 한번 안주기에 그냥 눈치만 보는 중 이었다. 어느날 술 인심 후한 내가 술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에 가니 옆자리 그 직원이 나와 있었다. 의아해하니 언니가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으나 연락은 못하고 아는 사람이니 대신 양해를 구하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오호! 나는 쾌재를 불렀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절호의 찬스 아닌가? 나한테 아무런 관심을 안보이니 말을 걸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엉뚱한 사람과 시간낭비를 하는 중 이었으니. 이왕 왔는데 식사나 하자며 붙들어 묻지도 않는 내 얘기를 했다. 그녀는 건성건성 대답만 할뿐 어서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가 생각해도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슨 생각으로 치부이자 자랑거리 없는 얘기를 쏟아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향하는 내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뜨면 그녀가 보이고 길을 가도 어디건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전화를 걸고는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다 끊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다. 사람답게 살아보고 함께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일보다 더 어렵다 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너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 다 내가 감당 할 테니 내 뒤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다. 절절한 내말에 동요하는게 보였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너무 아픈 사람이라 차마 외면을 못했다. 아직 연애 도 못해본 차에 연민 이었노라, 처음 만난자리에서 자기 얘기를 할 때는 별 미친놈 다 있네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며 )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누구보다도 완고하고 원칙 주의자이신 장인어른은 펄쩍 뛰셨다. 7남매 중 똘똘한 맏딸의 일탈을 인정을 못하셨다. 가진게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근본을 모르는 고아라는 사실에 말도 못 꺼내게 하셨다. 딸의 따귀를 치시면서 내게는 눈길 한번 주시지 않고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하셨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고 결코 물러설 수가 없었다. 퇴근후 날마다 집으로 찾아가 엎드려 사정도 하고 술을 잔뜩 먹고 주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극심한 반대에 결국은 집에서 쫒겨 났다. 한 달 월급타서 보증금 걸고 다음 달 월급타서 살림살이 하나사고 우리의 눈물겨운 신혼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신났고 하루하루가 즐거웠으나 그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된 생활을 못견뎌했다. 그럴 즈음 임신이 되었는데 장모님께서 찾아오셨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 먹는다며 집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장인어른은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우리를 외면 하셨다. 집안 어른들은 임신까지 했는데 그냥 두어선 안 된다며 서둘러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누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금은방에 가서 반지를 하나 사주고 색이 고운 한복도 맞춰 주었다. 나도 새 양복을 맞춰 입고 가족이 없는 내게 국장님이 가족대표가 돼주셨다. 지금은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며 부산영화제 위원장으로 활약하시고 계시다. TV에 비춰지는 백발이 성성한 국장님의 모습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말해준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오늘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나는 식장에서부터 술을 마셨다. 식이 끝나고 동료들이 권하는 술은 마다않고 마신 탓에 고속버스를 타고는 골아 떨어졌다. 온양의 여관방에도 어떻게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여관방이고 그곳에서 내주는 아침을 먹고 현충사를 들러보았다. 현충사 관리소장은 얼마 전까지 문공부에 근무하던 아는 분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점심도 사주셔서 먹고 돌아온 게 우리 신혼여행의 전부이다.
미국 가볼까
도산 안창호 애국지사의 장남인 필립 안 선생께서 한국에 오시게 되어 체류하시는 동안 안내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을 하시는데 007영화 촬영 중 사고를 당해 보행이 불편하신 분 이었다. 1년이면 몇 차례 오셔서 독립협회며 흥사단 청와대 방문 등 바쁜 일정을 보내시고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던 중 나보고 미국으로 함께 가자는 제의를 하셨다.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이셨다. 사람은 많지만 퇴근 후 혼자 인 것이 힘들어 믿고 함께 살 가족이 필요하다. 내가 함께 해준다면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책임져 준다고 하셨다.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에 사는 부자라 하셨다. 장관까지 나서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니 가라고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셨다. 집에 와 아내에게 넌지시 운을 떼니 펄쩍 뛴다. 부모 형제 가족과 삶의 근간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 필요가 없다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냐. 몰아세워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접었다. 하긴 혼자였던 월남에서도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으나 접은 내가 아니냐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소화가 안 되고 체중이 줄어 우석대학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간암 이었다. 몇 년 전부터 소화가 안되어 동네 의원에서 주는 소화제를 복용하고 계셨단다. 요즘 같은 세밀한 검진이 어려운 시절이라 많이 진행된 후에야 진단이 되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하니 이일은 어찌한단 말인가. 올망졸망 어린 처남 처제들이 눈에 어른 거렸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한의원이며 용하다는 다른 병원으로 장인어른을 업고 찾아다녔다. 내등에 업혀가면서도 자네가 왜 나를 업느냐며 나를 밀어내셨다. 몇 달을 못 넘기고 장인어른은 쉰둘이라는 젊은나이로 돌아가셨다. 군복무 중이던 큰처남은 이른 제대를 하여 20대 초반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장녀인 아내도 그 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끝까지 나를 인정 안하신 장인어른에 대한 부채의식을 털어낼 기회도 사라졌다. 보란 듯이 잘살아 처가 식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리라 다짐을 하였다. 배가 불러온 아내는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누우면 돌아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여 출근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전화가 없는 시절이니 연락도 못하고 하루 종일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에 어린 처제 처남들에게 케익과 과자를 사주고 돌아왔다. TV를 켜니 22층 대연각 호텔에 큰불이 나서 진화 중이었다. 소방차에서는 연실 물을 뿜어댔지만 8층에 겨우 닿는 턱없이 짧은 물줄기는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초고층도 아니었는데 고가 사다리나 소방 장비가 없어 열기와 유독가스에 쫒긴 사람들이 무더기로 뛰어 내렸다. 창문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힘이 부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1년에 한번 통금이 풀려 청춘들을 들뜨게 만든 크리스마스가 스크린 속의 한 장면이 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중에도 중후한 모습의 대만의 외교관 한분이 하얀 모포로 몸을 감싼 채 창가에 서서 구조를 기다리며 왔다 갔다 하는 처연한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가더니 그 외교관은 너무 늦어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나왔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은 지 1년밖에 안된 최신식 건물이었고 급속한 도시팽창으로 건물은 고층화되고 있었으나 그에 걸맞는 안전대책은 미흡한 인재였다는 지적이다. 가능한 소방차가 총 출동했고 군인과 주한 미군의 헬기까지 출동했으나 헬리포트가 없는 옥상은 무용지물로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 독려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세계최대의 호텔 화재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빠가 되다
이듬에 3월 산 날이 되어 한밤중에 시작된 진통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녘 양수가 터져 흥건해도 둘 다 무지해서 양수 인 것도 몰랐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내를 끌다시피 병원에 갔다. 후덕하게 생긴 여의사는 양수가 미리 나와 마른아기를 낳으려면 훨씬 더 어렵다고 겁을 주었다. 출근을 했다가 점심시간에 다시 병원으로 가니 의사는 첫 아이니 아직 멀었어요, 아침도 안 먹은 산모가 요기를 해야 힘을 내 아기를 낳을 수 있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밥을준다니 갈비탕 한 그릇을 시켜왔다. 진통이 점점 심해지므로 국물 몇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는 다시 사무실로 갔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예쁜 공주님입니다. 퇴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병원으로 달려가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딸이란다 내가 아빠가 되다니……. 내게도 가족이 생겼다 세상사람 들을 향하여
" 나도 가족이 있어요.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새끼가 있다구요"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 선생님!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아기 보셨어요?"
입이 귀에 걸린 내게 의사는 딸 낳고 저렇게 좋아하는 아빠는 처음 본다며 흉을 보셨다. 사흘 만에 퇴원을 하고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세상을 다 얻은 듯 들떠 있는 나를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되는 눈치셨다. 그러나 준비 없이 엄마가 된 아내는 쩔쩔매고 임신 중에 아프던 허리는 출산 후 에도 차도가 없어 아이를 키우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특히 밤잠을 못자고 온종일 혼자 감당하는 육아를 버거워 했다. 퇴근 후에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를 빨아 거들었으나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아이를 보는 것으로 행복했다.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오는 딸 바보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동네의 세탁소에 아내가 맡겨놓은 양복을 찾으러 갔다. 인천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가 나를 알아보며 헤어진 형제를 만난 듯이 반가워했다. 그도 나와 같이 혼자였는데 헤어졌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나를 부러워하면서 저녁이면 종종 집으로 와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나는 가정이 있음에도 적당한 타협을 할 줄 몰랐다. 동료들의 만류에도 책상을 둘러엎고 사표를 내고 나왔는데 집에는 말을 하지 않고 아침이면 나오니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먹고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먹고사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월남에 있는 동안 성능 좋은 카메라를 사서 사진 찍는 일에 푹 빠졌었다. 문공부에서 수준급의 사진사들과 현상과정을 두루 섭렵한 나는 여학교 앞에 현상을 하는 사진 점을 열었다. 한참 개인 카메라를 소지하는 붐이 일어 컬러사진이 보급되던 시기였다. 새로 카메라를 구입한 사람들에게 카메라 조작법이나 사진 찍을 때의 구도 잡기등 작은 팁을 가르쳐주며 세 식구 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곳에서 청록파로 유명한 시인 박목월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아침마다 사모님과 손을 잡고 산책을 하시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아내는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분을 아침마다 뵙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여행이라도 가셨는지 보이지 않으면 걱정을 하다 두 분이 다정히 손을 잡고 나타나면 반색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내 또래로 보이는 시인의 아들이 한참 사진에 재미를 붙여 사흘이 멀다고 찾아왔다. 올망졸망 애기들을 찍어 사진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셨다. 해맑은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며 행복한 웃음을 짓던 청년 박동규 선생님은 서울대 명예 교수이시다.
둘째를 낳게 되었는데 장모님은 내심 아들을 기다리는 눈치셨다. 아직 애기인 첫애를 안고 입덧을 하느라 아내는 힘들어 했고 엄마를 대신 큰애는 나에게 매달렸다. 첫애와 달리 아내는 진통이 오고 몇 시간 안 되어 수월하게 둘째를 순산했다. 식구가 느니 어깨는 무거웠으나 두 아이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고 흐뭇했다. 두 돌이 된 큰아이는 동생이 생기고 엄마의 손길에서 밀려나자 도로 애기가 되어 매달리며 투정이 늘었다. 밤에는 목을 끌어안고 잠이 들 때 까지 내 귀를 쓸어 내렸다. 둘째의 이름을 짓기 전 큰아이가 부르던 작은애의 별칭은 지금도 본 이름보다 더 익숙하게 불린다. 그러한 소소한 일상의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다.
다시 인천으로
석유파동이 일어났고 공장들은 줄줄이 도산하니 실업자는 늘고 서민들 삶은 어려워졌다. 체감이 더딘 여러 가지 경제 지표는 차치하고 당장 일상생활의 여러 면들이 불편했다. 한 번에 일정량의 기름만 판매를 하니 주유소에는 긴 줄이 세워졌다. 기름 값이 폭등하자 연탄사용이 늘어나고 여유있는 이들의 사재기로 연탄은 수요룰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줄을 서서 연탄을 사 날라야 했다. 쌓아놓을 여유도 없고 사기도 어려운 연탄을 아끼려다가 미처 마르지 않은 연탄불은 꺼지기 일쑤였다. 불 꺼진 냉골에 두 아이를 끌어안고 행여 감기라도 걸릴세라 전전긍긍하는 날이 많았다. 먹고사는 일이 급해진 세상에 사진 영업은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임대료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게를 접어야 했다. 당장 네 식구 생계가 막막했다. 더운밥 찬밥 갈릴 여유가 없어 당장에 현금을 쥘 수 있다는 택시회사를 찾아갔다.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납금 채우기 어려워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인천의 작은 공장과 탁구장을 겸한 체육관을 운영하는 곳에 취직이 되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고 문은 닫았으나 정리되지 않은 가게를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를 데려왔다. 인천의 외각에 땅이 넓고 한 켠에 방 두 칸이 있는 건물에 짐을 풀었다. 부사장이라는 분이 한울타리 안에 살았는데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라 하였다. 상품에 붙이는 라벨을 짜는 공장인데 석유파동을 계기로 일감이 줄어 땅을 활용하기 위해 체육관을 지은 것이라 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떠나고 남아있는 몇 명의 직원의 뒷바라지에 내가 투입된 것 이었다. 부사장님의 사모님은 내 또래의 자녀와 우리아이 또래 손자를 두고 계셨다. 아이들 데리고 떠나온 피난살이가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얘기하셨다. 어른인 우리도 죽을 고생을 했는데 어린애가 어떻게 살았노 하시며 된장, 고추장을 챙겨주시고 김장도 넉넉하게 담아 주셨다. 넓은 마당에 아이들이 강아지와 뛰어 놀 수 있어 우선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겨울이 가는 2월 바람보다 더 시린 가슴을 안고 내려온 인천에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8.15 광복절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 영부인 육 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충격적인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는 역사적인 날이었지만 육 여사의 피격으로 빛을 발했다. 며칠 후 청와대를 나서는 장례식을 TV로 보며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피난을 겪은 사모님은 공산당이 얼마나 나쁜지를 열변을 토하셨다. 부동산인 공장 부지를 놓고 사장과 부사장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두 분 사이에서 입장이 난처해져 불편해진 나는 이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먹고 살았을 뿐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는 우리는 다시 막막해졌다.
일자리 찾아 다시 서울
문공부 다니던 시절에 만들어진 인맥들이 연결되어 한창 잘나가는 밥솥을 만드는 한상전자에 취직이 되었다. 청계천에 있는 회사에는 기숙사로 사용하는 여러 채의 아파트가 있어 그중 한곳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아파트가 보급되기 전 연탄아궁이를 쓰는 집과 달리 욕실과 거실 입식부엌 모든 것이 새로웠다. 8층이면 고층인데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오르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5층에 구멍가게가 있어 아이들과 일상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3층과 4층에 회사가 있고 대부분 농촌에서 상경한 젊은이들로 기숙사는 필수였다. 당시 외국 여행가면 하나씩 사온다는 일본의 코끼리 밥솥과 기술제휴를 한 회사다. 똑같은 기술로 만들어 훨씬 싼값에 파니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관리 팀으로 발령을 받은 나는 밥솥을 싣고 부산으로 광주로 전국을 누볐다. 대리점주들은 현금을 들고 물건을 기다렸다. 계좌 이체가 없던 시절이니 지사마다 쌀을 담는 푸대에 현금을 받아 계수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현금을 들고 숙박시설을 이용하기도 어려워 밤을 새워 고속도로를 달려와야 했다. 피곤하여 휴게소에 잠시 들러 눈을 붙여 보아도 트럭에 실린 돈 자루가 걱정되어 편히 잘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여관에 들었으나 부피가 있는 돈 가방을 놔두고 불안하여 꼬박 밤을 새우고 나왔다. 옆자리 조수석에 젊은 청년이 동행을 해도 많은 현금을 갖고 다니는 일은 긴장의 연속 이었다. 큼지막한 돈 가방을 경리과에 넘겨주고 나면 긴장이 풀려 동료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 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통금을 넘기기 일쑤였고 동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회사 윗 층에 있는 우리 집 으로 올라왔다. 술 한 병씩 들고 당당하게 제수씨를 불러 안주를 요구하면 아내는 말없이 안주를 만들어 냈다. 술 마시다 거실에 제멋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통금이 해제되면 줄행랑을 치곤 하였다. 큰애가 옆집에 놀러가서 TV만화를 한번 보더니 만화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TV가 시작되는 시간이면 그 집으로 달려가 어두워도 올 생각을 않아 우리를 민망하게 하는 날이 많았다. 말리면 우리도 TV 사내라며 엄마를 밀쳐내며 옆집으로 향하는 아이를 두고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우리는 14인치짜리 TV를 할부로 들여놓았다. 딸아이는 같이 뛰놀던 아이들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몰고 왔다. 만화 삼매경에 빠진 내 딸과 했던 실랑이를 또래의 다른 엄마들이 이어갔다. 결혼을 하게 된 큰처남이 와서 TV를 며칠만 빌려 달라했다. 결혼을 하면서 TV를 살 계획인데 며칠만 빌리자고 해서 우는 아이를 달래며 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나도 돌려줄 생각을 안 하기에 처갓집에 가보았다. 그런데 전후 사정은 모른 채로 어린애 보다 더 재미있어 하는 장모님 앞에서 우리 것이니 가져 가겠노라 차마 말을 못하고 돌아왔다. 애 엄마도 내 눈치만 보고 말을 못 꺼내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할부금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또 살 형편은 안 되어 칭얼대는 딸아이를 달래야만 했다. 아내는 셋째아이를 갖게 되었고 내 어깨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전세금이라도 마련해야 하는 데 월급타서 먹고살고 여유돈은 좀 체로 만들어 지지를 않았다. 두 딸들과는 다르게 입덧이 순해서 평소에 즐기지 않던 고기를 먹고 싶다는 날이 많았다. 위로 두아이 때는 시원한 냉면국물과 아이스크림이 먹는 전부였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고깃집을 지나치면 돌아보며 서운해 하고 처음 먹어본다는 족발을 손가락까지 빨며 꿀맛이라 했다. 통닭이 먹고 싶다기에 한 마리를 사오니 애들과 나누어 먹고는 부족한 눈치였다. 다음날 두 마리를 사다주니 한 마리는 아이들에게 주고 돌아앉아서 닭 한 마리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렇게 잘 먹는 모습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다. 첫아들을 낳은 아내의 친구가 자신이 입었던 임부복을 들고 달려왔다.
" 먹고 싶은 음식이 분명 아들이다 얘 "
태몽도 아들 태몽이니 분명히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으나 그보다는 수월한 입덧으로 잘 먹고 덜 힘들어하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10월 국군의 날 아내는 아들을 낳았으나 나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아내는 처제를 불러 두 아이를 처가댁으로 보내고 혼자 병원에 가서 밤 11시에 아들을 낳았다. 퇴원 할 때도 아내는 혼자아이를 안고 와서는 팔이 아파 한참을 고생을 했다. 이번에도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도와 주셨는데 한 달 전 큰 처남은 첫딸을 낳았다. 아들로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니 손자를 들려다 보고 또 들여다 보시며 기뻐하셨다. 회사는 24시간 풀가동 하여 물량을 대기에 총력를 기울였다. 지방 대리점들은 물량확보를 위해 선수금도 마다하지 않아 회사는 돈방석에 앉는 듯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회사 내부에서 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고발을 했다는 소문과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나왔다. 한밤중에 관련 장부 서류들을 우리 집 천장 위에다가 감추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도 오래 살수는 없겠다 싶어 쫓겨나기 전에 이사를 가야 했다. 몇 년을 집세 안주고 공짜로 살면서 얼마간의 돈을 만들었다. 집을 알아보니 돈보다는 아이가 셋이라는 말에 복덕방도 집주인도 모두가 안색을 바꾸었다. 아이 셋을 데리고는 셋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 당시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암사동에 서울시에서 서민들을 위해 새로 짓는 10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시내와 가깝고 교통편 좋은 곳에 방 두 칸 전세금이 70만원 내외인데 모자라는 금액은 대출로 충당했다. 두 달된 아들을 안고 한겨울에 이사를 갔다. 부동산에서 열쇠를 받아 분명 우리 집 이라고 며칠 전에 도배를 했다. 이삿짐을 싣고 가니 부동산에서 하는 말이 착각을 해서 우리 집이 아닌 앞 동 남의 집에 도배를 해놓았단다. 지금 도배를 시작했다며 기다리라니 어이가 없었으나 다른수가 없지 않은가. 당시 서민아파트 도배는 입주자가 하게 되어있었다. 똑같이 같은 방향으로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벌어지는 헤프닝 이었다. 한겨울에 갓난아이를 안고 떨며 애들은 보채었다. 부동산은 연실 머리를 조아리며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후에 집으로 들어 갈수 있었다. 비록 방 두 칸의 작은집 이었지만 세 아이들과 주인눈치 안보고 마음껏 뛰어 놀 수 있어 더 바랄게 없었다. 변두리에 새로 짓다보니 버스도 안다녀 시내로 나가려면 30분은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다. 시장이 없어 아이를 업고 고만고만 두 아이들과 장을 보는 일도 만만치 않았으나 마음은 가벼웠다.
얼마안가 회사는 부도처리가 되었다. 직원들은 호황이던 회사의 부도는 이해가 안되었다. 회장이 구속되고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니 직원들은 살 길을 찾기에 바빴다. 몇 달을 월급을 못 받은 직원들은 물건이라도 챙겨야 한다며 밥솥을 트럭에 싣고 나왔다. 서로 달라고 아우성이던 분명 그 물건인데 세상인심이 망한 회사 물건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목숨 줄 같은 몇 달치 월급의 밥솥이 작은방 구석에 쳐 박혀 있다가 몇 개는 지인들에게 인심을 쓰고 덤핑 장수에게 고물 값으로 처분해 버렸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쉽지가 않았다. 어쩌다 구한 일자리도 어렵다는 핑계로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다. 더러는 그런 사회상을 악용하는 사례도 눈에 띄었다. 일은 했으나 수입이 끊기자 아내는 말도 못하고 내 눈치만 살폈다. 궁여지책으로 중정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술기운을 빌어 어려움을 털어놓자 친구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돌렸다. 다음날 돈이 없다던 사장에게 연락이 왔고 이런 저런 변명과 함께 밀린 월급을 전부 계산해 주었다.
중동으로
그러다가 한참 사세를 키우고 있는 율산 이라는 신흥 대기업에 취업을 할 수가 있었다. 석유파동으로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지역 건설에 많은 근로자들이 나가 있었다. 수입이 국내보다는 월등히 많다니 나로선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어려운 시국이다 보니 신청자가 몰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출국을 하게 되었다. 갓돌을 지난 막내를 비롯해 올망졸망 삼남매를 두고 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아내한테 미안했으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항에서 즉석으로 찍은 사진 한장 가슴에 품고 말로만 듣던 중동 땅에 내렸다. 공항청사를 나오는 순간 훅하고 밀려오는 열기가 만만치 않았다. 아열대 지방인 월남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열기였다. 같이 온 어떤이는
" 오매 오매 이게 사람 사는 데가 맞으요 "
청사로 도로 들어가서는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억지를 써 마중 나온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율산 공사현장이 아닌 율산 실업 제다 지사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곳은 중동지역과 유럽의 모든 공사 현장의 물품과 직원수급 수출입 현황을 관리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지사장과 함께 다음날부터 시작된 일상은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중동이라는 그들만의 왕국의 특수성이었다. 부를 앞세운 오만에 가까운 자국민 우선과 무슬림 법에 의한 시스템에 무조건 맞춰야 했다. 말이 안 통할 뿐더러 국제 공용어인 영어를 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하려들지를 않았다. 필요한 너희들이 아랍어를 배우라는 식이니 아쉬운 내가 아랍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류 하나 만들어 관공서에 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는데 기도할 시간이라며 문을 닫아 버린다. 일반인들도 장사를 하다 기도할 시간에는 손님들을 내보내고 나중에 다시 오라며 문을 닫는다. 하루에 다섯 번을 성지가 있는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모습은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 되지만 모든 것이 신의 뜻 이란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눈뜨면 한국말은 들을 수 없고 아랍어만 들리는 환경에 놓이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웬만한 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해야 할일은 점점 많아졌다. 주방장은 나를 앞세워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돌아가는 직원들과 신입들이 오면 공항에 가서 출 입국 절차를 밟아 인솔해오는 일이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루어졌다. 쉬는 날에도 귀국을 앞둔 이들이 가족에게 줄 선물 쇼핑에 나를 불러내어 휴일에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관광객을 인솔하고 온 가이드처럼 사람들을 쇼핑센터에 내려주고 값을 흥정하고 물건을 골라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상점 주인들은 나를 기다리고 고가의 카메라나 아내에게 주면 최고라며 목걸이 등의 선물 공세를 해왔다. 받으면 약점이 되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될 것 같아 단호히 거절했다. 덥고 먼 이곳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고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근로자들의 작은 행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좀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지만 귀국하는 이들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면 상기된 표정으로 손 흔들며 돌아가는 그들이 부럽고 그날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늦은 잠에 허둥대며 하루는 시작되고 지내다 보니 무슬림이 그 사회의 법이고 사회를 지탱해주는 궁극적 가치임을 알았다. 면허증하나 더 받는 심정으로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교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의 절대적 신 알라를 향한 기도에 참석하니 무슬림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주었다. 그 증명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 일을 하기는 한결 수월해졌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나 그렇듯이 한국 사람들이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남녀유별이 엄격한 이곳에서 여자를 쳐다봤다거나 금지하는 술을 먹었다거나 하는 우리 기준으로는 일도 아닌 일들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서야 하고 주변의 다른 회사들까지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경찰서 유치장으로 달려갔다. 무슬림 증명서를 내밀면 우리는 형제라며 친절하게 앞장서 대부분 풀려 나올 수가 있었다. 아니면 한국사람 어디 있느냐 해도 모른다 안왔다 하면 그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막대한 오일달러 덕분에 이제 새로 건립되는 모든 도시와 건축물은 사막을 지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장거리 운행은 필수였다. 가는 길도 무슬림이 가는 길과 일반인이 가는 길이 나뉘어져 있다. 무슬림이 갈 수 있는 길은 한 시간이면 족하지만 아니면 세 시간을 돌아가야 했다. 증명이 있는 나는 통행이 가능한데 동승자라 해도 무슬림이 아니면 갈수가 없어 나 혼자 가아하니 할 일은 점점 쌓여갔다. 도로 표지판에도 애니 멀 로드라 해서 무슬림이 아니면 동물취급을 하는 알면 알수록 이상한 나라였다. 제다에서 리야드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앞자리에 있던 잘차려 입은 중동의 젊은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간질이었다. 모두들 우와좌왕 하고 있기에 일단 그남자를 편안하게 뉘었다. 이물질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머리를 받혀주고 승무원에게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아주며 발작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몸을 털며 일어났다. 사우디 석유산업은 왕족들의 소유였고 일반 경제의 전반이 왕족의 소유인데 비행기에서 발작을 했던 그 남자도 왕족이었다. 그일이 인연이 되어 친분을 맺게 되었고 아랍 말을 하는 나를 형제라며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집이 아니라 궁궐이었는데 궁궐의 크기도 크기지만 내부 장식의 호화로움에 기가 죽었다. 대리석이며 기둥이 금장으로 번쩍번쩍 그림책에나 나올법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 남자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비서인 듯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도 차를 내오는 사람도 모두가 남자뿐이었다. 여자들은 외부 사람과의 접촉은 안 되며 외출시에도 남자와 동행을 해야 한다. 젊은 왕족은 알라신 앞에 우리는 한 형제라며 모든 일에 협조를 약속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리야드까지 왕족과 함게 전용기를 타고가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일반 비행기밖에 본적이 없는 나는 넓은 의자며 응접실에 침대까지 있는 전용기를 난생 처음 보았고 타보는 호사를 누렸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점점 많아져 숨돌릴 여유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먼 이국까지 희망을 품고 왔던 사람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이다. 뒷수습을 하러 병원으로 장례식장으로 쫓아다녀 시신을 화물기에 실어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황망해할 그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그런 밤이면 아이들과 아내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바쁘다는 핑계로 편지도 자주 못하는 나에게 막 한글을 깨친 큰아이가 서툰 글씨로 아빠 사랑해요 건강 하세요 쓴 편지를 받는 날이면 하루가 어찌 지나는지 모를 만큼 신이 났다. 아내는 주기적으로 아이들 얘기며 국내의 여러 소식을 보내왔다. 그 무렵 국내에는 중동의 근로자들이 보내오는 달러로 경기가 살아나서 살만하다는 소식 이었다. 반면 남편들이 피땀 흘려 보내주는 조금 여유있는 월급 덕분에 살림은 나아졌으나 마음이 공허한 아내들이 춤바람이 났다, 제비한테 돈을 털렸다는 둥의 뉴스가 실려 근로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흥 재벌그룹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이어가던 율산 그룹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나 회장은 구속되고 부도처리가 되었다. 본사에서의 모든 공급이 중단되고 사우디 현지에서도 은행거래며 물품반입이 봉쇄되어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수출 물건들도 압수되었다. 유럽과 중동지사를 겸하고 있던 지사장님은 파리로 가버리고 같이 있던 직원들도 현지사표를 제출하고는 미국이며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최말단인 나와 식사를 챙겨주던 주방장만 남았다. 주거래 은행이던 신탁은행의 차장 한분이 채권확보를 위해 급히 오고 사우디주재 대사님이 달려와 수습에 나섰다. 당시 율산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율산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율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지사정을 전혀모르고 아랍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되지 않는 결정권 하나 없는 은행직원이나 대사가 감당할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권한과 책임도 없는 내가 볼모로 잡혀있는 상황이 되었다. 운동장 몇 개 넒이의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거래되던 물건들을 사러 와서 나를 찾았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얼마큼 있는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며칠 밤을 새워가며 트레일러에 시멘트며 온갖 건축자재들을 지게차로 실어 주었다.
5층짜리 단독건물을 임차해서 사무실과 직원들 숙소를 겸하고 있었다. 계약만료일이 되자 주인은 망한 회사와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며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이사를 해야 하나 누구도 집을 주려고 하지 않아 길거리에 쫓겨날 상황으로 몰렸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현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구해서 이사를 했다. 예멘의 젊은 친구들을 몇 명 불러 짐들을 꺼내보니 꽤 큰 5층 건물에 있던 집기들을 단층집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반 이상을 버리고 쓸 수 있는 공간도 없이 창고에 짐을 부리듯 쌓아 놓았다. 잘 나가던 사무실의 집기들은 크고 호화로우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옮기던 중 허리를 삐끗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가 없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부자나라여서 그런지 병원비는 내국인 외국인 차별 없이 무료였다. 이사는 했으나 정작 집은 창고가 되어 쉴 공간도 없고 끼니를 걱정하는 웃지 못 할 처지가 되었다. 은행거래가 막히니 전화도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근처 다른 회사 건설현장에 가서 끼니를 구걸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걱정은 집에 있는 가족들 이었다. 부도 처리된 회사는 당연히 월급이 정지되었고 앞일은 알 수 없고 편지도 받을 수 없는 오도가도 못 하는 몇 달이 지나갔다. 웃음이 나오고 허망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이 또 있겠는가. 잘나가던 회사들이 내가 일 좀 할 만하면 망해버리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겠다는 나를 은행직원과 대사님이 붙들었다. 나마져 가버리면 감당할 수가 없다며 돈은 자기들이 해결해 줄 테니 수습이 끝날 때까지 있어주기를 원했다. 그럼 지급 당장 여기서 현금으로 주라 그러면 내가 같이 하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책임지겠다는 말 뿐이었다. 송금이나 환전이 자유롭지 않은데 어떻게 보낼 것이냐며 회유를 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주기만 해라 그러나 나중에 해결해 주겠다는 말뿐이었다. 책임을 질수 있는 위치에 있는것도 아니니 그들도 답답하기는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 살겠다고 가버린 이 상황에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 몇 달 동안 월급도 못 받은 우리식구들이 굶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마냥 여기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수중에는 비행기 표 살돈도 없었다. 궁리 끝에 5층 건물 층마다 달려 있던 에어컨을 떼어내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간신히 비행기 표를 구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누구세요?
계획도 없이 서둘러 오다 보니 아이들에게 줄 선물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 선물 쇼핑 길에 아이들 생각하며 한두 개 사두었던 것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식구들이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시라도 빨리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다. 늦은 시각 공항에 내려 다행히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탈수 있어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기다리라 하고 4층을 뛰어 올라가 벨을 누르니 기척이 없다. 몇 번을 누르니 누구냐 하기에 나야 하니 나가 누구냐고 되묻는다. 소식을 알지 못하고 연락도 안 된 상황에서 밤늦은 시간에 남자가 나라고 벨을 누르니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보고 놀라 문을 연 아내에게 8천원을 받아 택시비를 주었다. 어수선한 소리에 큰아이는 잠에서 깨어 놀란 표정으로 와서 안긴다. 아침이 되자 막내는 아빠야? 하면서도 낯설어 엄마 뒤에 숨고 두 딸은 재잘 되며 좋아라 한다. 지금과 같은 전자제품이 없던 시절에 내가 들고 온 소니 녹음기에 노래와 다투는 소리까지 녹음해서 들려주면 방금전 자기들 목소리를 신기해 했다. 듣고 또 듣고 아들 녀석은 정교한 자동차 모형 장난감에 마음이 팔려 느닷없이 찾아온 아빠와의 낯설음을 지워갔다. 경위야 어쨌거나 나는 모처럼의 아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 후 율산에서 미지급된 월급은 다른 회사에서 일부를 받게 되었으나 목돈을 만들고자 시작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매형을 삼킨 연탄가스
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동분서주하고 있는 와중에 누님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왔다. 5층 건물인 우리 아파트에 전화가 있는 집은 101호 한집뿐인데 우리라인 대부분이 그 집을 통해서 급한 연락을 전해 듣고 있었다. 아침에 연락을 받았으나 전할 방법이 없으니 저녁에 돌아와 현관에서 신도 못벗은채 성남의 병원으로 뛰어갔다. 한방에서 주무시던 매형인 중대장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은 혼수상태로 누워 계셨다. 대학생인 아들, 초, 중학생인 조카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공원묘지를 구하고 장례를 치르는데 요즘 같은 병원의 장례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이므로 염습할 사람이 따로 필요했다. 동네에 경험 있으신 분이 해주시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연락도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대학생인 조카의 친구 하나를 붙잡아 맨 정신으로는 용기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엉터리인 내방식대로 염습을 하여 공원묘지에 장사를 지내고 온 다음날 누님은 깨어나 매형을 찾으셨다. 다른 방에 계시다고 둘러 대니 어느 병실인지 가자 안 된다 실랑이를 벌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말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는 자식들의 표정에서 눈치를 채신 듯 입을 다무셨다. 누님이 퇴원하기 전에 가스가 스며든 방을 수리를 했다. 집에 도착하자 누님은 그제야 꺼이꺼이 우셨다. 그리 허망하게 가느냐 아직 이별은 준비가 안됐는데 혼자서 가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부모 없이 오빠 한분과 피난 와서 고단하긴 해도 자식 낳고 사람 노릇하며 산다 싶었는데 허망 하다 허망 하다.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보내시더니 하루는 앞장서래이 어디다 묻었노 산소에 가서는 말 없이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 내가 정신을 차려야제 야들과 살아 야제 "
문을 닫아놓은 식당으로 가셔서 일할 채비를 하신다. 중령으로 제대를 하신 매형은 이것저것 사업을 벌이셨다. 사람만 좋고 군 생활 말고는 세상일을 알지 못해 다른 사람 말만 듣고 시작한 일이 쉽지 안아 빚만 떠안고 있는 중 이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누님은 시청 앞에 식당을 차렸고 깔끔한 음식 맛으로 식당은 북적였다.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내가 중동에 서 목돈이라도 챙겼다고 생각했는지 지인이 만나자했다. 개인택시를 하면 먹고사는 것은 해결 된다며 택시를 사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만한 여력이 없다 하자 빌려 줄 테니 돈이 매일 들어오면 조금씩 갚으라 하였다. 고마운 마음으로 택시를 구입하여 면허등록과 이것저것 수리를 하고 개인택시를 갖게 되었다. 이틀을 운행하고 하루를 쉬는 일상이 손에 익기도 전에 지인은 돈을 돌려주기를 원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택시를 팔아 돈을 갚았다. 급하게 처분하려니 값도 제대로 못 받았고 등록비며 수리비로 들어간 바용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속내를 모르는 이들은 왜 해보지도 않고 그리 했는지 의아해 했으나 설명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급해진 나는 다시 중동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가족들과 떨어져야 했다. 한 번의 경험이 있으니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미안했고 밤이면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1년 더 연장하기를 간곡히 권하는 소장님의 말을 외면하고 돌아와 버렸다. 그 무렵 KBS에서 이산 가족찾기 생방송이 있었다. 처음 3시간의 특별 방송으로 시작했다가 전국에서 몰려드는 신청자가 줄을 이었다. 5개월여의 생방송으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록물은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다. 당시에 나는 중동에 가있어 직접보지는 못했다. 방송현장에서 눈물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전화로 혈육을 확인하는 장면들을 눈물을 훔치며 보던 아내가 신청을 했단다. 한두번 묻는 전화만 있었을 뿐 이렇다할 진전은 없다고 했다. 후로도 이북 5도청에 여러번 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총감독이 되어
안산의 자동차부품 제조공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사장님의 모친께서 꽤 큰 주택에 혼자 계시니 2층에 살기를 권하셨고 집구할 돈이 여의치 않은 우리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막내는 초등학교 중학생인 딸들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수고를 해야 했다. 서울에서 안산까지 출퇴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과 기술과 자본의 협력회사로 일본손님의 접대와 수도권에 공장 부지를 찾어야했다.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 집에 오는 날보다 밖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더 많은 돈은 필요하나 수입은 한정되어 불안한 아내는 일자리를 찾는 눈치였다. 전문직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보험회사 영업직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던 지인의 권유로 화재보험회사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경험도 없고 낯가림이 심한 내성적인 성격의 아내가 하기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 싸서 학교에 보낸 후 출근하는 아내를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런 중에도 배움에 늘 미련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공부를 시작했다. 밤이면 식탁에 앉아 강의 테잎으로 공부를 하고 일요일 아침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소풍가는 아이처럼 경쾌했다. 반장을 맡아 어린 급우들을 독려하며 포기하지 않도록 시험 준비를 독려하면서, 토해내지 못해 응어리졌던 배움의 갈증을 채워갔다. 수도권에 공장 부지를 물색하던 회사는 수도권의 개발제한으로 허가가 까다로워 조성된 공단에 공장을 신축하게 되었다. 일복 많은 나는 신축현장에 아무런 실권도 없는 감독 아닌 감독이 되었다. 퇴근하는 나를 건축업자가 부르더니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 5천이다 가만히만 있어 달라 끝나면 더 줄 수 있다."
나는 정중히 고사를 했고 더욱 꼼꼼히 현장을 더 살피게 되었다. 건축업자는 건장한 청년들을 보내 조심하라 며 협박을 하기도 했으나 그런 것이 두려운 내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업자는 자금만 미리 받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공사는 중단되고 다른 업자를 불렀으나 이미 지불된 돈에 추가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원하는 공기를 맞추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사장은 나를 불러 대책을 물었고 어찌 되었건 당신이 해보라 무조건 해야 한다. 안 되면 손해가 너무 크다. 아무런 책임 안 지울 테니 완공만 시켜보자 내가 본 당신은 분명히 할 수 있다. 하도 완강하고 도면대로라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 해 보마 하였다. 그날부터 집에도 못가고 공장 한구석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며 밤늦게까지 강행군이 계속 되었다. 현금을 한 자루씩 받아 모든 자재와 인부들의 임금을 현장에서 즉시 지급했다.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아 공사는 속도를 내었고 자재비도 예상보다는 적게 들일수가 있었다. 1년이 넘는 동안에 집에는 손에 꼽을 만큼 가보니 아이들이 입학을 했는지 졸업을 했는지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아내에게 미안했으나 먹고 살자면 할 수 없다고 자위를 했다. 공사가 끝나고 새로 지은 공장에서 새로운 물건을 생산하게 되자 사장은 나를 불렀다. 건축업자의 유혹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눈치였다.
"방기사님 고생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구요 며칠 푹쉬고 나오세요 "
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2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로 부동산을 찾아간 우리는 산 자락마을 낡은 연립주택을 대출금을 안고 구입해서 이사를 하였다. 위태롭게 겨우 이어지는 살림살이 였지만 세 아이들은 아무런 말썽 없이 공부도 곧 잘하며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했으니 사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나는 사장을 뺀 다른 고위 간부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회사를 나와 버렸다. 물론 아내는 알지 못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따져 묻지는 않았으나 나를 못미더워 하는 눈치였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난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줄 알면서도 행동이 앞섰다. 옳거나 그르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아내는 보험대리점이라도 해보라기에 몇 달을 공부해서 자격을 얻어 일을했지만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애들 학비며 당장의 생활이 안되었고 대출금이 있는 집에는 독촉장이 쌓여 갔다. 그래도 견뎌보자는 아내의 말을 뒤로 어렵게 마련한 집을 팔아버렸다. 너무 빠른 나의 결정에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못했다. 큰딸이 고3이었는데 야간자율 학습을 마치고 밤늦게 오는 1년동안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아이의 귀가를 도왔다. 한참 여자들의 납치가 사회문제로 떠들썩하고 새벽에 도시락 두 개를 들고 가서 밤 10시가 넘어야 오는 아이를 위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그 것 뿐이기도 했다. 정 술 생각이 나면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동네에서 한잔하면서. 큰애는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준비가 안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아내는 동분서주 하는데 나는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내의 학구열은 계속되어 방송대에 진학을 했다. 자다가 깨어보면 식탁에 앉아 끙끙대며 시험공부를 하고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안쓰러우면서도 한편 못 마땅한 적도 있었지만 밤길을 아내 혼자 오게 할 수는 없었다.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돌아오는 시간이 나쁘지 만은 안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쇼핑도 놀이도 마다하고 힘들게 공부를 하는 것은 아마도 공부가 힘든 아내의 삶의 피난처가 아니었나 싶다. 입학은 쉬우나 졸업이 어렵다고 하던데 아내는 유급 없이 졸업을 했고 엄청난 보물이라도 찾아낸 듯 행복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지만 내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준 행복에너지로 나는 달라졌다. 살아온 인생의 덧칠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고 싶다. 가슴 한구석 응어리진 것이 다 날아 갔노라 며 아내는 뿌듯해했다. 졸업 후 5년 동안 함께 공부한 동아리 회원들이 외조에 감사한다며 식사자리에 남편들을 초대했다.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외조를 했는지 자랑하는데 해준 게 없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협조는 없었으나 방해하지 않았으니 오늘 이 자리 참석 자격은 있노라 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진 나는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지라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나 혼자 도망온 것 같은 모양새로 생활의 모든 문제는 오롯이 아내혼자 감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학생, 중학교 고등학교 눈만 뜨면 돈이 필요한 그시기를 어떻게 넘어왔는지 지금도 알수가 없다.
졸업을 한 아내는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속셈학원에서 논술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원이 딸린 작은 유치원의 공동운영을 맡게 되었다. 맞벌이 엄마들의 육아문제로 종일반 이 대세였고 오전만 운영하는 유치원은 점차 아동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국문과 출신인 아내는 어린이집 운영에 필요한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중앙대학교 교육원에 입학을 했다. 공부가 필요하면 주저 없이 시작하는 아내의 학구열이 발동된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고 저녁이면 10시까지 수업을 듣는 힘든 여정이 시작되었다. 귀가 길을 돕고자 저녁이면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내를 태워왔다. 오전 수업으로 끝나는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식사도 잠자리도 가능한 내부시설에 필수 규격을 맞추어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약속과 달리 어려움을 겪게 된 와중에 IMF를 맞게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 운영을 맡게 된 아내는 낡은 건물에다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임대료 조정을 요구했다. 주인은 들어 주기는 커녕 오히려 나가라고 하니 어린이집을 옮겨야 했다. 30년이 넘도록 같은 사람에게 임대료를 챙기면서 떨어진 문짝한번 고쳐준적이 없었다. 건물 주인은 낡아진 건물을 도리어 원상복구를 해놓아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임대료가 조금은 저렴한 곳으로 시설을 갖춰 이전을 했다. 가진 돈이 없었으니 빚을 내었고 이자를 감당 하자니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자와 임대료에 직원들 월급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빚은 늘어만 갔다. 후배에게 넘기기로 했는데 건물주는 시설에 대한 권리금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생떼를 썼다. 예상 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결정이 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 권리금보다 적은 보증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빚으로 남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되었다. 온전한 정리가 안 되어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 몰렸다. 일자리를 찾았지만 어린이집 교사로 청하는 곳은 있어도 그 수입으로는 감당이 안되었다. 아내 친구중에 부동산 중개사자격을 취득하여 사무실을 연이가 아내를 불렀다. 마침 건축경기가 좋을 때라 단독주택을 헐고 빌라를 지어 분양하는 건축업이 호황중 이었다. 상담을 맡아줄 직원이 필요하다니 아내를 추천했고 분양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어 나가게 되었다. 인상이 좋은 평판을 받는 아내는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며 금방 적응해 나갔다. 한 동 여덟 가구를 한 달여만에 완판을 하니 건축업사장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새로 짓는 현장을 오가며 수입도 차츰 나아졌으나 빚을 갚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원점으로
그 무렵 500여 가구 아파트 신축현장에 전기공사를 맡아서 하게 되었다. 절반쯤 공사가 진행될 무렵 원청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덩달아 부도를 맞았다. 그동안 들어간 자재비와 인건비는 물론이고 억대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부도소식이 전해지자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인부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난리를 치는 바람에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인건비와 자재비등을 계산하고 나니 백여만 원이 남았다. 이사는 해야해 원청 사장에게 2천만 우선 변통이라도 해주기를 청하자 그러마 약속을 했다. 남은 돈으로 방 두칸을 계약해 놓았으나 이삿날이 되어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돈 전부인 계약금도 날아가 버렸다. 말을 잃은 아내는 눈길한번 안주고 나가 버렸다. 집은 비워 줘야하고 갈 곳 없는 이삿짐을 챙겨 보관소에다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살림살이를 깨버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한시라도 게으름을 피워본 적도 없고 힘든 일을 마다한 적도 없었다. 공짜를 바란 적도 없이 죽어라 열심히 살았는데 이건 뭐지?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아내가 걱정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어디에 있는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자꾸 전화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강공원에 있다기에 앞뒤가릴 것 없이 달려가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도카니 앉아 있는 아내가 보였다. 우선은 반갑고 가슴이 아팠다. 한 달 만에 만난 아내는 차분한 어조로 당신과도 이세상도 그만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 풍족히 해준 것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우리 다시 해봅시다, 이보다 더 나빠지겠느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아내는 그 달 월급을 보증금으로 안 된다는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지하방 두개를 얻었다. 주머니를 털어 보관소에 있는 짐을 찾아 왔다. 이사는 했으나 생활비가 없었다. 아내는 걸어서 출퇴근을 했고 점심 값으로 주는 몇 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 우리는 할말이 없어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함께 살지 않아서였다. 우리야 이렇게 견디면 되는데 지금 아이들이 함께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날아드는 독촉장과 하루에도 몇번씩 걸려오는 전화에 숨이 막힐 지경이나 아내는 오히려 담담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올라갈일 밖에 없지 않느냐며 어느 때 보다 씩씩했다. 아내는 젊은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못 이겨 교회에 잠깐 다녔다. 그곳을 떠나 이사를 한 뒤로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누가 뒤 꼭지를 잡아 당기는 느낌이라 했다. 교회를 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교회를 갈까 물색중이라 했다. 큰딸 내외가 성경책을 두권을 사들고 찾아왔다. 사위는 정색을 하며 무릎을 꿇고
" 아버님 이제 어머님과 같이 교회에 가셔야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소리다. 큰딸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교회에서 만나 같이 성장한 청년과 결혼을 했다. 돌아온 주일날 아침 아들 내외가 집으로 왔다.
" 아버님 같이 가세요. 네? 아버님 "
팔을 잡아끄는 며느리를 거절을 못해 어정쩡 끌려갔다. 누구보다도 교회를 비판하고 안티인 내가 교회를 가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아내는 신축한 빌라를 분양하고 나 역시 마른일 궂은일 안 가리고 일을 해 빚을 정리해갔다. 그런 와중에 자꾸만 체중이 줄어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았다. 갑상선 항진증 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장 몸져눕는 것은 아니고 약물로 다스릴 수 있다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강원도에 작은 펜션 몇동 짓는 공사를 하게 되어 아내 혼자 두고 강원도에 가게 되었다. 두어달 동안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 밤이되면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가.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지금 나는 빈손이다. 마른 하늘에 번개 맞듯 나를 만난 아내는 또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뛰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며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은 아내를 생각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은? 묻고 나니 할 말이 없다. 나도 힘들지만 지금 누구보다 힘들 아내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은데 정작 할 말이 궁했다. 간단히 때우고 넘겼으리라 짐작하지만 목소리라도 들어야 잠이 올 것 같아 문단속 잘하라며 끊었다. 강원도에서 일을 하는중에 올해 내가 환갑 이란다. 환갑이 되도록 빈 하늘에 주먹질만 해댄 공허함으로 쓸쓸했지만 아이들게 떠밀려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어느 날 밤 아내는 한참을 끙끙대며 허우적 대다가 깨어났다.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어찌나 힘이 센지 아무리 당겨도 요지부동이다. 당신과 함께 당기니 딸려나와 엉덩방아를 찧으며 깨었는데 분명히 태몽이다. 아들네 아니면 둘째가 아이를 가졌나 기다리던 중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아내는 꿈 얘기를 하며 아들일 것이다. 반가워 하면서도 둘째 생각에 드러내 놓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눈치다.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보물 손주가 태어났고 내손으로 만든 방 씨 호적이 3대를 이었다. 두 달여의 강원도 공사를 마치고 우리는 돈을 조금 만들어 지하방을 벗어나 햇살드는 3층으로 이사를 했다. 큰 사업도 아니고 단시간에 큰 수입이 있는 일도 아닌데 빚을 갚자니 지쳐 포기해 버리고 싶은 날이 많았다. 빚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위안으로 견디는데 사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이다. 이사 올 때에 주인은 사업실패로 세금이 밀려 경매가 진행 중이다. 본인이 경매에 참여하면 우선순위로 집을 지킬 것이니 걱정말라는 말을 믿고 이사를 왔다. 어이가 없었다. 참 산 넘어 산이라더니 갈수록 태산이며 정말 힘이 빠졌다. 그런데 아내는 화를 내기 보다는 주인집 아주머니도 참 딱하게 되었다며 되려 걱정을 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맞은 동병상련은 이해가 되지만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건강하잖아요 아주머니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져 휠체어를 타는데 거리로 나앉으니 우리보다 훨씬 딱하지 않느냐며 혀를 찬다. 겨우 만든 보증금도 날아가고 막막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묘수가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내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자식들에게 얼마나 하기힘든 말인지 가슴이 저려왔다. 느닷없는 엄마의 부탁을 아이들은 말없이 들어 주어 작은 빌라를 얻어 이사를 했다. 아내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견디며 그 돈부터 갚아갔다. 6월에는 초순에 내 생일이, 말일 경에 며느리 생일이 들어 있다.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결혼하고 10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던 둘째가 아이를 가졌다한다. 온 식구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축하를 해주었다. 큰애도 아내도 눈물이 나온다며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나 역시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었나 하나님 감사 합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아내는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각별히 몸조심해라 조바심을 내었다. 다음해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새벽에 병원에 간 둘째는 종일 진통 끝에 늦은 밤이 되어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 했다. 우리 식구 모두에게 더 이상 바랄게 없는 행복한 명절 선물이었다. 만나도 할 말이 궁하던 사돈댁은 환한 표정으로 편하게 뵐 수가 있게 되었다. 손자 녀석은 건강하게 잘 자라 세상에 다시없는 행복한 돌잔치를 했다. 우리는 쉽게 풀리지 않는 경제적인 어려움 말고는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낡은 집이라 두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천정에서 벽을 타고 내려온 물이 방안에 흥건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수리를 하더라도 집을 비워야 해서 또 이사를 해야 했다. 돈을 조금 더보태 주택의 1층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낡기는 했어도 마당에 감나무도 있고 화분도 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에 햇볕이 화사하게 들어와 마음까지 환해졌다. 아내와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경찰서에 일관계로 주차해둔 다른 사람의 차를 빼주다가 급발진 형태의 의문의 사고가 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고를 내 본적 없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형편에는 적지않은 돈을 배상해 주어야 했다. 당장 방법이 없어 아내에게 연락을 하니 아내는 다치지 않았느냐 괜찮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걱정 말아라. 감당할 수 없는 큰 금액이 아니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며 나를 위로 하는 것 아닌가. 일주일 후 아내가 건네준 돈으로 정비공장에서 차를 찾아다 주고 아내를 생맥주집으로 불렀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오지랖 넓게 왜 남의 차는 빼주다 일을 만드냐 는 비난을 예상 했었다. 오늘은 맥주 한잔을 해야 되겠다하니 살다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란다. 당신도 안 다치고 무엇보다 사람이 안다쳐서 정말 다행이라면서. 돈도 우리가 감당할 만 하고 벌면 되는 것이라 감사하단다. 풀리지 않고 자꾸만 얽히는 것에 화가 치미는 나와 다르게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니 고맙고 미안하다. 그런 아내가 있어 오늘 나는 행복하다. 생맥주 한잔이 이렇게 맛있어 본적이 있었나 싶게 달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랫만에 꿀잠을 잤다.
인생휴가
빚을 줄여가며 하루를 감사하며 살아있는 것이 축복임을 고백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환갑을 맞게 되었고 캐나다에 있는 처제의 주선으로 캐나다를 경유한 미국여행을 가게 되었다. 부채가 남아있는 우리 형편에 과한 지출이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올까 싶어 용기를 내었다. 저녁 4시에 출발해 11시간을 비행해서 벤쿠버에 내렸다. 9월의 날씨는 여행하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동서는 우리를 조경이 잘된 공원으로 데려갔다. 먼지 하나 없는 공원과 맑은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본 조카며느리 처음 만나는 애기들과 인사를 나누고 미국여행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버스에 몸을 싣고 미국을 향해 출발 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교포와 어학연수를 왔다가 귀국을 앞둔 학생들과 함께였다. 한 시간 쯤 달려 미국 국경을 넘게 되었다. 총을 찬 국경 수비대가 보였고 손가락 열 개의 지문을 찍고 마치 범죄자 취급당하는 기분이다. 반나절만 달리면 땅끝마을인 우리와 다르게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의 스케일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농장의 규모에 주눅이 들었다. 농가 한 채가 있고 온갖 농기구에 경비행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과수원등이 아롱다롱 소박한 우리네 농가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고속도로는 붐비지 않으며 속도표지판 외에 단속경찰이나 감시카메라가 없어도 규정 속도를 지킨다. 횡단보도에 사람하나 없어도 꼬박꼬박 신호를 지키는 운전자가 오히려 답답해 보였다. 라스베거스를 향해 꼬박 이틀을 달려 꿈의 도시에 왔다. 화면에서 보던 야경이며 분수 쇼 카지노, 약물에 풀린 눈을 꿈뻑이며 길가에 널 부려져 있는 군상들이 환락의 도시임을 보여주었다. LA에 왔으니 LA갈비를 먹어야 한다며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랜드 캐년을 돌아보며 자연속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꼈다.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영화촬영의 묘미와 영화에 나온 배우로 분장한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꿈의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에서는 시속 300km의 자동차를 타보았는데 어찌나 빠른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공중에 달린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 가상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도 디즈니랜드의 명성을 증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할리우드에 아카데미 시상식장과 유명배우들의 손도장이 찍힌 거리를 걸으며 가이드는 우리나라 배우 이병헌의 손도장도 여기에 장식될 것이라 했다. 햄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가 크기에 놀라 다음에는 한 개를 둘이 나누어 먹어도 남았다. 함께 나오는 콜라는 몇날을 두고 마셔야 될 것 같은 분량이다. 박찬호 선수가 꿈을 펼치던 야구장도 지나가는 길에 보였다. 며칠 동안 밥구경을 못한 저녁 자유시간에 식당을 찾아 나섰다. 한식과 가장 흡사한 것을 찾다가 일본식당이 보여 들어가니 주인이 한국사람 이었다. 가장 한국음식과 비슷한 것으로 주문하고 김치가 있기에 주문을 했다. 2불인데 서비스라며 한 접시를 주어 밥보다 김치를 더 많이 먹었다. 일주일 만에 먹어보는 김치는 그야말로 꿀맛 이었다. 꼭 먹어보아야 한다는 수제 햄버거를 크기에 질린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하나만 시켰다. 맥도날드와는 다른 신선함으로 맛있는데 작아서 더 주문을 하자니 시간이 안 되어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타이어가 펑크가나 길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십여 분이면 달려오는 우리나라 보험사와는 달리 넒은 땅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살다보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가이드는 6000km를 달리는 버스투어가 평생 탈 수 있는 버스를 열흘에 다 타보는 것이라 했다.
벤쿠버 동서네 집으로 돌아오자 동서는 우리를 이 곳 저곳으로 안내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횟집이며 지역의 맛 집과 관광지며 공원으로 우리에게 눈 호강을 시키려 애를 썼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관광길에 나서 빅토리아로 페리를 타고 갔다.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의 이름을 붙인 사계절 휴양도시였다. 사계절 꽃으로 가득한 브차드 가든을 돌아보는데 중국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성조가 있는 말이 시끄럽기도 하지만 부딪히고 발을 밟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버린다. 가이드는 점심을 예약한 식당에 중국인들이 몰려오자 양해를 구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 했다. 벤쿠버로 돌아와 동서를 기다리는데 빨간 자동차에서 내린 고운 할머니께서 도움이 필요한지 물으셨다. 괜찮다고 하니 마트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온 할머니는 다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걱정 어린 눈빛을 보이신다. 약속이 되어있으니 걱정 마시라 고맙다 하니 선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오른다. 낯선 동양인이 케리어들고 한참 서있는 모습이 불안하셨던가 보다. 친절한 미소에 가슴이 훈훈했다. 다음은 록키였다. 다시 산을 넘고 넘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브레드피트가 나오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눈부신 물살과 신부의 면사포를 닮은 폭포, G7정상 회담을 치렀다는 호텔과 에메랄드빛 호수는 손을 넣으면 파란 물이 들것 같았다. 해마다 산맥의 얼음이 녹아내려 수년 안에 록키 산맥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어두운 이야기를 들었다. 산자락 중간에 산양들이 내려와 잘 보존된 숲과 맑은 하늘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들 이었다. 난생 처음 일상을 내려놓고 긴 시간을 먹고 놀아보는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돌고 돌아 찾은
LH에서 짓는 아파트에 신청을 해도 번번이 떨어지다가 목감 신도시에 당첨이 되었다. 참전용사에게 주는 우선순위 혜택을 받아 서울에서 멀지 않아 선택을 하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잡히는 모든 일을 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혼자서 많을 일을 감당했지만 손을 빌리는 인부들에게는 어느 곳보다 후한 일당을 주니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주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젊은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대전으로, 울산으로 전국을 돌면서 일을 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깁스를 한채로 일을 마치고 집에오니 아내는 어이없다며 화를 냈지만 깁스를 풀자 다리는 별문제가 없었다. 제주도를 오가며 일을 하니 아내는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3년 전 암진단을 받은 큰처남이 점점 나빠져 아내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밤이면 목 놓아 울었다. 장인어른 일찍 여의고 맏이인 처남과 아내가 장모님과 어린 동생들과의 애증어린 세월을 함께 보아온 나는 할말이 없었다. 천안에서 일을 하는 중에 처남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 왔다. 처남과 매부이기 전에 같은 세대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같이 한 동년배로 가슴이 먹먹했다. 참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는데 요령 부릴 줄도 모르고 욕심 없이 착하게 꾸역꾸역 일만 하다가 허망하게 가버렸다. 아내는 울지도 못했다. 울면 머리가 깨지듯 아프다며 장례식 내내 진통제를 먹으며 견뎠다. 처남이 떠나고 아내는 많이 힘들어했다. 맛난 음식을 먹을땐 오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길에 좋은 풍광이라도 보면 오빠도 같이라면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특히 미국여행을 함께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함께가자 했을 때 다음에, 그러나 그 다음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 빚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집주인은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는 몇 년 동안 집세를 올리지 않았다. 우리 앞에 살던 이들도 집세를 올리지 않아 마음 편하게 집을 마련할 때 까지 몇 년씩 살다가 이사를 한 것이었다. 보증금도 떼이고 낡은 집 수리비까지 물어주었던 기억이 있는 우리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부모가 자식 혼수챙겨 주듯 아이들이 새집에 살림을 채워 주었다.
보금자리 카페
입주가 시작되고 연말은 지내고 가려 하니 아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집으로 가기를 권했다. 새해를 사흘 앞둔 영하의 추위 속에 50여년을 살던 서울을 떠나 이사를 했다. 새집에 가구도 모두 새로 들여 이삿짐은 단촐했다. 아이들도 달려와 평생을 떠돌던 우리의 입주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이사에 앞서 난방도 안 된 집에 새로 들이는 가구를 받고 설치하느라 떨었던 아내가 감기인지 독감인지 고열과 두통에 몸져누웠다. 새해 연휴로 병원문을 열지 않아검색해 겨우 찾아간 병원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긴줄이 늘어서 있다. 몇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보고 약을 짓느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보통의 감기는 병원한번 갔다오면 그약을 다먹기 전에 거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사온지 한달이 넘도록 새 주방에서 라면 한번을 끓여 보지 못했다. 한 달여 만에 아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나 싶을 무렵 내가 이상이 왔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어 독감검사도 해보았다. 독감은 아니라는데 몸은 점점 가라 앉더니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운전을 못해 정신이 혼미한 채로 가까운 응급실을 찾아가니 폐렴이라며 곧바로 입원을 했다. 열흘이 넘게 입원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건강은 자신 있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기침을 많이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기침에 먹는 약을 주고 별다른 소리가 없어 넘기고 있는데 아내는 다른 병원을 가보라며 성화였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 의사는 당장 입원해서 시술인지 수술인지를 해야 한다며 겁을 주었다. 사진을 보여주며 흡연여부를 물어 지금은 끊은 지 10여년 되지만 몇십년을 피웠노라. 입원을 하고 수술날을 잡았다. 복강경으로 시작을 하지만 개복의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며 수술이 시작되었다. 다행이 개복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폐에 혹이 있고 한쪽은 굳어 혹과 굳어진 폐를 절제하였다. 암이 아닌지 조직검사를 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혹여 암이라는 진단이 나올까 아내와 나는 가슴을 졸이며 일주일을 보냈다. 의사는 나쁜놈은 아니네요 하지만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만만치 않은 진단이 내려졌다. 이미 폐가 많이 망가졌고 치료약도 없는 불치병이란다. 남아있는 폐기능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숨이 차기는 하나 의사의 진단과 상관없이 다시 일상은 시작되었고 얼마 후 평소에 좋아하는 바다낚시를 따라 나섰다. 수술한지 엊그제인데 안된다는 아내에게 걱정 말라며 호기를 부렸다. 갈치낚시는 여수에 가서 배로 몇시간을 바다로 나가 밤을 새우는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다. 낚시를 바다에 던져보기도 전에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그렇다고 나혼자 돌아올 수도 없는 일이라 배밑창에 들어가 견디었다. 아침에 육지에 올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아내는 내 이럴줄 알았다며 병원으로 나를 끌고 갔다. 일요일이니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입원실이 나올때까지 이틀을 응급실에 있다가 병실로 올라갔다. 다시 폐렴이 온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염증이 잡힌다며 의사는 정말 다행이라 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노인들은 염증이 안 잡혀 폐렴으로 죽습니다. 하며 급성폐렴은 폐가 많이 상하니 조심을 하란다. 보름동안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면 의사는 매번 같은 말을 한다. 엑스레이에 보여지는 수치와 기능검사가 다르단다. 사진에 보이는 대로라면 호흡기를 달아야 되는 데 폐기능 검사는 젊은이 못지 않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믿음이 좋은 아내는 의사가 모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며 감사하단다. 힘들게 살아오면서 악한곳에 눈돌리지 않고 살아온 당신에게 상주시는 거라며 오늘도 나를 응원한다. 이룬 것 없는 빈손이라 투덜대는 나에게 세상에 홀로 떨어져 죽겠노라 달려간 전장에서 살아왔으며, 그흔한 과외없이 반듯하게 자라 제몫을 하는 삼남매 있지요. 금쪽같은 손자녀와 마누라 있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며 핀잔이다.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니 감사하라고.
얼마 전 아내와 베트남을 다녀왔다. 무심결에 어찌 변했을지 가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서둘러 주었다. 50년 전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지만 어디든 사람사는 것은 다를게 없었다. 그곳의 일상도 치열하게 분주하고 아이들은 해맑고 먹거리는 풍성했다. 사람 숫자와 맞먹는 오토바이의 물결이 혼란스러웠으나 그들의 삶의 원동력으로 생동감이 넘쳤다. 얼핏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그들만의 원칙이 있어 보기와는 달리 사고는 매우 드물다 한다.
회보라빛 노을이 진다. 해를 배웅하는 이별의 손짓으로 낮과 밤은 소리 없이 자리를 바꾼다. 해가 저물면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사람들도 번잡한 일상을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눈부시게 초록이 짙어가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거실에 앉아 아내와 커피를 마신다. 줄지어선 가로등에 하나 둘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우리집이 카페야 그치? 마주보며 웃는다. 돌아보면 질펀한 그 시간들을 정말 내발로 걸어온 것이 맞는가 싶다. 70여년의 세월속에 시렸던 물줄기가 내안에 핏줄이 되어 소곤대고 있다. 움켜쥔 물처럼 남은 게 없이 허전하나 그핏줄이 모여 언젠가는 더넓은 강물이 만들어지기를 꿈꾼다. 내손으로 만든 호적에 3대의 숨결이 이어지고 풍요속 결핍이 그어느 때보다 혹독한 지금 평범한 일상이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내눈에 영원한 영화배우 아내의 미소 속에 나는 가슴 깊이 숨겨둔 아리랑을 불러본다. 내안의 아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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