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순서
〈1〉 새마을운동 50년, 태동과 발자취를 찾아서
〈2〉 지구촌 밝히는 새마을운동, 국가 브랜드로
〈3〉 새마을운동, 미래 100년 향해 도약한다
〈4〉 청도 새마을운동은 '주민주도운동'
〈5〉 청도 신도마을정신, 세계로 전파하다
〈6〉 포항, 새마을로 시작해 포스코까지
〈7〉 포항 새마을운동이 걸어온 길
〈8〉 '새마을운동 중흥지' 구미의 의미
〈9〉 구미, 제2의 새마을운동 정신 펼친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마을의 만남은 한국 현대사에서 빠지지 않는 역사적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농촌지역 개발을 고민하던 박 대통령은 이 마을에서 새마을운동 구상의 실마리를 풀게 된다.
박 대통령과 '잘 준비된 마을' 신도마을의 조우는 농촌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는 서막으로 작용했다. 박 대통령은 이 마을이 잘 살게 된 원인에 대한 보고를 받고, 바로 새마을 가꾸기의 본보기라고 본 것이다.
작고 소박했던 전형적인 농촌 신도마을은 주민들이 1950년대 후반부터 관의 도움 없이 자조, 자립, 협동정신과 맨주먹 투혼을 발휘해 인근에서 최고 부자마을로 변모됐다. 두 마을을 잇는 농로사업으로 마을가꾸기 사업에 불을 댕기고, 주민들이 등짐을 지며 간이 기차역까지 만드는 바람에 박 대통령을 만나는 명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박 대통령, 신도마을에 각별한 관심
1969년은 봄 가뭄에 이어 여름 수해가 이어졌다. 전국 농촌 상황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구조 전환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 비해 농촌의 급격한 몰락을 잡을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8월 4일 박 대통령은 경남지역 호우 피해를 시찰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열차에 올랐다. 신거역에 다다를 무렵 여느 마을과 달리 잘 정돈된 농로와 기와지붕이 눈에 비쳤다. 기차에서 잠시 내린 박 대통령은 주민들이 제방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고, 유달리 이 마을이 잘 정돈된 이유와 배경을 보고 하라고 지시했다.
경북도지사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이듬해 1970년 4월 22일 한해 대책 지방장관(시, 도지사) 회의에서 "지붕개량이 잘 되고 마을 주변과 안길 등을 잘 가꾼 청도군 신도리를 본보기로 모든 마을과 국토를 가꾸고 보존하자"며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창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에도 '경북 청도역 남쪽 모범부락'이라며 신도마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이에 대통령 비서실은 신도리 중심의 '경북 청도군 경부연선 단위지역 개발계획'을 세우고, 신도마을을 포함시킨 '이 나라 이 강산 우리의 새마을' 책자를 발간하는 등 다수의 자료가 남아있다.
박 대통령의 관심과 정부의 시멘트 공급 시책 등 새마을운동이 점화되면서 본보기 마을을 견학해야 한다는 바람이 불어 신도마을은 전국에서 방문객이 몰려들었다.

◆스스로 부자마을 일군 마을 주민들
1970년대 중반 마을이 합쳐지기까지 경부선 철로변 신도(新道)마을은 도곡마을(道谷·윗마을)과 신기마을(新基·아랫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마을을 합칠 때 한자씩을 따 신도마을이 됐다.
평온했던 신도리의 마을 잘살기 운동은 1957년 농로개설 사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도시에서 귀향한 마을지도자와 이장들이 선봉에 섰다. 이들은 도곡과 신기를 잇는 폭 4m, 길이 2.5㎞ 길을 뚫어 트럭과 우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내자고 했다.
일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관의 도움 없이, 변변한 장비도 없이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당시 농로는 사람을 만나면 비켜서야 할 정도로 변변찮은 소로였다. 농사짓기가 수월해지고 마을 배경인 화악산 일대 나무를 땔감으로 내다팔면 마을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묘안이었다.
그해 가을 공사기간 43일 만에 돌무더기를 캐내고 길을 내니 마을이 달라보였다. 농로 개통에 성공하면서 이때부터 다채로운 마을공동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신도리 새마을운동은 모두 8차 사업으로 추진됐다. 1957년 1차 농로개설사업(도곡~신기), 1959년 2차 가정가꾸기(부엌개량, 축담 개축, 화장실 개량), 1961년 3차 부업장려 알선(감, 복숭아, 사과 묘목 100주 이상), 1963년 4차 생활개선 구락부 발족(공동구판장 운영), 1964년 5차 부락면모 바꾸기(자체 자금으로 소하천 축대 개축), 1965년 6차 통장갖기 운동(마을금고 운영), 1966~1967년 7차 신거 간이역 설립, 1968년 8차 안길확장, 전화, 전기가설 등으로 진행됐다.

◆없던 기차역도 만든 뚝심 발휘
농로를 넓히고, 구판장을 운영하는 등 소문이 나자 인근에선 신도마을에 '개미마을'이라는 별칭을 안겨줬다. 또한 노름과, 게으름, 음주가 없는 '3무(無)마을'로 부러움을 샀다.
이런 신도마을의 또 하나 역점사업은 7차 사업 간이 신거역 설립이다. 새마을운동 사료수집가 손복수 씨는 "1966년 1월 간이역 설립위원회를 결성하고 그해 내내 철도청, 보선소 등을 출입하며 서러움을 당하다 12월에 철도청장으로부터 서류 한 장으로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간이역 설립에 들어가는 자재는 철도청 반, 주민부담 반으로 결정났다.
이때부터 1967년 6월 11일까지 플랫폼 성토공사를 비롯,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로 일한 끝에 역사를 완공했다고 한다. 인근 거연리와 합쳐 신거역으로 이름 짓고, 마을이장이 역장을 맡아 운영했다.
신도마을은 이후에도 1975년 10차 사업으로 도곡마을 20여호를 신기마을로 합치고, 1976년 마을 전체를 양옥으로 개조하는 등 새마을운동을 이어갔다. 신도마을은 정보화마을에 이어 지난해 IT 기반 마을로 지정되면서 여전히 한 발 앞서가는 마을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청도군 새마을과 이강모 과장은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도마을 견학행렬이 수천 명을 헤아렸고, '자조의 마을'이라는 영상을 담아 전국 극장에서 문화프로그램으로 상영했다고 한다"며 "마을 전체를 양옥으로 개축하는 등 당시로는 도시 못지않은 도시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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