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과학둘레] 존중의 법칙

백옥경 구미과학관 관장
백옥경 구미과학관 관장

친구들 중에 그런 친구가 있다. 차림새에서 돌봄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알고 보면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는 놀림감이 되기 좋은 친구. 그럼에도 친구들로부터의 은근한 따돌림을 특유의 성격 좋음으로 넘길 줄 아는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친구. 그런 친구도 버틸 수 있는 한계란 있다. 그것은 잠재해 있던 집단의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에게로 향하는 때일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감정의 펀치 백 역할을 하던 한 소년은 어느 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로부터 친구들이 그룹에서 그를 제외하기로 했다는 잔인한 통보를 받게 된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방울을 매단 채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말없이 그들을 떠난다.

수십 년 전 읽은 책을 넘기다 접혀 있는 페이지를 발견하고 다시 읽어 본 글의 내용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보거나 들어봤을 법한 흔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또다시 가슴속에서 공명하는 이유는 살아가며 만나는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글쓴이의 감성이 전해져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라도 어디서건 또 다른 모습의 그 아이였을 수 있고, 그에게 상처를 준 친구들 중 한 명이거나, 때론 그 장면을 방관하고 있던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거나 상대를 존중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 오래된 책 속의 글은 다시금 양심의 호수를 툭 건드려 작은 파문 하나를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존중이란 단어는 존경이란 말과 비슷한 어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존경은 상대의 인격, 사상, 행위 등을 받들어 공경함을 의미하는 데 반해 존중은 그것과 크게 상관없이 상대를 높여 귀중하게 대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존중은 내가 타인에게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대우하는 마음 자세를 뜻할 것이다. 존경이 일방적일 수 있는 데 반해 존중은 상호적이다. 상대를 존중해야 자신도 존중받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도 존중받지 못한다.

우리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고 며칠 전 일을 기억해내고 해결책을 고민하다 빨간불을 보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뇌가 뉴런이라는 신경세포 간의 연결을 통해 외부와 내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신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가지와 뿌리가 드러난 나무처럼 생긴 뉴런의 신호 전달 역할은 그것을 둘러싼 세포막에서 출발한다. 뉴런은 세포막을 경계로 전기를 띤 원자, 즉 이온의 불균등한 분포를 갖는다. 이것으로 세포 안쪽은 전기적으로 음의 상태, 바깥쪽은 양의 상태가 된다. 이것은 생명 활동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세포막에 있는 나트륨-칼륨 펌프라는 것이다. 펌프는 세포막에서 문지기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세포 안팎을 경계로 전위차가 음에서 양으로 유지되도록 한다. 그런데 뉴런이 자극을 받으면 닫혀 있던 세포막의 이온 통로가 열리면서 이온이 확산되고 이온의 불균형이 깨진다. 통로는 바로 닫히지만 이것이 옆에 늘어선 이온 통로를 차례로 자극해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온의 불균형이 깨지면 세포가 활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도 펌프다. 펌프는 나트륨 양이온 세 개를 내보내고 칼륨 양이온 두 개를 들여보내는 식으로 세포의 음 전위를 회복한다. 이것으로 다시 우리는 산책을 하며 꽃향기를 맡다가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뒤에서 자전거가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긴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대충 반응하는 것 같던 우리 몸속에 이렇게 정밀한 장치가 들어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몸 안에 과학 한 채를 안고 사는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왕따와 갑질 같은 단어들은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나온 신조어다. 그러한 현상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진 않았지만 최근 들어 그 양상이 심각해지고 사회 전체로 퍼져가고 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존중받길 원하는 심리 상태는 내부와 외부 간에 적당한 주고받기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세포의 생명 법칙에도 어긋나는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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