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이여성과 이쾌대의 민족문화연구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이여성(본명 이명건)은 1901년 칠곡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일본, 상하이 등에서 신교육을 받고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에 투신하였고, 해방이후에는 1948년 월북하여 정치인이자 문화연구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혜성단을 조직하고 폭동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복역한 적도 있다.

그는 또 화가로 대구 최초의 근대적 형식의 전람회인 1923년 대구미술전람회에 이름을 올렸고, 이상범 등 당대 화가들과도 수차례 전람회를 가졌지만, 그림은 그를 대표하는 이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1930년 귀국한 이여성이 언론사 기자로, '숫자조선연구'(김세용 공저, 1931-1935) 통계서적의 저자로 당대 사회 운동가로 알려질 때, 그를 알린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그것은 역사화가이다. 그는 미술, 전통공예 등에 대한 논저를 발표하고 문화와 풍속에 관심을 보였으며, 이때부터 민족의 역사를 시간적으로 평면화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938년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 역사와 풍속의 한 장면을 그리는 역사화 작업을 선보였다. '청해진대사 장보고' '격구지도' '악조 박연선생' '유신참마도' '대동여지도 작자 고산자' 등에서 그는 복식, 풍습 등의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였다. 이때 제작한 것들 가운데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격구지도'(1930년대)는 과거의 복식과 도구, 경기방식 등 그의 세밀하고 집요한 연구로 표현된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민족문화 연구는 이어져 나중에 '조선복식고'(1947)와 '조선미술사대요'(1955) 등의 저술로도 나타났다.

이여성의 민족문화연구는 그의 동생인 이쾌대(1913-1965)에게도 영향을 준 듯하다. 이쾌대는 대구수창보통학교를 나와 휘문고보에서 장발을 만나 미술에 입문하였고,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제국미술학교를 1939년에 졸업하였다.

학업이 거의 끝나가던 1938년 일본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녹포사 공모전에서 '무희의 휴식'과 이과전에서 '운명'이 입선되었다. '무희의 휴식'(1938)은 쪽진 머리에 족두리를 얹고 색동 소매를 단 원삼과 분단장을 한 여인이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인물의 개성이나 표정보다는 채복의 색과 아름다움이 먼저 들어온다.

'운명'(1938)과 '상황'(1938) 등 같은 시기 이쾌대의 상징적인 서사의 그림에서도 조선의 다양한 복식을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당시 이쾌대의 화법은 서양화임에도 불구하고 3차원의 볼륨보다는 동양화의 평면적인 채색과 선묘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붉은 소반 앞에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조끼를 입고 앉아 책을 읽는 이여성을 그린 '이여성의 초상'(연도미상)에서는 얼굴과 옷의 주름 등의 표현에 윤곽선이 두드러지고, 평면적인 채색으로 채워져 있다. 아마도 그때 이쾌대는 자신의 방식으로 조선화의 방향과 정체성을 고민한 듯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