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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수습기자가 바라본 '코로나19' 대구 현장은…

탈수습 이후의 근황은…"좀 더 책임감 느끼고 어깨 더 무거워 져"

지난해 10월 입사한 수습기자들에게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기자로 성장하기 위한 더할나위 없는 훈련의 장이 됐다. 올해 1월부터 코로나19 관련 현장을 종횡무진한 매일신문 수습기자 5명이 본 코로나19 현장 이야기와 기자로서의 다짐 등을 들어봤다.

수습기자가 바라본 코로나19 사태

Q. 대구 첫 코로나 터진 날 '나는?'

배주현: 대구에서 잠깐 머물러간 17번 환자 이후로 좀 텀이 있었고 31번 환자가 확 터졌잖아. 난 31번 확진자 터졌을때 '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어.

이수현: 나는 그때 사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만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었고, 대구는 청정지역이라서 확진자가 한 명도 없던 상황이었어. 근데 갑자기 확진자가 팡 터지기 시작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대구 봉쇄령 내려지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

변선진: 처음에 대구에서 한 명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음날 갑자기 몇십명 몇백명 몇천명씩 늘어나니까 깜짝 놀랐어. 내가 사는 대구에서 터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 그래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적어도 대구 안에서는 완화되어가는 추세여서 좋은 것 같아.

김지수: 나는 2월 18일 첫 확진자 나온 날, 신천지 대구교회를 갔는데 그때는 그냥 대구교회라고만 알았지, 신천지였는지도 몰랐어. 근데 그게 신천지더라고. 그래서 깜짝 놀랐고 일단 갔을때 신천지 대구교회 관계자들이 나와서 기자들을 못 들어오게 엄청 거부를 하시더라고. 그래서 '도대체 왜 이렇게 강하게까지 나오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지나고 신천지인 걸 알았지.

신중언: 나는 31번 확진자의 아파트 단지 쪽으로 갔었지. 주민분들이 밖에 나와서 걱정스레 이야기하시고 경비원 아저씨도 괜스레 밖에 나와서 걱정하시더라고. 분위기가 조금 우울하다고 생각했어.

Q. 코로나19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

변선진: 나 같은 경우에는 대구경북에서 왔다고 상인들을 내쫓은 경우가 있었어. 상인 분이 처음에는 나한테 제보를 했는데 본인이 창원 진해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TK사람이니까, 혹시 코로나 걸린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그냥 너네 지역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내쫓은거야. 그래서 이분은 되게 속상해하시고 내가 이걸 기사로 쓸려고 차근차근 물어봤는데,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전국에서 모이는 장사이다보니 혹시나 내가 이걸 제보했다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시더라고.

배주현: 나도 비슷한 게 있었는데 대구에서 확진자 확 터지기 전에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배척이 심했잖아. 대구가 터지니까 타지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코로나19로 결혼식 취소됐다는 걸 취재하러 가고 있었는데 택시 아저씨가 "원래 오늘 부산 지인 결혼식 가려고 했는데 대구 사람이라고 오지 말라고 해서 화가 난다. 근데 그전에 우리가 중국인 유학생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배척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해서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어.

김지수: 나는 취재했던 것 중에 의료 폐기물 업체 소각장 르포했던 게 기억에 남아. 보통 코로나 발생하고 나서 '영웅들' 이렇게 해서 의료진 소방대원분들을 많이 조명하잖아. 의료 폐기물을 처리하시는 분들의 목소리는 별로 담았던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이 르포 취재를 계기로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서 안보이는 곳에서 힘쓰시는 분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신중언: 나는 우리가 코로나 기간에도 사건이 있는지 없는지 취재를 했잖아. 근데 이제 경찰에 전화를 하든 뭐 하든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아 코로나 때문에 사건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잖아. 나는 사실 그때 중부서에 출입하고 있었는데 중부 같은 경우는 클럽, 유흥주점 이런 것들이 폐쇄가 되니까 실제로 많이 줄었대. 그게 기억에 많이 남네.

이수현: 나는 코로나 겪으면서 미담이 엄청 많았던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 그리고 미담의 주인공들이 다 우리 이웃에 있는 분들인거야. 가게 운영하시는 분들, 마라톤에 참여하시는 분들, 아니면 어린이집 운영을 하시는 그런 분들. 그래서 미담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해야하나? 그게 굉장히 개인적으로는 조금 감동적이었어.

Q. 탈 수습 소감

김지수: 이제 지난주에 부서배치가 되고 발령이 났잖아. 그래서 다 경찰서, 구청 등 각자 출입처를 맡게 됐는데 그래서 더 책임감이 커졌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출입처에 가면 내가 매일신문 대표해서 가는 거고 그 출입처에서 매일신문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 뭔가 좀 더 책임감, 그리고 더 어깨가 무거워졌다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드네.

이수현: 탈수습이라고 하면 나는 탈수습을 할 쯤엔 내가 완전히 기자가 돼 있을 줄 알았어. 근데 그렇진 않더라고. 어느 연장선상에서 계속 과정에 있을 뿐이고 "5월 1일자로 수습이 해지가 됐다!"고 들었을 때도 사실 난 현실감이 별로 없었어. 왜냐하면 4월 30일의 나나 5월 1일의 나나 같은 사람이더라고. 하룻밤 지나더라도 사람이 바뀌진 않더라고. 마치 19살에서 20살 성년이 된 것처럼 뭔가 법적인 지위나 성인으로서의 책임이 20살에 갑자기 덜컥 주어지는 것처럼 수습 떼고나서도 그게 덜컥 주어지는거 같은데 아직까지는 내가 어설프고 서툴다고 생각을 해서 그래서 좀 계속 부단히 노력을 해야할 것 같아.

배주현: 나는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거 같아. 수습 때는 "아 너무 힘들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떼어보니까 더 힘들어. 그만큼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기사를 쓸 때 도 수습 때는 모르겠으면 "사수 선배가 봐주겠지"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오로지 내가 써야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이 다 나한테 있으니까 팩트 하나하나 쓰는 것도 정말 신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나 또한 더 부단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해.

변선진: 일단 가장 느껴지는 건 사수가 없어졌잖아. 처음에 수습 일때는 그래도 사수 선배가 가끔씩 한번 봐주니까 조금은 기사를 쓰고 나서 덜 본다던지 그런게 있었는데 이제는 바로 기사가 바로 나가는 거니까 한 번 더 읽어보고 또 읽어보는게 습관이 생긴 거 같아.

신중언: 확실히 나도 내 기사에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느낌을 받아. 이런 부분에서 압박감이나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되는 것 같아. 과거에는 선배 이름이 같이 나가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이름으로만 나가잖아, 그래서 기사 댓글들이 모두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은거야. 싹 읽고 또 읽으면서 더 노력해야겠다고 동기부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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