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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뒷담] 화 잦은 文에게 '격노하려면 장판교 장비처럼'

영화
영화 '적벽대전'(2008)에서 장비 역을 맡은 중국 배우 장금생(장진성, 臧金生), 문재인 대통령. 네이버 영화, 연합뉴스

대통령이 화가 났다는 내용의 코멘트가 청와대 대변인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나온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 기록관 건립 관련 논란이 불거졌던 지난해 9월 11일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현 더불어민주당 서울 광진을 국회의원)이 춘추관 브리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개별 기록관과 관련된 뉴스를 보며 '당혹스럽다'고 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기록관을 원하지 않는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고 전한 것이다.

▶이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해 2월 20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5⋅18민주화운동 관련 광주 지역 원로들과 오찬간담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당시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일부 의원들이 '5⋅18 폄훼' 발언을 한 것을 겨냥한듯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일부 망언이 계속된 데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고, 이 역시 당시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이 공식적으로 기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보다 앞서 2018년 1월 18일에는 전날 이명박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검찰 수사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보수궤멸을 겨냥한 정치공작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보고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며 정치보복 운운한 것에 대해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당시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식 발언에서 '분노'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문재인 대통령이 화를 낸 사실을 청와대 관계자가 직접 기자들에게 전하고 다시 언론 보도로 나오는 사례가 취임 초기인 2018년쯤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이와 비교해 '간접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격노 사실이 알려지는 사례도 거듭 나오고 있다.

바로 지난 8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위기임에도 광화문 집회를 강행한 사랑제일교회 등을 두고 "국가방역시스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분노' '격노' '화' 등의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명백한 도전'이라는 표현의 뉘앙스 자체가 '화가 난 상태'를 떠올린다.

좀 더 유명한 건 그 며칠 전인 지난 8월 7일 나온 화이다. 언론 보도에서는 그날 오전 한 보고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고 했다. 역정(逆情)은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서 내는 성'이라는 뜻. 당시 보고에는 집중호우 상황, 청와대 인사들의 부동산 처분 관련 내용, 부동산 정책에 대한 여론 동향 등이 담겼던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 최근 문재인 대통령 및 정부는 물론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까지 끌어내린 '악재'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정을 낸' 직후인 7일 오후에는 노영민 비서실장과 5명 수석의 사의 표명이 이어진 바 있다.

보고가 이뤄졌고→화를 냈고→이후 사의 표명이 나왔으며→그랬다는 소식(=언론 보도)이 국민들에게 알려진 게, '역정'의 뉘앙스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서는 언론 보도를 염두에 둔 '대통령 화 알리기 전략'이라는 분석이 예전부터 나온 바 있다.

청와대든 어느 공공기관이든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득이 되는)알려야 할 건 알리고 (손해가 되는)숨겨야 할 건 숨긴다. 기자가 물어서 어쩔 수 없이 결점이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브리핑을 통해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대통령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그 발로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 기록관 건립 관련 논란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화를 내면서 논란을 가장 효과적으로 불식시켰다는 평가다. 5⋅18민주화운동 관련 광주 지역 원로들과 만난 자리에서 5⋅18 폄훼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 것은, 혐오 발언에 대해 지적해 박수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면서, 야당에 대한 비판 및 지지층 결집도 꾀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 발언에 대한 대응에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을 적용할 수 있다.

사랑제일교회 등을 두고 국가방역시스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고 밝힌 것은 코로나19 확산세에 대해 엄중히 대처할 것임을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당국의 책임 소지도 좀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 더해 최근 청와대에서 보고를 받은 후 '역정을 낸' 것은 내부 기강 잡기의 목적도 있었다는 풀이다. 그래서 목적대로 곧장 그날 오후 6인 참모들의 사의 표명이 이어진 것.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및 산하 수석비서관 5명이 지난 8월 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왼쪽부터 노영민 비서실장, 강기정 정무수석, 김조원 민정수석, 윤도한 국민소통수석, 김외숙 인사수석, 김거성 시민사회수석. 이 가운데 노영민 실장, 김외숙 수석은 유임됐다. 연합뉴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및 산하 수석비서관 5명이 지난 8월 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왼쪽부터 노영민 비서실장, 강기정 정무수석, 김조원 민정수석, 윤도한 국민소통수석, 김외숙 인사수석, 김거성 시민사회수석. 이 가운데 노영민 실장, 김외숙 수석은 유임됐다. 연합뉴스

▶그런데 6인 참모들의 사의 표명 후 지지 여론은 반등되지 않았고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퍼부은 격'이었다는 평가다. 사의를 밝힌 참모들 중 김조원 당시 민정수석 등 일부가 거듭된 권고에도 여전히 집을 팔지 않은 다주택자로 알려지면서 "자리 대신 집을 택했다"는 분노 여론이 들끓은 것.

청와대로서는 화(火,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내는 성)를 알린 게 화(禍, 불행·재앙)를 초래한 셈이다.

대통령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주요 목적 가운데 국민들을 좀 달래어 지지율을 높이는 의도도 있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평가다.

또한 여러 사례를 시간 순서대로 배치해보면, 점점 그 효과가 떨어지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즉 화를 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니만 못한 맥락도 발견된다. 지지율이 높았던 임기 초기와 달리 지지율이 떨어진 지금 후기에는 '대통령 화 알리기 전략'이 좀체 통하기 힘들어졌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중국 드라마
중국 드라마 '삼국'(2010)에서 장판교에 홀로 선 장비. 드라마 화면 캡처

▶화 내는 전략을 잘 써 목숨을 구했지만 반대로 화 내는 버릇을 못 고쳐 역시 목숨을 잃은 인물이 있다.

바로 삼국지연의의 '장비'다.

208년 유비군은 형주 당양에서 조조의 대군에 쫓겼다. 조운이 적진을 누비며 유비의 아들 유선을 구출한 후 복귀하다 장비와 맞닥뜨린 곳이 바로 장판교이다. 지친 조운을 통과시킨 장비는 20여 기병만 데리고 장판교 위에서 조조군을 기다린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장비가 "누가 맞붙어 싸워보겠느냐"고 고함을 지르고, 이에 장비의 무용을 익히 알고 있는 조조군 장수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감히 덤비지 못한다. 이때 장비가 "내가 장익덕이다.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고 고함을 지르자, 상대 장수 중 하후걸이 놀라 말에서 떨어졌고, 나머지 장수들도 도망친다.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니 당연히 과장은 있겠으나, 이는 삼국지정사에도 전해지는 역사 기록이 바탕이다.

영화
영화 '적벽대전'(2008)에서 지친 조운(오른쪽)을 아군 진영으로 보낸 후 홀로 조조군에 맞설 채비를 하는 장비(왼쪽). 네이버 영화

당시 장비가 20여 기병을 이용해 복병이 꽤 있는 것처럼 꾸며 속였다는 설, 조조의 대군 가운데 일부인 수백명 정도만 장판교로 쫓아 왔기 때문에 장비가 배수진을 치고 상대할만 했다는 설, 조조군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장비의 부대를 만나 더는 추격할 여력이 없어 돌아갔다는 설 등이 제기된다.

아무튼 이때 장비의 활약은 적을 향한 용기 있는 격노로 지금에까지 전해진다. 만일 가짜 복병 전략을 썼다면 장비의 격노는 곧 적을 속이는 지혜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장비는 부하들에게 가혹한 상관이기도 했다. 의형제 유비가 장비의 이 같은 화(火) 잘 내는 기질을 두고 "화(禍)를 초래하는 길"이라며 고칠 것을 권유했지만 장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고로 장비는 요즘 직장 등 사회 곳곳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분노 조절 장애자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장비는 221년 유비의 오나라 정벌 당시 지원군을 끌고 가기 직전 부하 장수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당했다. 물론 장비가 범강과 장달에게 화를 내는 등 가혹행위를 해 피살됐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분명 역사 내지는 세간의 평가를 참고한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가 앞서 죽은 의형제 관우에 대한 조의의 표시로 병사들에게 입힐 흰색 갑옷을 사흘(3일이다, 4일(나흘) 아니다) 안에 준비하라고 범강과 장달에게 지시했고, 범강과 장달이 불가능하다며 시간을 더 달라고 하자, 화가 잔뜩 난 장비가 둘을 폭행, 이에 앙심을 품은 범강과 장달이 장비를 살해한 것으로 나온다.

중국 드라마
중국 드라마 '삼국'(2010) 중 장판교에서 조조군을 향해 호통을 치는 장비. 드라마 화면 캡처

▶장판교에서의 격노는 목적을 달성했으며, 멋도 있고, 그래서 따라할 만한 화 내기 사례이다. 반대로 화가 치밀어 올라 범강과 장달을 폭행한 것은 실패한 화 내기 사례로 분석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화(내지는 화 알리기 전략)에 대해서도 효과를 낸 사례와 효과를 내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역효과를 낸 사례로 나눌 수 있겠다.

다만 이 효과에 대한 평가는, 대통령의 화를 알리는 청와대 어느 관련 부서의 업무(전략)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따지는 것에 다름 아니긴 하다.

그러니 이왕 할 거라면, 국가와 국민에게 실익도 주는 '대통령 화 알리기 전략' 역시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판교에서 아군을 구한 것은 물론, 유비가 좋다며 피난을 따라 나선 백성들의 목숨도 살린 장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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