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를 키워낸 두 강이 있으니 바로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이다. 금호강은 동서로 흐르며 아버지처럼 대구를 보듬어 왔고, 신천은 남북으로 흐르며 어머니처럼 젖줄을 공급하여 왔다.
그 중 금호강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의 가사령과 기북면 성법령에서 발원해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든다. 낙동강의 모든 지류 중 두 번째로 큰 강이다. 바람이 불면 강변의 갈대밭에서 비파 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물이 맑고 잔잔하다 하여 이름이 '금호'로 유래되었다. 근대까지 대구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어머니의 강인 신천은 앞산 최정산에서 발원하여 200년 전에는 지금과는 달리 용두산-이천동 수도산-동산-달성공원 앞-금호강으로 흘렀다. 특히 대구 모노레일 3호선 건들바위역 앞으로 흘러갈 때는 많은 시인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 서거정 선생이 노래한 대구 10경 중 입암조어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정조 때 시가지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대구 판관(判官)으로 부임한 이서가 사재를 털어 1778년(정조 2)에 물길을 돌려 새로 제방을 축조하였다. 그래서 대구를 관통하던 방천은 '신천'이라는 이름이 유래되고 지금의 물길을 이루었다. 이에 감읍한 대구의 옛 주민들이 제방이름을 '이공제'라 하고 그해 8월에 이서의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 뒤 없어진 것을 1797년에 다시 세우고 1805년(순조 5)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또 다른 비를 세워 대구시 수성구 상동 신천동로 변에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강은 이 땅에 문화를 잉태하고 오랜 세월을 거쳐 대구를 풍요롭게 하였으며 혼신의 힘으로 내 고장을 키웠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 심정으로 지켜본 이 땅의 수많은 굴곡된 역사와 아픔을 강들은 또 어떻게 견뎌왔을까? 경산의 압독국, 남쪽 끝자락 청도의 이서국이라든지, 대구 명칭 미상의 소국, 앞산의 주봉인 비슬산 가야국과 신라의 흥망성쇠, 팔공산 왕건과 견훤의 동수대전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많은 희비가 교차되었을까? 자식을 빼앗긴 일제강점기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버이의 사랑을 당연시하여 무심히 지나치듯이 강도 오염되어 간다. 항상 우리의 곁에 머물면서 맑은 공기를 불어 넣어주고 시원하고 포근한 쉼터가 되어 주며 지친 심신을 달래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힘을 주는 참어버이요 수호신 같은 강을, 자식들은 지나친 욕심을 부려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의 오수로 멍들게 하고 병을 키우고 있다. 이제는 맑은 수질의 고귀한 숨결과 자장가 들려주던 물소리도 사라지고 자식의 무관심에 금호강과 신천의 양수는 메말라 간다. 어버이가 늙어 가고 있다. 수수방관하는 자식에게 회초리가 날아올지도 모르니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내 자식들에게 쏟는 정성으로 강을 돌보아야 하지 않을까?
허행일 시인·낙동강문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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