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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시와 함께] 은행나무/ 정용주(1962~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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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옷을 입은 자가 잠시 머물다 갔다

나는 조금 무거워졌다

듣지 못한 말을 되새기며

조금 더 생각하고 싶었지만

기침 같은 바람이 왔다

새떼가 높이 날아 사라졌다

어차피 혼자 키워왔던 날들의 말이었다

혓바늘처럼 아리고

밥풀처럼 가득하였으나

당신 폐허의 정원을 한나절 환하게 수놓았으므로

뒤섞인 기호들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었다

허공이 비었다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으나 모든 말을 했으므로

나 또한 텅텅 비었다

-後略-

[유홍준의 시와 함께] 은행나무/ 정용주(1962~ )作

젖은 옷을 입은 자가 잠시 머물다 갔다

나는 조금 무거워졌다

듣지 못한 말을 되새기며

조금 더 생각하고 싶었지만

기침 같은 바람이 왔다

새떼가 높이 날아 사라졌다

어차피 혼자 키워왔던 날들의 말이었다

혓바늘처럼 아리고

밥풀처럼 가득하였으나

당신 폐허의 정원을 한나절 환하게 수놓았으므로

뒤섞인 기호들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었다

허공이 비었다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으나 모든 말을 했으므로

나 또한 텅텅 비었다

-後略-

십일월이다. 치악산 자락에 깃들어 살던 정용주 시인이 봉화 명호 땅으로 은둔의 거처를 옮겼단 얘기를 듣긴 들었었다. '밑동 잘려나간 배추밭 위로 비가 내린다/ 배춧잎들 어지럽게 널려 있다// 검은 비닐 뜯겨지고/ 허물어진 이랑// 버려진 배춧들/ 허리에 지푸라기 끈 묶고 기울어져 있다.' 깊은 산중에 혼자 사는 시인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 '듣지 못한 말을 되새기며' 살아온 날들이 많았을 것이다. '어차피 혼자 키워왔던 날들의 말이' 많았을 것이다.

이즈음 단연 눈에 띄는 건 은행나무 단풍이다.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기까지 은행나무의 삶도 고되고 고단했을 터. 잎 다 져버린 은행나무 아래 홀로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은 겨울이 오면 해야 할 시골살이의 몫이다. 실은 내 식으로 퇴고하면 빼버리고 싶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이제 묵언의 책 한 그루/ 오래 서 있을 것이다'.

유홍준 시인
유홍준 시인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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