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되 두 되 팔아먹는 궁민으로서는 도저히 시장에서 쌀을 구할 수 없는 비참한 구렁으로 몰아넣는 한심한 상태인데 지난 14일쯤에는 100원짜리 지폐로 변소에서 뒤지를 하고도 부족감을 느꼈는지 같은 100원 지폐로 코를 푼 얼빠진 사실까지 있는데 이는 민국의 도덕심에 비추어 극히 우려되는 바 크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12월 20일 자)
100원짜리 지폐로 변소에서 종이 대신에 밑씻개로 썼다. 경북 영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종이조차 귀한 마당에 뒤지로 지폐를 썼으니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당연했다. 탄식할 일은 예서 끝나지 않았다. 뒤지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지폐로 코를 풀기까지 했다.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번 업자의 우월감이 삐딱하게 드러난 사건으로 치부되었다. 치솟는 물가로 민생고에 시달리는 주민들로서는 절로 기운이 빠지고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부족한 물자에다 악덕 업자의 매점매석 등으로 치솟은 물가는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더욱 누더기로 만들었다. 지폐로 콧물을 닦는 일이 일어난 당시에는 겨울을 앞두고 농작물 투기 바람이 거셌다. 농작물 1평에 3천~4천원 하던 가격이 한두 달 만에 7천~8천원으로 올랐다. 이에 따라 농촌의 쌀값이 덩달아 올라 1두 1천원대에서 2천200원으로 급등했다. 매점 상인과 보따리 상인들의 농작물 쟁탈전으로 쌀값이 급등했다. 한 되 두 되 팔아먹는 서민으로서는 시장에서 쌀을 사 먹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해방공간에서의 고물가는 일상사였다. 경제체제 전환 과정의 혼란과 미 군정의 경제정책 부재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더구나 생필품의 부족은 주민들을 더 큰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국이 배급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경북도의 경우 한때는 고무신과 양말, 타월, 세수비누 등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하지만 그 효과는 이내 끝났다. 모리배들의 매점매석은 기승을 부렸고 물가상승은 가팔랐다.
해방 1주년을 맞아 조사한 대구부 내 생활필수품의 물가를 보면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쌀은 1두(말) 80원에서 최대 1천200원까지 올랐다. 조사 시점에는 950원이었다. 건명태는 20원에서 150원, 마늘 1접은 25원에서 150원으로 뛰었다. 남자 고무신은 40원에서 230원, 여자 고무신은 35원에서 130원으로 올랐다. 양말은 1족에 2원에서 20원, 전구 1개는 8원에서 80원으로 상승했다. 제사상에 오르던 정종은 25원에서 200원으로 올랐다.
생필품의 급등은 열차의 여객 운임 등 공공요금 인상을 불러왔다. 해방 이듬해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열차 요금은 몇 달 만에 2배나 올랐다. 자고 나면 치솟는 물가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지나 가옥 수십 채를 무단으로 점유해 높은 권리금을 요구하는 악덕업자도 적지 않았다. 농지가 없거나 무주택자들에게는 정작 그림의 떡이었다. 그때도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은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내로남불'의 그 달콤함을 떨쳐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처럼.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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