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1) - 김옥순(필명 김아가다)

아들 못 낳은 엄마의 恨 대신, 당당한 딸로 여장부 삶 100년

허분이 여사가 1967년 부산 범어사에서 남편 최명상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허분이 여사가 1967년 부산 범어사에서 남편 최명상 씨와 함께 찍은 사진.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 주인공 허분이 여사의 2014년 장례식 사진

곱다. 꽃 속에 파묻힌 어머님이 웃고 계신다. 향년 100세. 상객들이 모두 호상이라면서 웃고 떠들썩하니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너도나도 망자와 얽힌 추억을 회상하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사진 속을 걸어 나온 어머님이 기웃거리며 자손들 이야기에 참견하고 다니시는 듯하다. 무연히 타고 있는 향불 연기 속에서 이태 전의 일이 떠오른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께 생신을 축하드린다면서 꽃바구니를 안겨드렸다.

"오늘이 이월 열사흘이냐?"

그 말씀에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정신 줄을 놓으시더니 자식도 못 알아보고, 아득한 과거 속으로 묻혀 지낸 지 오래되었다.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처지에 생일의 기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월 열사흘은 어머님께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한 본능일까, 해마다 추억된 학습의 기억일까. 이월 열사흘, 세상에 온 그날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한 평생 자신을 지탱할 힘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님은 문맹이다. 그렇지만 일흔 살에 미국의 딸네 집에도 다녀오셨다. 미국까지 가는데 내 이름 석 자는 알고 가야지 하시면서 글자를 익혔다. 입국심사를 받을 때 서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님은 마음이 바빠졌다. 까막눈이 한이라면서 신문지 한 장에 이름 석 자를 빼곡히 연습했다. 평생 처음 잡아보는 연필이었으나 어머님의 열정은 눈물겨웠다.

여장부이신 어머님은 더 넓은 세계가 궁금했다. 젊은 나도 도전하기 두려운데 노인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대단했다. 어머님의 미국행 준비를 하려고 시장에 다녀왔다. 고춧가루, 김, 멸치, 미역 등을 쇼핑백 가득 짊어지고 들어오는 나를 어머님이 반가이 맞으셨다. 연필로 머리를 긁으면서 신문지를 내미는 표정 속에 한숨도 끼어들었다.

"아가, 내 이름이 조금 다르지."

신문지에는 '허분이'가 '허분10'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웃다가 울다가 했다. 어머님의 배우지 못한 한이 안타까워서 울고, 그 열정에 감탄하여 응원하면서 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장난삼아 어머님을 '허분10 씨!'라고 불렀다.

휴스턴으로 직항하는 비행기가 없었다. 요금이 저렴한 외국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갈아타는 여행이었다. 가슴에다 초보 여행자라는 표지를 달고 안내를 받았다. 무사히 미국 땅에 도착한 어머님에게 한국의 가족들은 손뼉을 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머님의 표현에 의하면, 같은 비행기 안에 탔던 노랗게 생긴 사람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고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씀은 어머님의 생존 법칙이었다.

지혜롭고 명석하신 어머님은 미국에 살면서 에피소드를 여럿 만들었다. 노인끼리 당신 집의 차는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면서 딸에게 우리 차 이름도 가르쳐 달라고 했다. 'Mercedes Benz'라고 말하자 어머님의 두뇌 회전은 빠르게 돌아갔다. '옳지 모서리를 돌아가면 변소가 있지.' 다음날 경로당에 가서 "모서리 밴소"라고 얘기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또 한 번은 옆집에 사는 미국 노인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영어도 못 하는데 자꾸 더 먹으라는 손짓을 하니 어머님은 진땀이 났다. 눈치를 챈 딸이 '아임 소 풀'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무릎을 탁 치면서 '맞아 암소가 풀을 많이 먹으면 배부르지.' 바로 "암소 풀~"이라고 하셨다.

1963년 현충사에서 찍은 사진. 사진 왼쪽부터 남편 최명상 씨, 주인공 분이씨, 큰 며느리, 큰 딸.
1963년 현충사에서 찍은 사진. 사진 왼쪽부터 남편 최명상 씨, 주인공 분이씨, 큰 며느리, 큰 딸.

어머님은 굳건했고 당당했다. 대농의 안주인으로 살아온 자신감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주눅이 들게 했다. 시시한 남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쌀 한 가마를 거뜬하게 짊어지는 여장부였다. 치마를 입어서 여자이지 장정 몇 몫을 하셨다고 했다. 아들을 못 낳아서 소박데기가 된 친정 모친의 한이었고 딸로 태어난 삶의 오기라고 할까.

어머님은 좋게 말하면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고, 흉을 보자면 지독한 구두쇠였다. 바느질도, 요리도 서툴렀던 신혼 초에 낡은 순모 티셔츠를 내 앞에 내놓으셨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팔을 잘라서 다리를 만들어 내복으로 입으라고 했다. 어떻게 할지를 몰라 친정엄마한테 가져갔다. 바느질을 잘하던 엄마는 단숨에 가위로 쓱 잘라내더니 윗도리로 아랫도리를 만들어 냈다. 저 시집을 어떻게 살까 걱정되는지, 엄마 눈에 이슬이 맺혔다. 대단한 어른이니 살림을 여물게 배우라고 일러주었다.

까막눈이었던 어머님의 생활 방식은 예술이었다. 하루는 금고를 열더니 몇 가지 문서를 보여주셨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집문서에는 용마루까지 얹어놓은 기와집이, 산 문서에는 어느 화백의 '바보 산수' 같은 그림이 봉투마다 그려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공과금의 영수증이 색깔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노란색은 오물세, 파란색은 수도요금, 하얀색은 재산세. 어머니가 가꾸시는 지혜의 숲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십 년 전이었다. 성정이 차분하고 정갈한 어머님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자꾸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당에 다녀오시다가 길을 잃어서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는 화장대 위에 있는 클렌징크림 한 통을 다 먹어 치웠다. 종내에는 사람을 의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더니 당신의 금 브로치를 가져갔느냐고 나를 닦달했다. 자식들이 모두 놀라기는 했지만, 어머님의 병이 치매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은 대전에 사는 큰 딸네 집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이 되었다. 고령의 노인인지라 수술을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분이는 아들 못지않은 삶을 살았고 소작에서 지주로 수성 뜰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며 한평생 당당했다. 외아들인 신랑에게 시집와서 아들 여섯에 딸 둘을 낳아 시부모님께도 기쁨을 안겨드렸다. 분이는 이제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기가 되어서 머리카락도 검은색이 더 많아지고 눈빛도 초롱초롱하던 어머님이 하늘의 천사가 되었다.

백 년, 한 세기가 끝이 났다. 세기의 끝에서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가 새록새록 풀어 헤치고 나온다. 결혼 준비를 하는 나에게 예단으로 차렵이불 네 채를 더 얹어오라고 하셨다. 궁금했지만 새색시는 시키는 대로 했다. 시집살이에 적응하느라 고달픈 어느 날 안방으로 어머님이 나를 불렀다.

아가, 음력 이월은 영등 할매가 오시는 바람 달이다. 영등바람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절기에 북서풍이 몰아치는 사나운 바람이다. 그래서 이월에는 바람을 재워달라며 영등 할매와 해신에게 바치는 풍어제가 열린다. 여자가 바람 달에 태어났으니 그 팔자가 오죽 드셌겠냐. 내 이름은 분이다. 울 어매가 지었다. 한자의 음이나 뜻도 없이 그냥 분해서 분이라고 지은 게지.

내가 울 어매 뱃속에 있을 때 누가 봐도 산모의 배가 남산만 하고 뒤태가 두루뭉술해서 아들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아베는 기분이 으쓱했단다. 들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으레 주막을 들렀다. 요번에는 아들을 보겠다는 말이 아베를 들뜨게 했다. 조상님께 낯을 들게 되어 한시름 놓았다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어깨춤을 추었다. 그날은 말만 잘하면 너도나도 막걸리 한 사발을 얻어먹었다. 사대 독자가 대를 잇게 되었으니 아베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신명이 났다.

어매의 몸에 태기가 왔다. 아베는 목욕재계하고 조상님께 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툇마루에 좌정하고 하마 소식을 기다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더 큰 것일까. 머스마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태어난 아기가 가시나였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면서 애꿎은 담배를 쪽쪽 빠는 소리를 들으며 울 어매는 하늘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다 녹았다고 하더라.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분이' 2편은 다음주 화요일(13일)에 게재합니다.

김아가다
김아가다

◆당선 소감…수많은 우리 '분이' 어머니·며느리 삶을 위로

백발의 인생 2막, 액티브시니어가 되렵니다

이 글을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께 바칩니다. '분이'는 내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님의 존함 '분이'를 제목으로 달아 죄송합니다. 주섬주섬 담은 글 화소 중에 혹여 가문에 누가 되는 것이 없을까 적잖이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여자이고 며느리였기에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한국 여인의 삶을 풀어보았습니다. 백수를 누리고 소천하신 어머님의 빈소 앞에서 까만 밤이 하얗게 될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회상했습니다. 분이의 상처를 통해 지난 세대의 어머니들이, 그리고 며느리들이 함께 치유되고 위로받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지금은 신록이 우거진 계절입니다. 머지않아 또 다른 시간에 접어들겠지요. 시간의 흐름 따라 우리네 인생은 굽이쳐 흘러갑니다. 시니어 반열에 동참한 저 또한 유구한 강물의 역사처럼 한세상 살다가 점 하나 찍게 되겠지요.

몸도 마음도 춥게 살았습니다. 흑발이 어느새 백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인생 2막의 시작을 믿고 싶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분이의 삶에 공감하지만, 분이처럼 살지는 않겠습니다. 뒷전에 머무는 시니어가 아니라 액티브시니어(Active Senior)로 거듭나렵니다.

수상 소식을 전해 받던 날, 숨어있던 날개가 간질거렸습니다. 마구 날고 싶었지요. 함성을 지르면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동안, 낮은 곳에 머무르면서 오르막 오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씩 조심조심 내딛던 글밭이 제 갈 길이 아닌 듯해서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숨구멍이 트입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부족한 저에게 글힘을 격려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제 가까운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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