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가 읽은 책] 어떤 길에서 문득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리 호이나키 지음/ 김병순 옮김/ 달팽이 펴냄/ 2010

강가 풍경. 제공 최지혜
강가 풍경. 제공 최지혜

무작정 걸었다. 늘 걸었던 길이 낯설다. 들끓는 생각에 갇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얼마쯤 걸었을까. 머리 끝까지 치솟은 화가 스르르 누그러진다. 이성과 감정의 균형이 생긴 듯, 가을 물든 가로수가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이었다. 나는 길에서 길을 찾지 못하면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웠다. 첫 장을 펼쳐 지은이를 소개한 깨알 같은 글을 읽으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다채로운 지은이의 이력에 괜히 동질감이 느껴져 거룩한 바보들의 길에 동행하기로 했다.

리 호이나키(1928~2014)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군인이었고 도미니크수도회 소속으로 빈민구역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대학교수를 거쳐 농부가 되었다. 1993년 5월 초 예순다섯 살의 리 호이나키는 낡은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그가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수많은 산과 언덕, 숲을 지나는 모습.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들길을 걸어가는 모습. 32일 만에 스페인 산티아고에 닿는 순간을 그려보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다른 공간에 있으며 그 공간은 각자 고유한 본성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무수한 인식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내가 어디에 있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잠시 느껴본다면 그것이 앞서 지나온 공간에서 느낀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안다."(43쪽)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저 뒤에 두고 떠났다. 아침마다 전에는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땅 위의 새로운 곳을 거닐며, 그리고 오직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사람들을 만나며 경이로 가득찬 신기한 세상 속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간다. 순간마다 깨닫는 것에 순응하고 모든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 여로의 종착지에 있는 신비로운 세상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다. 무엇인가를 주목한다는 것의 대가란 그 얼마나 환상적인가."(133쪽)

홀로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이해가 되리라. 나는 홀로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낯선 곳을 걸으며 나를 들여다보고 낯선 풍경을 보며 일상에서 못 느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내 자리를 깨닫는다.

"지난 31일 동안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어떤 자의식을 가진 개인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542쪽)

32단락을 천천히 읽었다. 마치 리 호이나키와 함께 걷고 있는 듯 현장감이 넘쳤다. 자연과의 교감과 알베르게에서의 하룻밤은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와 가톨릭·유대교·이슬람과의 관계, 기술발전으로 인한 환경문제, 전통 보존에 대한 그의 통찰력에 빠져들었다.

가을 속에서 리 호이나키를 만나 사색에 빠져 보는 것도 좋으리라. 어쩌면 홀로, 고독과 침묵 속에서 걸어가는 어떤 길이 거룩한 바보들의 길이지 않을까.

최지혜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