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도보 위 계단에 오른다. 머리에 쓰고 있던 스카프를 벗은 그녀는 말없이 긴 작대기에 흰 스카프를 걸어 흔든다. 곳곳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쓴 히잡을 벗어 그녀처럼 흔든다. 침묵 속에서 그녀들은 행인의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손목에는 곧 수갑이 채워진다. 그녀들은 철창 안에 갇힌다. 죄명에는 성매매 조장도 포함돼 있다.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은 이유만으로 그녀들은 성매매를 조장한 범죄자가 된다.
다행히 그녀들을 돕는 여성 변호사가 있다. 오랜 기간 변호사는 청소년 사형수와 여성, 종교적 약자를 비롯한 소수자의 권리를 대변해왔다. 권력의 횡포에 맞선 양심수를 변호한 대가로 3년이나 감옥에 갇힌 적이 있지만, 변호사는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건 수임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앗아갈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 변호사는 징역 38년형에 태형(채찍질) 148대를 선고받는다. 성매매 조장, 최고지도자 모독, 간첩행위, 선전선동 따위가 혐의다. 감옥에서도 그녀는 40일간 식사를 거부하며 죄수들의 처우 개선을 외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철창 안으로 퍼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변호사는 이란의 인권운동가 '나스린 소투데'다.
며칠 전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 '나스린'을 보았다. 포스터에 박제된 이목구비가 화면 속에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활동을 수감 이전부터 영상으로 기록해놓은 주위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걸으며 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읊조렸다.
"모두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먼저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겠지요. 그 다음에 우린 평화에 대해 시를 지을 수 있을 겁니다. 평화에 대한 영화도 만들 거예요."
그녀의 뒷모습에 불현듯 시인 이육사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의 시는 무엇을 노래했을까.
화면 속 그녀의 사무실 벽은 액자로 가득했다. 처음 수감되었을 때 세계 곳곳에서 보낸 편지와 그림을 걸어둔 것이었다. 삐뚤빼뚤 어린이의 글과 그림도 보였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나도 엽서를 하나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2012년 유럽연합 의회가 주는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았고, 올해 '타임'이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뽑혔다. 한마음으로 석방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아직 한국어로는 다큐멘터리가 번역되지 않았다. '나스린'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그녀의 사무실에 한국어로 된 엽서가 걸리고, 그녀가 건강하게 철창 밖으로 걸어 나와 영화에서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금도 그녀는 감옥 안에서 수감자들에게 법률 상담을 해준다고 한다. 정의 실현을 향한 끈기와 두려움없는 열정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나스린 소투데는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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