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예술이 공간을, 공간이 예술을 낳다

화가 이인성 1933년 '상품진열소'에서 개인전
현제명 '대구제일심상소학교'에서 독창회 열어

1931년 건립된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1931년 건립된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뇌경관, 노동공제회관, 상품진열관, 조양회관, 상업회의소, 부립도서관, 이비시아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대구심상소학교(제일소학교), 공회당, 키네마구락부…. 지금 나열한 공간들은 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건물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거나 모일 수 있던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 예술인들의 발표회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오늘은 옛 예술인들의 발표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 예술인들의 활동 기록이 담긴 팸플릿이나, 신문기사를 찾다보면 이렇듯 다양한 문화(?) 공간의 이름들을 만나볼 수 있다. 상품을 진열하는 곳, 대중 집회 장소, 백화점, 교육기관, 다목적 회관, 영화관 등 각각 본래의 목적이 있는 곳이지만, 옛 예술가들은 예술 활동의 결과물을 선보이는 장소로 활용했다.

지난해 연말, 옛 예술인들의 활동 무대를 되짚어보고자 미술평론가 김영동 선생님과 대구읽기모임의 윤경애, 박려옥, 박승주 선생님께 강의를 부탁했다. 선생님들의 발표를 통해 일제강점기 대구의 문화공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대구 최초의 서화가 단체인 교남시서화연구회(회장 서병오)가 1922년 첫 단체 전시회를 연 곳이 바로 '뇌경관'이다. 대구물산진열소라고도 불리는 '뇌경관'은 경북도청 내 부지에 1917년 세워진 건물로, 경상북도 내에서 생산되는 각종 상품을 진열하고 전시하는 곳이었다. 교남시서회연구회는 1923년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대구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 대구노동공제회관은 대구청년회, 노동공제회 등 각 사회단체가 관리하면서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하던 곳이다.

1920년부터는 '경상북도 상품진열소', '조양회관' 등에서 많은 전람회가 열렸다.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의 개인전도 1933년 역전 상품진열소에서 열렸다. 또 이인성은 '이시비야 백화점' 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서 대규모 전람회를 열었다.

한국 서양음악 1세대로 꼽히는 현제명이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첫 번째 독창회를 연 곳은 '대구제일심상소학교'이다. 대구제일심상소학교는 대구 최초의 공립초등학교다. 이곳에서 1926년 8월 바리톤 김문보가 부인 요시사와 나오코와 음악회가 열렸고, 1928년 7월 이곳에서 열린 테너 권태호의 독창회는 한국에서 연 한국인 최초의 독창회로 기록된다. 이후 대구사범학교 강당, 계성학교 강당 등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연주회가 펼쳐졌다.

1931년 11월 '대구공회당'이 개관한 이후로는 대부분의 공연‧전시회가 이곳을 무대로 펼쳐졌다. 1932년 9월, 성악가 박경희 독창회(독립운동가 이여성의 아내)를 비롯해, 무용가 최승희의 대구 공연도 공회당에서 열렸다. 대구출신 독립운동가 이여성의 아내 박경희가 도쿄와 상해, 러시아 음악학교에서 유학한 신여성으로 성악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38년 '키네마극장'이 개관한 후부터는 키네마극장이 본래의 목적인 영화관 이외에도 예술인들의 발표 공간으로 인기가 있었다. 키네마극장은 문화극장, 6‧25전쟁기 국립중앙극장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인기 있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됐다.

6‧25전쟁 이후 미군정기에는 '대구미공보원(USIS)'이 인기 있는 발표 공간이었다. 종합대학이 설립된 이후부터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대강당, 청구대학(현 영남대) 강당에서 크고 작은 공연이 열렸다. 대구공회당 자리에 1962년 대구방송국이 들어서면서 대구방송국 공개홀(KG홀), 그리고 같은 자리에 1975년 '대구시민회관'이 건립되면서 공연‧전시 시설이 조금씩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대구시민회관은 대강당, 소강당, 전시실을 갖춘 훌륭한 문화시설이었지만,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다목적' 시설임을 강조했다. 용도가 '문화예술'임을 전면에 드러낸 것은 1990년 개관한 대구문화예술회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대구에서는 대극장과 소극장, 그리고 대규모 전시실을 갖춘 대구문화예술회관 개관 이후로, 예술인들의 활동 무대가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2003년 개관한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오페라' 전문 공간, 2011년 재개관한 대구콘서트하우스도 이름에서부터 '콘서트' 전문 공간임을 직접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렇듯 이 도시에 문화예술이 융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공간의 발전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예술을 펼치려던 서화가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신여성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예술은 그 공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오랜 세월 예술이 도시의 공간을 일궜고 지금은 공간이 예술을 지키고 있다.

임언미
임언미

임언미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장,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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