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거족 안동권씨 권태사의 후예 14개파 중의 하나인 '복야파'의 한갈래가 세거해 온 안동시 풍천면 가일(佳日)마을 입구에 있는 '가곡지'. 경북도청이 들어선 신도시와 맞붙은 곳이다.
마을에서는 가곡지보다는 가일못으로 더 널리 불린다. 가일을 옛날에는 '지곡'(枝谷)이라 불렀고, '영가지'(永嘉誌)에는 풍산현 지곡리 골 입구에 있는 '지곡지'(枝谷池)라 했다. 마을도 옛 이름인 가일과 지곡에서 한자씩 빌려와 '가곡'이라 불렀다 한다.
안동권씨의 집단 마을로 '권(權)은 가지가 많아야 번성한다'는 뜻으로 훗날 '가'(佳)로 바꿔 말해 지금의 '가일'(佳日), 또는 '가곡'으로 불렀다. '가곡지'(佳谷池)는 이러한 마을 이름에서 유래됐다.
가곡지의 유역 면적은 0.16㎢, 만수 면적은 0.08㎢이며, 유효 저수량은 124㎥이다. 저수지 앞으로 너른 풍산뜰에 농업용수를 보내고 있다.

◆아담하지만, 감동은 깊고 넓다
이 저수지에는 가일마을의 거부 조수만의 전설이 오랫동안 교훈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수만은 엄청난 재산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역으로 정권을 잡아보겠다고 문경새재에서 모의를 이르켰다가 아들 삼형제와 참수 당했다.
이때 조정은 조수만의 집터와 선대의 묘터에 넘치는 양기가 화를 부른 것으로 판단하고 집터를 허물어 저수지를 만들었다 전해오고 있다.
몇해 전 저수지를 한바퀴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데크길로 단장했다. 어른 걸음으로 한바퀴를 도는데 20여 분이면 충분하다. 마을과 가장 먼 저수지 끄트머리 물 가까이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데크에 서면, 마을과 뒷산이 물속에 잠겨있는 모습에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게 한다.
저수지 입구에 버티고 선 300년 회화나무나 200년 왕버들나무를 비롯해 마을 고택마다 수백년 버티고 자란 노거수들이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저수지 입구 300년 노거수 옆에는 '달 그네'가 들어서 포토존으로 인기다.
한 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저수지라도 둘레길을 한바퀴 돌면서 마을과 너른 풍산뜰을 바라보면, 가슴 가득 채우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조용하지만, 작고 아담하지만, 전해지는 감동은 깊고 넓다.

◆저수지와 마을이 하나의 둘레길
이 저수지는 마을과 따로 뗄 수 없는 곳이다. '저수지 한바퀴'로만 그치면 너무 아쉽다는 말이다. 저수지와 마을이 하나다. 저수지와 마을 구석구석을 함께 걷고, 눈으로 넣어야 제대로다.
가일마을은 숨어있는 명소다. 바깥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그제서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즈늑하게 늘어선 고택들과 마을을 품고 있는 뒷산이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을이다.
저수지를 지나 마을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화산(花山) 권주(權柱) 선생의 종택인 병곡종택과 수곡고택, 권성백고택, 남천고택, 야유당과 권오설 열사 생가터 등 역사적 건축물들을 둘러볼 수 있다. 수곡고택은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카페'로 탈바꿈했다.
마을 왼쪽으로 걷다보면 울울창창 솔숲을 만날 수 있다. 마을에 바람이 드는 것을 막는 일종의 방풍림(防風林)이다. 바로 곁에는 최근까지 아이들이 뛰어놀았지만, 도청이 들어서면서 문을 닫은 풍서초등학교가 있다. 지금은 역사문화박물관으로 새로 꾸며졌다.
가일마을 뒤의 주산인 '정산'(井山)은 산꼭대기에 우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곧장 남쪽으로 흘러내린 야트막한 능선이 가곡1리와 가곡2리를 가르고 있다.
정산의 두 봉우리가 삼태기처럼 감싸안고, 다시 앞에 가곡지를 깔때기처럼 연결해 놓은 지형을 이룬다. 그리해 식수의 일정한 공급과 농수에 필요한 수량 확보를 가능하게 하여 가일마을의 약한 수세를 보완했다.

◆푸른 물·뒷산 어우러진 배산임수 길지
학가산 줄기가 서남으로 뻗다가 풍산평야 모서리에서 두 봉우리를 만들어 마을 뒤쪽으로 암벽이 병풍처럼 둘렀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동서로 흐르는 천혜의 명당 마을이다.
일찍이 이 마을에는 고려때 왕씨에 이어 류씨가 살다가 조선초기에 들어 안동권씨들이 입향해 집단부락을 이룬 곳이다.
조선 세종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1403~1461) 선생이 입향조다. 그는 이 마을 부호였던 장인 류서로부터 부근의 임야와 많은 전답을 물려 받으면서 이곳으로 옮겨 살았다.
권항은 1441년에 문과에 급제해 감찰로 명나라를 다녀와 거창현감과 호조정랑, 성균관 사예 등을 역임하고 세조 2년에는 영천군수로 부임해 그곳에서 59세로 별세했다.
이후 500년간 이 마을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배출돼 영달과 공명을 탐하지 않고 도덕과 학문을 실천했으며 구한말에는 권오설 등 구국운동에 이바지한 지사 여럿이 광복 대업에 참여했다.
이 마을은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풍요한 영향으로 풍속이나 인정 또한 부드러워 지주들은 소작농들이 부족한 곡물을 내거나 아예 못낼 때도 따지거나 독촉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넓은 저수지를 만들어 언제나 푸른 물이 넘실대고 뒷산과 어우러져 배산임수 전형의 마을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양쪽으로 울창한 송림을 조성해 바람이 들고 나는 것을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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