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카이사르. 젊은 시절 그는 평민에게 사랑받는 지도자였다. 청년 시절 말 한마디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귀족파 정적 술라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평민파를 지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카이사르의 이런 모습에 평민들은 큰 지지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로마에서 더는 맞수가 없게 되자 카이사르는 스스로 종신독재관에 오르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늘날로 치면 계엄령 시기의 대통령 같은 막강한 위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회 역할을 한 원로원을 무시했다. 공화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같은 강력한 권력욕과 명예욕은 그를 지지한 평민들조차 당황하게 했고, 결국 그가 암살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카이사르가 '선을 넘는 자기 심취형'이었다면,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포기를 모르는 야심형'이었다. '(인간 이상의) 존엄한 자'라는 뜻의 호칭이 무색할 만큼 그의 시작은 미약했다. 19세가 되던 해 그의 먼 친척이던 카이사르가 갑자기 살해당하며 신변이 위태로워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납작 엎드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살았을 테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떡잎부터 달랐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정계에 뛰어들었고, 천천히 정치 선배들을 앞지르면서 로마의 일인자가 됐다.
이때 그는 카이사르와는 정반대의 '본색'을 보였다. 정점에 섰을 때조차 통치에 앞서 원로원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었다. 결국 로마 첫 황제가 된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팍스 로마나'로 불린 평화시대를 이끌다 77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평화 시대가 막을 내릴 즈음 등장한 로마 제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본색'도 주목할 만하다. 그의 본색은 '함께 다스리는 협치형'으로 위기관리에 특히 탁월했다. 하지만 그는 황가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인물이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장군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아버지가 해방 노예였을 정도로 출신이 미천했다. 다만 두 전임 황제가 모두 급사하자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과감하게 공개 석상에서 정적의 목을 치고는 군인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된다.
이렇게만 보면 권력욕이 상당한 인물인 듯 싶지만, 실제론 현실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큰 제국을 홀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마자 권력을 아낌없이 나눴다. 황제와 부황제 두 명씩 다스리는 '4제 통치'로 로마의 번성을 이끌었다. 특히 부황제들이 능력을 맘껏 펼치도록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난 로마사 유일의 황제였다. 60세에 은퇴한 그는 고향 근처에서 양배추 농사를 짓다 생을 마감했다.
로마사 전문가인 김덕수 서울대 교수가 쓴 '지도자 본색'은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사의 가장 굴곡진 500년을 이끈 지도자들의 본색을 탐구한 책이다. 그라쿠스 형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 로마를 대표하는 9인의 지도자를 소개하고, 그들이 정점에 선 순간 내비친 '본색'이 제국의 운명을 어떻게 갈랐는지를 살핀다.
지은이가 지도자의 본색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운동이 실패로 끝나며 국론이 분열된 로마는 무려 100년간 내전을 치렀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이 정당한 이유 없이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라쿠스 형제의 본색이 '나만 옳다는 고집형'이 아니라, '귀를 열어놓는 대화형'이나 '원칙 있는 패배형'이었다면 로마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평화롭게 개혁을 완수했을지 모른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5년 만에 여야 정권이 바뀌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묵직하다. 272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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