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5>베네데타(2021)

권력·쾌락을 탐한 수녀…성녀인가 악녀인가
17세기 이탈리아 수녀원서 일어난 실화 바탕 영화

감독: 폴 버호벤

출연: 비르지니 에피라, 다프네 파타키아

러닝타임: 131분

17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파샤. 총명한 어린 소녀 베네데타가 수녀원에 들어온다. 18년 후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수녀원을 찾아온 부모에게 예수의 환영을 보았다면서 그의 신부가 됐다고 말한다. 집에서 도망쳐 나온 소녀 바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가 수녀원에 들어와 베네데타를 돌보게 된다. 그러면서 둘은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영화 베네데타. (주)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베네데타. (주)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성녀인가 악녀인가.'

이 얼마나 도발적인 물음인가. 성(聖)과 속(俗)이라는 극단의 지점을 끌어와 묻는다. '너의 생각은 어떤가?'

'베네데타'는 17세기 이탈리아 수녀원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미국 역사학자 주디스 브라운의 '수녀원 스캔들'이 원작이다. 이 책은 두 차례에 걸친 종교 심문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이탈리아 페샤의 수녀원장이었던 베네데타 카를리니(1590~1661)의 논란 속 행적을 다루고 있다.

감독은 '원초적 본능'의 폴 버호벤(84). '쇼걸' 등 여인의 관능미에 '로보캅'과 같은 폭력성, 말하자면 자극적인 영화로 주목받은 감독이다. 이 영화는 여기에 신성모독이라는 또 다른 도발을 끼얹었다. 그래서 작가들과 토론도 논란이 길게 이어졌고, 심지어 그림을 그려야 할 화가가 자신의 차례를 포기,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시인은 여러 정신분석학 동영상을 소개하며 자신의 시를 설명하기도 했다.

논란의 '베네데타'가 그려낸 수면 위를 흐르는 영화의 메인 스토리는 이렇다. 독실한 수녀 베네데타가 어느 날 성흔(聖痕)을 보여주며 예수의 아내가 됐다 주장한다. 거룩한 체험을 확인한 교구의 힘을 얻어 수녀원장이 되지만, 어린 바톨로메아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돼 화형을 당할 상황에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베네데타는 당시 창궐하던 페스트를 빌미로 군중을 선동해 화형을 피하고, '70세까지 수녀원에 갇혀 살았다'는 자막으로 영화가 끝을 맺는다.

과연 그녀의 성흔은 진짜일까? 폴 버호벤은 두 번째 종교 심문기록을 바탕으로 베네데타의 성흔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에 무게를 싣고 있다. 깨진 유리 파편 등을 보여주면서 그녀의 자해라고 믿게 만든다. 그렇다면 베네데타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베네데타'는 동성애적 묘사와 노출, 당시 구교의 타락과 부패 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폴 버호벤적인(?) 화법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여든 중반의 감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마치 미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뜯어보니 영화는 많은 상징으로 또 다른 서브 시나리오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화가와 시인이 잘 포착해 작품화했다. 화가 김건예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작품으로 '베네데타'를 해석했다. 높은 교회 건물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힌 베네데타의 나신을 중앙에 배치했다. 화형이라도 당하는 듯 타오르는 붉은 바탕이다.

화가는 "주체성의 화신으로 베네데타를 묘사했다"면서 "그녀는 사회적 억압을 깨는 한 인간의 거대한 도전을 성흔으로 시도했다"고 했다. 베네데타가 행한 것이 남근의 질서가 장악한 세계를 깨고 권력을 장악해가는 욕망의 드라마라는 것이다.

베네데타는 부모의 금권으로 수녀원에 의탁된다. 수녀원 가는 길에 산적을 만나지만, 종달새를 통한 어린 베네데타의 기지로 모면한다. 이때 이미 종교적 권력의 힘을 체득한다. 수녀원 첫날 넘어진 성모상에 깔리지만 상처 하나 없는 기적도 경험한다. 세월이 흘러 20대가 됐을 때 세인들의 성인 숭상이 재물과 권력을 수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 교구 또한 성인 탄생으로 막대한 기부와 믿음을 얻었다. 성흔의 기행은 그녀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베네데타의 행동은 사기꾼의 거짓과 다른 점이 있다. 자신이 굳게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는 환상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목적에 부합시킨다. 예수의 아내가 되고, 급기야 자신이 대언(代言)으로, 부활로 예수가 돼 간다. 가장 진실된 프로파간다를 실행한 것이다.

권력을 향한 고통스러운 행로에서 그녀가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쾌락의 욕망이다. 시인 장옥관은 '너는 자연, 너는 나의 불꽃'으로 바톨로메아와의 동성애 근원을 그렸다. 삭제된 엄마를 되찾기 위해 내가 엄마가 되고, 넌 내가 돼 엄마를 살려야 했다고 적고 있다. 무슨 뜻일까. 시인은 철학자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로 풀어냈다.

상상계는 아이가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거울 단계이다. 흥미롭게 영화에서 베네데타가 동성애로 진입되기 전 몇 차례 거울이 등장한다. 베네데타가 "이쁘다"고 할 때 바톨로메아가 "거울이 없어 몰랐다"고 말한다. 상처 있는 나이든 수녀의 가슴을 보고 베네데타가 거울로 자신의 가슴을 보기도 한다. 흥미롭게 이때 베네데타와 바톨로메아는 함께 화장실에서 배설을 한다. 프로이트의 인간발달 단계로 볼 때 항문기인 셈이다. 베네데타가 수녀원 첫 날 넘어진 성모상의 젓을 빠는 행동 또한 프로이트의 구강기로 이 모두를 라캉은 상상계로 구분했다.

아버지의 개입으로 엄마의 남근이 되고자 하는 아이의 욕망이 좌절된다. 상징계는 아버지가 속한 질서를 받아들이는 주체화 단계이다. 이때 아이는 남근이 되려는 욕망에서 남근을 가지려는 욕망으로 이행한다.

동성애는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의 단계로 라캉은 해석했다. 시인은 "동성애는 아버지라는 상징계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엄마의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고, 동성애 파트너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 엄마의 향락을 추구하는 구조"라고 했다. 시인은 동성애는 베네데타의 채워지지 못한 욕망이 흘러가는 자연이고, 바톨로메아는 그녀 속에 불꽃을 끄집어낸 부싯돌로 묘사한다.

시인은 베네데타를 잔 다르크로 확장시킨다. '남근의 악력으로 구축한 이 완강한 질서, 그 철조망을 끊어내는' 화형장의 화신으로 보았다. 시인은 영화 속 상징과 단서를 시 속에 빼곡하게 채웠다.

베네데타가 화형장으로 향할 때 당나귀를 요청한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탄 당나귀이다. 바톨로메아가 "날 미워하지 말라"고 말할 때 베네데타는 "괜찮아. 난 배신당해야 해"라고 말한다. 유다를 염두에 둔 것이다. 종달새를 비롯해 바리새인, 신약의 음성 등 시어도 마찬가지다.

'베네데타'는 여성주의자들에게도 비난을 받은 영화다. 여성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무절제한 노출을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함께 토론한 작가들은 영화의 노출이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보다 교황대사가 보여준 타락의 단죄, 시대의 억압, 운명의 거부 등 베네데타의 주체성이 돋보였다고 했다.

토론 이후 폴 버호벤 감독이 숨겨놓은 수수께끼의 퍼즐을 어느 정도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화가가 그린 십자가에 매달린 베네데타의 나신은 시인이 말하는 '이 세계의 무지에 묶일 수밖에 없지만' 끝내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더욱 강렬해 보인다.

김중기 영화평론가

◆그림_김건예

김건예 작,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60.6×72.7㎝, Acrylic on Canvas, 2022.
김건예 작,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60.6×72.7㎝, Acrylic on Canvas, 2022.

◆시_장옥관

너는 자연, 너는 나의 불꽃

장옥관

너는 아니? 너는 나야

네 사랑의 메아리가 가닿은 거울이라는 거지

바톨로메아야,

올리브 가지 아래 양 떼와 살 섞으며, 거친 마로 짠 홑겹을 걸친 너

는 벌거숭이 자연

한나절의 태양이며 풀잎에 마르는 이슬

팔뚝의 솜털을 건드리는 바람과 뒹구는 자연

대지의 젖가슴을 지닌 구릿빛 미소

말[言語]의 굴레에서 벗어난 망아지 그래서 넌 너의 아버지와 오빠들

의 원초적 자연이 된 거지

그런 네가 어느 순간 부싯돌을 부딪쳐

내 속의 불꽃을 끄집어낸 거야

네가 없을 때, 나는 캄캄한 밝음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얼굴이었지 그러나 편안했어, 목자가 돌보는 한

마리 양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나라는 걸 안 순간,

난 예수님의 진정한 신부를 예감했어

아홉 살을 영혼의 감옥으로 밀어 넣은 아버지의 돈과 채찍, 거기서

날 해방시켜 주었지

수녀원의 첫날, 성모님이 내 입술에 물려주셨던 그 젖이

하나의 계시였을지도 몰라

난 삭제된 엄마를 되찾아야 했어 내가 엄마가 되고 넌 내가 되어 엄

마를 살려내야 했었어 고통을 통해 황홀경에 이르는 합일

그건 예수님의 뜻이었어

내 가슴에 펄떡이는 심장 넣어주신 당신

죽음 직전까지 춤추며 접신하는 이슬람의 수피들처럼

우린 함께 금단의 과실을 따 먹었지 그건 기적이었어 성모님이 딜

도가 되어 우리를 열락(悅樂)으로 이어준 거지 그래 맞아,

화형의 십자가에 매달린 잔 다르크는

들었을 거야 남근(男根)의 악력(握力)으로 구축한 이 완강한 질서, 그

철조망을 끊어내는 순간에 들려온 신약(新約)의 음성

그것은 성전을 장악(掌握)한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낯선 목소리 그것은

익숙한 손바닥을 대못으로 뚫어버린 사건

비로소 호밀밭의 호밀은 열심히 저의 향기를 익히고

당나귀 히힝 울고, 종달새 노래 하늘을 수놓았지

아, 어쩌랴 네가 살아야 할 땅과 내가 가야할 영토는 기어코 달랐기

에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바톨로메아야, 너는

한 마리의 양, 한 덩이의 순수

비록 우리 이 세계의 무지에 묶일 수밖에 없지만, 저물녘 부엌엔 촛

불을 켜두자 그것은

한번 들어오면 끝내 꺼지지 않을

황홀한 빛!

유즙과 애액이 흥건한 그 빛!

화가 김건예
화가 김건예
시인 장옥관
시인 장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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