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딸이 계속 군대 이야기를 물어본다. '신병'이란 드라마가 화제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훈련병 시절 내가 사고를 쳤던 기억이 문뜩 떠올랐다.
20여 년 전, 신병훈련소에서 내 동기 하나가 '고무링'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하얗게 질린 그에게 곧 구원의 메시지가 내려왔다. 사회에서 본 좌익용공사범이나 간첩 등을 신고하면 상을 준다는 신교대장의 훈시가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곧바로 손을 들더니 몇 시간 뒤 해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옆집 아저씨가 이상한 기기로 북과 교신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지어냈지. 그러니 고무링을 하나 주더라고."
며칠 뒤, 내게도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새벽에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원사 한 분이 오더니 내게 총을 잠깐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난 당연히 총을 빌려드렸다. 어른이 뭘 부탁하는데 그걸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이 원사는 아주 못된 어른이었다. 잠깐 빌려달라고 해 놓고선 내 총을 들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내가 총 없이 털레털레 복귀하니 중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나만 빼고 중대원 40명 모두가 얼차려를 받는 난감한 처분이 내려졌다. 난 결국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 좌익용공사범 신고하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교관은 깜짝 놀라더니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누군가 앞에 앉혔다. 나는 고무링 따위가 아니라 무려 K2 소총이 걸린 상황이었으니 보다 사실에 기반한 성실한 밀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시위하다 잡혔을 때를 대비해 선배들이 일러준 메뉴얼을 폭넓게 원용하기로 했다. "제가 다니던 단대의 학생회는 대경총련이라는 이적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회장은 XXX이고 부회장은 OOO입니다." 대단한 밀고를 한 것 같지만 사실 이건 "감독은 벤투고 주장은 손흥민입니다."와 같은 이미 만천하에 다 공개된 정보에 불과했다.
핀잔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순간, 초짜 장교는 고무된 표정으로 그들과 얼마나 친하냐고 되물어 왔다. "그냥 술 몇 번 마셨습니다." 장교가 좀 더 말해보라고 종용하기에 나는 아는 대로 다 털어놨다. "X는 맥주보다 소주를 더 좋아했습니다.", "O는 술을 마시면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X는 취하면 오바이트를 자주 했습니다." 전부다 하나마나한 소린데, 눈을 동그랗게 뜬 장교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프로파일링이라도 되는 듯 진지하게 받아 적고 있었다.
그날 나는 학우들을 배신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우리 군을 기만한 것도 아니었다. '비운동권'이었던 나는, 실제로 고문을 당했다 해도 그 선배들의 고약한 술버릇 외에는 아무 것도 토설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밀고의 대가는 역시 달콤했다. 나는 내 총을 돌려받았고, 내 전우들 또한 억울한 원산폭격으로부터 즉각 해방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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