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는 지귀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오두막과 하늘에 피어오르는 연기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만 인식하며 말이다. 그러다 점점 숲이 사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이내 탁 트인 시야에서 옹기종기 모인 채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귀가 말하던 장터에 도착한 것이다. 미소는 이곳에 도착하면 다른 누군가를 따라가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어젯밤 집 주인처럼 검정색에 감춰져 있었다. 제 옆에 선 지귀를 제외하고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만약 이곳이 소설 속이라면 주요 인물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갑자기 마구잡이로 서 있던 사람들이 난데없이 중앙의 길을 트기 시작했다. 지귀는 멀뚱히 서 있다가 덩치 큰 상인에 휩쓸려 중앙에서 먼 자리로 밀려갔다. 저 멀리로 가면서 지귀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유난인지 알 수 없었고 이런 경우 없는 상황이 있냐며 중얼거렸다.
"오늘 왕께서 이곳에 행차하신다고 합니다."
옆에 선 짐꾼이 지귀에게 은밀히 말했다. 그러자 큰 나발 소리가 나더니 많은 호위와 관리들 사이로 왕이 보였다. 검은 사람들 속에 미소는 왕의 얼굴을 분명 보았다. 아니 보였다.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이 오랜만이라 놀랐고 그 왕이 선덕왕인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놀랐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웠다. 사찰 내에 있던 석탑은 경주에서 보았던 석탑과 유사했고, 주말에 읽은 책 속 선덕왕의 초상화가 그와 닮았기 때문이다. 왜 미소가 이 세계에 온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던 자신이 서라벌의 한 장터에 오게 되다니 이건 시간의 문을 넘은 것 같았다. 장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를 존경하듯 바라봤고 그건 지귀도 마찬가지였다. 지귀는 사람들 틈에서 선덕왕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왕의 행차가 끝나자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미소는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지귀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귀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왕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작은 입을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왕의 이름만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그 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자세히 보면 왕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붙은 건지 지귀의 머리 위에는 빨간 물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실리콘 보다 물컹해 보였다. 풍선 보다 말랑해 보이는 그것은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지귀의 머리 위에서, 지귀를 잡아먹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 와중에 여전히 지귀는 정신 못 차렸다. 미소는 그의 어깨를 연속해서 때렸고 반동 없이 통과되는 자신의 손을 무기력하게 바라봤다. 머리 위의 빨간 물체만 몸집을 키워갈 뿐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까지, 모든 상인들이 짐을 챙겨 떠난 이 시간까지 그는 선덕왕을 향한 사랑을 외쳤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에 불과했으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광기어린 눈빛만 남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서 차츰 거리를 두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실감했다. 그가 미쳤다고 말이다. 낮이 돌아오자 그는 장터 옆에 있는 마을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그때 미소는 얼굴이 점점 사라지고 빨간 막에 둘러싸인 그를 마주했다. 시끄럽다고 물을 뿌리는 사람도 있었고 마을의 관리가 끌고 가 그를 벌한 적도 있었으나 굴하지 않았다. 미소는 마치 그가 누군가에게 먹힌 것만 같았고 끝내 검은 사람들 틈으로 걸어가며 그와 멀어졌다. 매일 똑같은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지점부터 같은 골목길을 반복해서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길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느 곳에 가야할지도 몰랐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나의 하나뿐인 왕, 선덕왕. 진심을 다해 사랑합니다."
골목길에 앉아 있던 미소는 낯익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멀어졌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그를 만났다. 반나절을 걸어 도착한 곳이었기에 마주할 거라고 생각 못했다. 미소가 일어서서 발걸음을 뗐을 때, 마침 행차 중인 선덕왕이 보였다. 어쩌면 선덕왕을 따라가는 것이 더 나을 거라 판단해 그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언뜻 본 지귀는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사랑을 외쳤고 주변에 서 있던 관리들이 곧바로 그를 붙잡았다. 그 소란에 왕도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미친 자가 왕께 달려들고자 하여 관리들이 붙잡은 모양입니다."
"왜 붙잡은 것입니까?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광기어린 사람의 애정 또한 고맙게 받아들이는 선덕왕에게서 자비로움을 느꼈다. 관리는 지금껏 지귀의 행동에 관해 말했지만 왕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말이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지귀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소는 그때 왕이 자신과 동일하게 지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빨간색 막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다음 절로 가는 길이니 그자도 따라오라 전하세요."
왕의 명령 덕에 지귀는 관리들의 손에서 나와 왕을 따라갔다. 처음 왕명이 떨어졌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웅성거렸다. 조심스레 말을 옮기는 걸로 봐서 좋은 말은 아닌 듯 했다. 선덕왕은 절에 도착하여 부처에게 불공을 올렸다. 행렬의 끝에 선 지귀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절 맞은 편 탑 아래에 서 있었다. 미소는 환한 대낮이라 긴가민가했지만 자신이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한 사찰이라고 확신했다. 탑의 위치와 형태, 절의 구조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미소는 왕을 따라 절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했으나 귀한 시간을 방해할까봐 지귀의 곁에서 있었다. 그는 광증이 좀 가셨는지 조용하게 선덕왕이 들어 간 절 입구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절이 가진 위엄 때문인지 얼굴에 붙어 있던 빨간 형체가 많이 흐릿했고 그의 얼굴이 꽤 잘 보였다. 그는 처음에 탑 주변을 맴돌았으나 어느 순간 지친 건지 바닥에 앉았다. 닫힌 절 문을 보며 지귀는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중얼 거릴 때는 다시 붉은 막이 짙게 변했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지루한 듯 하품했고 자지 않도록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귀는 잠들었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불공을 마친 선덕왕이 걸어왔고 탑 아래에서 자는 지귀와 마주했다. 붉은 막이 사라진 얼굴을 보며 왕은 자신의 팔목을 감고 있던 금팔찌를 빼어 그의 가슴 위에 놓았다. 스님을 비롯하여 신하들로 추정되는 검은 인영들을 이끌고 선덕왕이 멀리 떠났을 때쯤 지귀가 눈을 떴다. 먼저 선덕왕이 있던 절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런 불빛도 없었기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자신의 가슴팍에 놓인 금팔찌를 발견했다. 이리 귀한 것은 선덕왕의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고 지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자리에 일어서서까지 금팔찌를 껴안고 좋아했다. 그러나 바보같이 잠에 빠져 왕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갑자기 분노하기 시작했다.

지귀가 억울한 듯 발을 땅에 굴리며 발길질할 때,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막이 불투명한 붉은 형상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지귀가 손에 꼭 쥐고 있던 금팔찌와 지귀의 가슴 부근 쪽이 타올랐다. 불길이 번지듯 팔, 다리를 포함한 모든 신체가 붉게 변했다. 아주 뜨거운 불로 말이다. 불덩이가 된 그는 지금껏 봐왔던 지귀라는 사내가 아니라 괴수 같았다. 자신 또한 뜨거움을 견딜 수 없는지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탑에 불길이 옮겨갔고 그의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와 낙엽에도 불이 붙었다. 미소는 불타는 탑을 보며 아까 선덕왕을 따라 간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선덕왕이 이를 예견하고 대피 시켰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지귀는 주술을 외우듯 누군가를 계속 불렀다. 고통에 휩싸여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움직였다. 미소는 모든 것이 붉게 물드는 이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당신의 이름이 지귀라고 하였습니까?"
열기에 발버둥 치던 지귀가 멈춘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서부터였다. 그 목소리에 불투명하던 막 사이로 지귀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근엄한 얼굴로 서 있는 선덕왕이 있었다. 지귀는 온몸이 불로 타오르고 있으면서도 왕의 목소리에 고통을 상실한 듯 한발자국씩 다가갔다. 마치 그전에 만나지 못한 자신의 한을 풀듯 말이다. 그 욕심 때문인지 더 뜨거운 온도로 타올랐고 그의 얼굴에는 더 단단한 막이 생겼다. 왕은 어째서인지 주변의 관리들을 다 물린 상태로 혼자였고 빠르게 다가오는 지귀가 무섭지 않은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응시했다. 정말 몇 보 남지 않은 거리가 되었을 때, 미소는 왕이 다칠까 염려스러웠다.
"욕심에 눈멀어 모든 것을 태운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선덕왕은 붉게 타오르는 나무와 탑을 허망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주변이 더 중요한 듯 그것들을 소중하게 바라보며 말이다. 미소는 이때 이 세계에서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원망했다. 그래서 간절히 빌었다. 아무나 선덕왕을 지켜주길 바라며 말이다.
"폐하, 어서 불길을 피하세요. 이곳으로 오시면 안전하실 겁니다."
그때 처음 들어보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미소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묘사 기왓골 끝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선덕왕은 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하더니 되물었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표정도 바뀌지 않은 채 말이다.
"내가 이 자를 물리치지 못할 것 같습니까?"
"폐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사찰의 주인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미소는 이 고요한 상황이 걱정스러워 지귀의 동태를 살피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타오르던 불 조차도 멈춘 듯 지귀의 머리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여겼다. 아니 시간이 멈췄다.
"걱정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사찰의 주인이. 이 나라의 주인이. 만약 도망친다면 여기 있는 이것들은 누가 지킵니까? 그저 믿고 봐주세요. 그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발걸음조차 옮기지 않고 단호히 말하는 선덕왕은 이 세계의 군주다웠고 미소는 진심을 다해 그를 믿었다. 그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지킬 영웅이니까.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기왓골 끝의 암막새와 수막새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단단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선덕왕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소는 그 믿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마음 깊은 곳에 차오르는 불빛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눈을 뜨니 미소는 박물관 안에서 그 수막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에 안도했고 이후의 상황을 걱정하다 자신에 찬 선덕왕의 목소리가 생각나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어떻게든 지켜냈을 것이다.
미소는 박물관을 나서며 핸드폰을 켰고 맨 위 상단 바에 있는 문자를 클릭했다.
「최종 시안 보내준 거 확인했어. 오늘 이사님께 보고 드렸고 아마 이대로 진행할 것 같아. 미소야. 이번 프로젝트도 나 믿고 같이 해줘서 고맙다. 우리 다음에도 잘 해보자. 오늘은 푹 쉬어.」
덕명의 진심이 담긴 문자를 보며 미소는 미소 지었다. 문자만 보면 덕명을 향한 일방적인 존경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덕명이 먼저 믿어주고 기다려줬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던 일이었다. 우리의 관계 속에 믿음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게 좋아서 그 문자를 몇 번이고 읽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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