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鄧小平)에 이어 중국 세계 양대 강국(G2)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되는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타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등의 공동 발표에 따르면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던 장 전 주석은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처치했으나 이날 숨을 거뒀다. 향년 96세.
장 전 주석은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의 뒤를 이은 제3세대 지도자로 1989년 유혈 진압으로 막을 내린 톈안먼 사태 이후 1993년부터 10년간 중국 국가주석으로 재임했다. 통치 기간 중 공산당 총서기(1989~2002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9~2004년), 국가주석(1993~2002년)으로 당·정·군을 장악했다.
공산당 파벌인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사)의 수장이었다.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을 물려줄 때까지 중국을 이끌었다. 전임자들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중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다.
1926년 8월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 명문 자오퉁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며 재학 중 장제스(蔣介石) 독재에 맞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46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이듬해 대학 졸업 후 상하이 공장 등에서 일하다 옛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1956년 돌아와서 창춘, 상하이, 우한 등의 공장과 연구소에서 일하며 기술 관료로서 승승장구했다.
1987년 당 정치국원에 오르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 등장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상하이 당 서기 시절인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 때 학생들을 옹호했다가 축출된 자오쯔양총서기의 후임으로 하루아침에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던 장전 주석에게 그해 5월 총서기 자리를 제안했다. 훗날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6월 총서기로 정식 선출된 장 전 주석은 톈안먼 시위를 강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강화해 갔다. 그해 12월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 올랐다. 1992년 덩샤오핑이 사실상 은퇴하고서 1994년 국가주석에까지 오르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해 톈안먼 시위와 구소련 몰락으로 위기를 맞았던 중국 내부 정치를 안정시키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 임기 동안 매년 평균 8%의 경제성장률을 지속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을 계속했다. 1989년 1조 6,922억 위안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5년 뒤 10배로 커졌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 2001년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최권(2008년) 획득 등 세계무대로 진출했다. 홍콩 반환(1997년) 마카오 반환(1999년)도 무리 없이 성공시켰다.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톈안먼 사태 이후 냉랭했던 미·중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고 나서도 후진타오 시대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2007년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후진타오 이후의 지도자로 띄웠다. 2012년 4월 초에는 비밀리에 군부에 '중앙군사위 주석과 총서기는 시진핑이 맡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시 주석 반대세력을 내친 이가 바로 장쩌민이었지만, 시 주석은 '부패와의 전쟁'으로 화답(?)했다. 부패 퇴치를 내세워 사실상 상하이방 대부분 세력을 숙청했다. 장쩌민의 두 아들 장몐헝과 장몐캉도 기술관료와 사업가로 성공했으나 부패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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