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안강읍과 포항 기계면은 낙동강 방어전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힌다. 지리적 특성상 부산 공격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북한군은 이곳에 주력부대를 투입해 이른바 '8월 대공세'를 펼쳤다. 그런 만큼 국군에게도 안강·기계 전투는 절체절명의 것이었다.
9월 초 안강 남쪽 무릉산~곤제봉~호명리에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한 국군은 격전 끝에 이 선을 확보함으로써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곤제봉 전투는 7일간 수차례 고지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15차례가 넘는 공방전으로 쌍방에 막대한 병력 피해를 안긴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40여 일간의 치열한 공방
안강‧기계전투는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안강‧기계 일원에서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 등에 따르면 북한군은 8월 5일을 전후해 낙동강 일대의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북한군의 8월 공세'다. 이로 인해 낙동강 방어선 곳곳에서 위기가 발생하게 되고, 북한군 12사단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 청송~기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남하, 같은 달 9일 기계를 점령한다.
북한군의 기계 점령으로 중동부전선은 위기에 처한다. 북한군이 기계 남쪽 안강을 통해 경주로 들어간다면 국군의 방어선은 동서로 양분돼 대구와 포항이 위태롭게 되고, 향후 부산 방어를 위한 방어선 편성도 어렵게 돼 수습이 불가능한 국면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8월 9일 대구에서 재편성 중이던 25연대를 안강에 급파하고, 뒤이어 기계·포항지구 방어임무를 위해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한다. 이때부터 안강‧기계 일대에선 40여 일 동안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어래산 전투와 기계 탈환
당시 안강에 투입된 25연대엔 재편성을 미처 끝내지 못한 대대도 있었다. 이로 인해 9일과 10일엔 2개 대대만 작전지역에 투입됐다. 병력은 안강 북쪽 6㎞ 지점의 어래산 능선 445고지 일원에 배치됐는데, 전투력 발휘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북한군 12사단은 기계 확보를 국군의 포위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하고 기계 남쪽 어래산 능선 사수에 주력했다. 특히 12일부터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445고지에 병력을 집중 투입해 25연대를 압박했고, 결국 25연대는 북한군 공세에 밀려 분산되기에 이른다.
445고지 확보에 실패한 국군은 13일 기계~포항 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17연대를 이곳에 투입한다. 그리고 16일 오후 6시쯤 44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기계 탈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17연대는 한때 고지 8부 능선까지 진출했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고지 탈환에 실패하는 쓰라린 패배도 맛봤다.
기계 남쪽에서 17연대가 445고지 탈환전을 벌이는 동안, 기계 서북쪽 죽장 방면에선 18연대가 '역포위작전' 계획에 따라 기계를 향해 진격했다. 북한군 12사단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면서 남과 북에서 적을 포위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15일 정자리(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대에서 공격을 개시한 18연대는 16일 구지리(포항시 북구 기계면) 일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지리 서남쪽 1㎞ 지점에 위치한 288고지의 점령은 쉽지 않았다. 18연대 2대대는 결국 17일 새벽 288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앞서 18연대 1대대는 288고지 동북쪽 2㎞ 지점 253고지를 점령한다. 이를 통해 북한군 12사단은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기계 북쪽 비학산으로 철수한다.
17일 오후 18연대는 기계에 진입해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소탕했다. 기계 남쪽 445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17연대도 남쪽에서 협공을 가했다. 이를 통해 기계 인근 북한군은 대부분 격멸되고 일부 병력만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기계 탈환전에서 수도사단은 북한군 1천245명을 사살하고, 무기 및 탄약 다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

◆7일간 공방 벌인 곤제봉 전투
비학산 일대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북한군은 8월 26일 야간 대규모 공격을 재개해 다음날 새벽 무렵 기계를 재점령한다. 전황을 보고받은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동부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연합작전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 미군을 증원한다.
그러나 북한군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9월 2일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기계~안강 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일부 병력으로 서쪽의 18연대를 공격해 아군 방어선을 위태롭게 했다. 결국 서쪽 방어선이 뚫렸고, 4일 수도사단장은 병력을 안강 남쪽의 무릉산~곤제봉~호명리 선으로 철수시킨다.
이 무렵 주력을 안강에 집결시킨 북한군 12사단은 포항에 있던 5사단과 함께 경주를 점령한 뒤 단시일 내에 부산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곤제봉을 1차 공격 목표로 정하고 병력을 집중한다.
안강 남쪽 5㎞, 경주 북방 12㎞ 지점의 곤제봉(289.2m)은 형산강과 안강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를 위해 양측은 곤제봉 확보를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
9월 6일부터 13일까지 7일간 이어진 곤제봉 전투는 주로 야간에 백병전으로 치러졌다. 15차례 이상 공방전이 펼쳐지면서 수차례에 걸쳐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고, 양측의 병력 피해도 컸다. 13일 오후 3시 국군 17연대 2대대가 2시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곤제봉을 탈환하고, 이후 북한군이 공격을 중단하면서 17연대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
◆국군‧유엔군의 반격 발판 마련
이밖에 호명리를 끝까지 사수한 점도 안강‧기계전투의 주요 성과로 꼽힌다. 호명리는 주변 일대를 감시할 수 있는 낙산이 북쪽에 있고, 안강~포항, 포항~경주 간 도로를 제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였다.
국군 수도사단의 전선 재조정이 있던 9월 4일과 6일, 사단 작전지역 동쪽 호명리에 있던 국군 1연대에 "모서리(호명리 남쪽 2㎞)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2차례 내려진다. 그러나 1연대장인 한신 중령은 호명리 방어진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진지를 계속 유지한다. 이후 9월 8일과 9일 1연대는 적에게 고립된 상황에서 북한군 5사단 10연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방어진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이를 통해 북한군은 작전상 큰 차질을 빚게 됐고, 동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무릉산~곤제봉~호명리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확보함으로써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동찬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전장에서 지휘관 한 사람의 명석한 판단과 결심 그리고 그것의 실행이,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이후 9월 12일 곤제봉 탈환을 계기로 급반전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연결됐다.
16일 반격을 개시한 수도사단은 다음날 형산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18일 안강을 탈환하고 어래산~445고지~145고지~236고지를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북한군 12사단이 이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양측은 4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22일 18연대가 어래산 점령 후 봉계동으로 진출하고, 기갑연대가 기계를 재탈환함으로써 40여 일간의 안강‧기계전투는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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