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이 오면 나는 내가 시집 간 첫해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우리 어머님이 그리워진다. 경북여고 3회 졸업생으로 동양자수를 아주 예쁘게 잘 놓으셔서 내게 주신 병풍도, 액자도, 내 신혼 이부자리 자수 베갯모도 직접 수놓아 주셨다.
1974년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한 나는 영천의 고교 영어교사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 당시 스물여섯이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신 친정어머님은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어서 결혼해야 한다며 서두르셨다. 그리고 '시집살이 할 걱정 없다'던 정말 단촐한 둘째집의 막내아들을 만나 겨울이 시작되던 12월 1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큰 시댁의 형님네가 미국에서 개업 의사로, 남편의 친 형님네도 중동 건설로 해외에서 살게 되자, 일 년 13번의 제사와 집안일은 오롯이 우리 몫이 되었다. 게다가 시조모님의 말씀에 따라 남편이 후사가 없는 큰집 시백모님의 양자가 되었고, 나도 남편과 함께 '라이크 학원'을 설립, 경영하며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첫 시조부님의 기일 아침 일찍 찾아뵌 어머님께서 "아가. 오늘이 조부님 기일인데 장은 볼 줄 아느냐? 생선은 사 본적이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나는 "어머님을 따라 시장에는 가봤지만, 생선은 잘 고를 줄 모르는데요"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님께서는 "다른 물건은 내가 이미 사두었다. 생선은 그날 바로 들여온 것이 더 신선하고 좋으니 직접 사야 한다. 제사는 정성이니 한 곳만 보지 말고 여러 곳 둘러보고, 크고 좋은 물건을 잘 골라 사야 한다"하시며 함께 간 곳은 염매시장이었다.
40여 년 전만 해도 제법 큰 시장이었던 염매시장은 시댁에서 가깝고, 물건이 좋았다. 어물전에 가서 먼저 두세 군데 말없이 둘러보시고는, 맘에 드는 가게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시고는 "이 물건이 좋네요, 오늘 우리 어른 기일이니 잘 손질해 주소" 하셨다 "조상께 정성을 다하면 우리 후대가 복 받는단다"고 말씀하시며 값을 깎거나 흥정하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행여나 나이 든 할머니나 구차해 보이는 사람의 물건이 있으면 평소에도 잘 사 오셨다. 부엌일을 돕던 아줌마가 말라버린 채소나 볼품없는 물건이라 손질하기 힘들다며 투덜대면 "농사지어 제때 주인 못 만나 그러니, 우리가 좋은 주인이 되어 잘 만들어 보자"라고 다독이시며 맛있게 요리해 내셨다.
겨울 제사 때 특별히 잘 하시던 "주악"떡은 시어른이 좋아 하시던 것으로 찹쌀에 막걸리를 넣어 만드는 작은 송편인데 기름에 구워내어 아주 맛있었다. 치자로 노란 물을, 쑥을 곱게 갈아 녹색을, 검은 깨를 갈아 검정색을 내고, 참깨나 잣으로 속을 넣고 기름에 튀겨 꿀이나 조청을 발라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 손이 많이 가는 떡인데도 자주 만들어 손님 접대와 시어른 후식으로 내셨다. 까다롭고 힘들지 않으신가 여쭈어 보면 "내 손이 조금 고되어 다른 사람이 맛있다면 그게 나의 행복이더라" 하셨다.
한 번은 무슨 일로인가 남편과 의견이 맞지 않아 화가 난 채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그대로 친정으로 가기도 싫어 망설이며 걷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가게 된 곳이 어머님이 계신 동문동 시집이었다.
어머님은 부끄럽고 난처한 나를 작은 찻집으로 데려가셨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두고, "이렇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선택의 순간에 망설여진다면, 훗날 내 자식들이 '어머니, 그때 그 일 참 잘 하셨소' 해 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결정이 쉬울 게다" 하시며 가르쳐 주셨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허둥대며 지내는 명절제사에 올해는 나도 그리운 어머님을 생각하며 주악을 만들어 올려야겠다.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오셔서 제가 정성들여 만든 주악떡 잘 되었나 맛보아 주셔요."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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