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위기를 모르는 게 진짜 위기

박상전 논설위원
박상전 논설위원

30년 전 해외에서 티본스테이크를 처음 맛봤다. 부드러운 안심과 기름진 등심을 한입에 넣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컸다. 귀국 후 다시 찾았으나 허사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소고기를 11개 부위로만 도축해야 한다'는 규제 때문에 안심과 등심은 분리 정육 했다. 5년 전에야 관련 규제가 사라지고 한우 티본을 맛볼 수 있었다. 기대했던 맛과 달랐다. 귀동냥으로 맛보게 된 미군 부대의 티본이 추억의 맛과 비슷했다. 맛의 비결을 물었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라는 동문서답이다. 설명은 이렇다. 한국은 현재 종전국이 아닌 휴전국이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전쟁 중이어서 전장의 사기 진작을 위해 특별 식자재를 제공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냉동육이 아닌 냉장육이다. '육류 선진국'의 최상급 고기가 특별기를 통해 신선한 상태로 공수되다 보니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직 전쟁 중이라는 현실을 깜빡 잊고 살 때가 적지 않다. 우리보다는 주변국의 우려가 더 커 보인다. 미국은 주한 미군에게 별도의 생명 수당을 지급하는데 전쟁 지역이라서 그렇다. 미국이 느끼는 한반도에 대한 체감 긴장도는 최근 북핵 연구 기관인 미들베리 국제연구소 연구진의 한 기고문이 보여 준다. 연구진은 "북한의 전쟁 준비 메시지는 더 이상 허세가 아니다"며 "김정은이 전쟁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북한의 독재자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징후가 많다'는 제하 기사를 통해 "전쟁 중인 러시아를 돕는 대가로 북한은 식량과 석유, 첨단기술을 지원받고 있기에 한·미·일 경제 제재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도발 가능성에 대한 배경을 설명했다. 여기에 중국과 대만 간의 긴장 고조,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태평양 전선의 전술 변화 등 한반도에 드리운 적신호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켜지고 있다.

최근 북한이 보여 준 호전성도 유례없이 강하다. 남한을 주적으로 명시한 데 이어 헌법에서 '한민족' 개념을 삭제하면서 무력화 기도 의사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백령도 사태'를 재현하듯 서해상에 포사격을 하는가 하면 핵탄두 대량 생산을 공언했다. 우리 측 기술로선 요격이 불가능한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까지 완료했는데 여기에 핵탄두가 실리면 한반도 전역이 '1분 사정권' 안에 든다. 특히 이번에 발사한 극초음속 탄도미사일은 고체 연료를 사용하기에 사전 징후를 포착하기도 어렵다. 수중 핵무기 체계를 완료했다는 노동당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망망대해에서도 북한의 핵 공격은 가능하다.

위중한 상황에서 우리 정치권은 '안보 불감증'의 극치를 보여 준다. 원내 1당 대표는 '우리 북한'이라는 용어를 써 가며 '6·25 남침 주역인 김일성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이다. 국방부 장관에게 '참수 작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며 북한의 심기 경호에 나선 한심한 국회의원도 있다. 북핵 문제에 머리를 맞대야 할 여야는 휴전선보다 더 뜨거운 대치 상황을 연출 중이다. 여야 내부에서도, 반발하는 인사들은 신당을 꾸리겠다면서 뛰쳐나가 대통령과 정부 흠집 내기에만 혈안이다. '남남 갈등이 극에 달해 남파 간첩이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코미디 대사가 웃을 일만은 아닌 듯싶다. 시급히 국내에 멈춰 선 시선을 유라시아와 태평양 쪽으로 돌려야 한다. 현실 직시는 우리가 처한 안타까운 안보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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