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내 조국이 없으면 유랑민 신세가 됩니다. 우리 국민들이 6·25 전쟁의 참상을 바로 알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또 확고한 국가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한 세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 온 100세의 6·25전쟁 참전용사 배수용(경북 경산시 백천동) 옹은 6·25전쟁 발발 74주년을 맞는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4년 경북 영덕군 지품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중 27살이던 1950년 봄 아내를 고향에 남겨 두고 홀로 대구로 나와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할 때 6·25 전쟁이 났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던 그해 8월 대구역 광장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학생과 청년들은 입대해 달라"는 열정적인 모병 연설(육군본부 이명흠 대위)을 듣고 감동해 같은 달 24일 자원 입대했다.

어린 학도병과 청년 등 다른 입대자들과 함께 그는 대구역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밀양역에 도착했다. 근처 창고에서 한 사람에게 가마니 두 장씩 주면서 하나는 요, 다른 하나는 이불로 쓰라고 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3일간 숙영을 한 후 부산 육군본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창설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 대원으로 배치됐다.
그와 전우들은 그해 9월 13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174호에 따라 장사상륙작전에 내려졌으나 태풍의 영향으로 14일 오후 4시 부산항에서 2천700톤(t)급 상륙함 '문산호'에 승선해 상륙작전지로 출발했다.
15일 새벽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 도착해 상륙작전을 폈다. 하지만 육지에서는 인민군들이 3면에서 총격을 가해 상륙을 저지했고, 설상가상 태풍으로 인한 파도에 떠밀리면서 배가 기울고 상륙지점에 도착하기 전 좌초됐다. 파도가 뒤로 밀려 나올 때 상륙을 위해 바다로 뛰어내린 전우들이 배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도 지켜봤다.
"백사장이라 몸을 숨길 은폐물도 없는 상황에서 손으로 모래를 파서 만든 구덩이에 들어가 사격을 하고, 아군 함포와 비행기 엄호 사격 덕분에 그날 오전 9시쯤 상륙작전이 성공했어요. 치열한 전투 끝에 장사리 해안의 거점인 200고지를 점령했고요."

작전 명령부터 남은 부대원들을 구출해 부산항으로 돌아오기까지 8일간의 치열한 이 전투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 부상, 행방불명 다수라는 큰 희생을 치루고 이 상륙작전은 마무리 됐다.
그도 이 상륙작전 때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북한군 쏜 총알이 배낭과 탄띠에 스치면서 구사일생했다. 계속된 전투에서 적의 박격포탄 파편이 대퇴부에 박히는 부상도 입었다.
"당시의 전투 장면이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로 아비규환이었어요."
장사상륙작전에서 생환한 배씨와 전우들은 그해 10월 독립제1유격대대가 해체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국군 2사단 32연대로 배치된 그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던 중 1951년 1월 1일 경기도 가평지구전투에서 어느 초가집 민가 뒤뜰에 숨어 있다가 적군의 공격을 받고 변소 잿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간신히 또 목숨을 구했다.
이후 보충대와 경북지구병사부사령부에서 근무하다 휴전 후 1954년 4월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6·25 참전 공로로 충무무공훈장(1954년 4월)과 화랑무궁훈장(1954년 10월)을 받았다.
그는 전역 후에도 장사상륙작전 때 목숨을 잃은 전우들을 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그는 1980년 최재명, 강정관 등 옛 전우들과 함께 '장사상륙작전 참전유격동지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동지회는 결성할 때부터 장사리에서 매년 9월 14일 위령제를 거행해 왔다. 석일산 스님 등의 도움으로 1991년 위령탑을 건립했고, 2020년 11월 장사상륙전승기념관 준공의 결실을 보는데 기여했다. 이 동지회 결성 당시 10여명에 불과했던 회원이 한때 50여명까지 늘어났지만,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 지금은 몇명만 생존해 있다.

배 옹은 경산시 무공수훈자회 창설 멤버로 활약했고, 이후에도 경북과 경산의 6·25 참전유공자회와 상이군경회 등 보훈단체에서 회장이나 간부를 맡아 활동했다. 지금도 이들 보훈단체의 고문 등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매일 새벽 4시30분에 기상해 목욕탕에서 목욕과 운동, 노인복지회관·장애인복지관에서 영어 일어와 컴퓨터· 스마트폰 기능 배우기, 오후에는 경산보훈회관에서 활동을 하고 밤 10시 잠자리에 드는 등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많이 움직이고,무엇인가 배우려고 하고, 연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다닐 정도로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와 규칙적인 생활이 장수 비결이다.
이 때문에 그는 100세에도 불구하고 안경과 보청기를 끼지 않고 허리가 꼿꼿할 정도로 건강하다.
"전후세대, 특히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저가 죽을 때까지 6·25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내 나라 조국이 없으면 유랑민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으니 어쩌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될 겁니다. 확고한 국가관을 가져야 합니다."
배 옹은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장사상륙전승기념관 주위에 묻혀져 있는 무명용사의 유해들을 하루빨리 발굴해 국립묘역에 안장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호국정신을 기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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