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안 예쁜 얼굴은 없어요."(정은혜 작가 주연 영화 '니얼굴' 포스터 카피)
10여 년 간 캐리커처로 담아온 인물이 4천명을 훌쩍 넘는다. 그의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감탄하고, 누군가는 미소를 짓는다. 옆 사람을 꼭 안아주는 이가 있는가하면,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인 정은혜 작가의 작품은 거침없고 강렬한 선과 색채 속에 어딘가 모를 따뜻함과 뭉클함이 담겨있다.
그의 그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통해서다. 작가는 영옥(한지민 역)의 쌍둥이 언니 영희를 연기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가 나온 지 3년인데도 인기는 여전하다. 지난 24일, 북구 어울아트센터 전시장에 들어선 그에게 관람객들의 사진 요청이 쏟아졌다.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거나 포옹하는 작가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날 작가가 센터를 찾은 것은 배리어프리 기획 전시 '널 사랑해'의 부대행사 '은혜로운 하루'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널 사랑해'는 정은혜 작가가 대구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첫 전시로, 박종선·임우진·피주헌 등 다른 발달장애인 예술가들의 작품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인터뷰에는 정 작가와 그의 어머니인 만화가 장차현실 작가가 함께 했다. 또 작가와 나란히 앉은 한 사람, 남편 조영남 씨. 이달 초 결혼한 신혼부부답게(?) 인터뷰 내내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이연정 기자(이하 이): 이번 전시에 포옹하는 모습의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평소 포옹을 좋아하나요.
정은혜 작가(이하 은): 네, 저에게 포옹은 사랑이고 만남, 인연이예요. 또 반가움이고, 따뜻함이기도 해요.
장차현실 작가(이하 장): 은혜 씨(장 작가는 딸을 존중하는 의미로 은혜 씨라고 부른다)가 유독 사람들과 포옹하는 사진이 많더라고요. 근데 키가 자그마하잖아요. 늘 머리가 상대의 가슴쯤에 있어 더 폭 안겨보이죠.(웃음) 그런 사진을 골라서 그림으로 옮겨, 2022년 '포옹'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어요. 코로나 팬데믹 때여서 사실 포옹은 위험한 몸짓이었는데, 서로를 껴안는 마음을 잊지 말자는 마음을 담아 보여줬었죠.
이: 많은 사람들이 정 작가의 그림을 보고 감동 받아요. 그림을 보면, 인물을 그릴 때 진심을 다하는 작가님의 마음이 느껴져요.
장: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받은 인상이나 느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그림을 그리잖아요? 근데 은혜 씨는 그런 사심 없이 대상을 그대로 보고 그리는 것 같아요. 예쁘든 안예쁘든, 모두가 각자의 개성이 있고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이: 전시 작품 중에 어머니가 직접 그리고 만든 '팝업북'이 인상 깊었습니다.
장: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과 힘든 학창시절, 20대를 보내고 예술을 통해 삶이 달라진, 은혜 씨의 35년 인생 얘기 14개를 팝업 형태로 만든 책이예요. 2020년에 10개 얘기를 담았다가 올해 늘려 새로 만들었는데 단행본으로 출판할 계획도 있어요.
이: 팝업북에 담긴 얘기 중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장: 은혜 씨가 성인이 되고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사회에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았어요. 갈 데 없이 집에만 있게 되고 퇴행을 거듭했죠. 은혜 씨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삶까지 너무 어려웠어요. 그 때를 저는 동굴의 시기라고 말해요. 그 시기를 끝낼 수 있었던 게 바로 그림이예요. 은혜 씨가 처음으로 그린 그 한 장의 그림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돼 동굴에서 툭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그 부분이 은혜 씨가 그림을 통해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가님은 어떻게 그 한 장의 그림을 시작하게 됐나요?
장: 은혜 씨가 퇴행이 오고 힘들었던 때, 제가 신문에 만화 연재하던 일을 그만 두고 화실을 열었어요. 수강생이 한 50명 될 정도로 꽤 인기가 있었는데, 제일 걱정 됐던 건 아무래도 그 때 은혜 씨가 혼자 집에서 소리 지르고 하다보니 이웃들과 마찰이 있었어요. 데리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에, 돈 줄테니 나와서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했죠.
은: 맞아요.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니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게 보였어요. 걔들 틈에 껴서 엄마가 사주신 연습장에 연필로 그림을 그렸어요.
장: 첫 그림이 잡지에 나온 향수 모델의 사진을 보고 그린 거였어요.
이: 그림 처음 보셨을 때 굉장히 놀라셨겠어요.
장: 너무 놀랐죠. 기쁘기도 하고. 근데 중요한 건, 도대체 내가 왜 이 재능을 몰랐었나 하는 거였어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딸이 뭘 잘 할거라는 기대감을 갖거나, 가능성 있는 존재로 생각을 안했다는 걸 그 때 깨달았어요. 그 이후부터 저의 태도를 반성했고 바뀌게 됐죠.
이: 작가님이 '희망이 된다'는 얘기를 많은 발달장애인 부모님들에게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 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나요?
장: 늘 저를 괴롭혔던 건, 내 아이와 비장애인 아이를 비교하며 우리 아이가 뭔가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에 휩싸여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스스로를 불행하게 했고, 은혜 씨의 그림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부터에야 은혜를 존재 자체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들에게도 고정관념에 싸여서 내 아이를 바라보지 말고,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세계와 가능성에 조금 다가가려고 애써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만들 것이다라고 의도하는 대신, 그가 갖고 있는 고유한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력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많이 달라질 거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 한국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워오며 쉽지 않은 나날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예전과 비교하면 시선이나 인식, 사회적 지원이 좀 나아졌나요?
장: 너무 달라졌다는 걸 몸으로 느껴요. 은혜 작가가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건물에 학원이 많거든요. 예전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아이들이 은혜를 피해서 벽에 붙곤 했는데, 요즘엔 두 손 모으고 인사하고 센터에 놀러오기도 해요. 우선 그런 거리감이 많이 없어졌다고 느끼죠.
은혜 씨가 결혼하고 분가해서 살아요. 사회적 지원은 사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활용해야 주어져요. 저는 부모가 온전히 24시간 케어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걸 이 두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사회적 조건이 받쳐주기에, 제가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은: 저희는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장애예술인 창작공간)에 같이 출근해서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벌어요. 오빠(남편)는 커피를 맛있게 잘 내려요. 활동 보조 선생님과 근로 지원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세요.


이: 작가로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전의 자신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나는 어떤 것 같나요?
은: 드라마에 나오고 난 이전과 이후에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도 물론 저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지금의 관심과는 다른 것이었어요. 대학교를 다니면서 시선에 시달리고, 복지관에서 청소하는 일 외엔 일자리를 얻질 못했죠.
그런데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돈도 벌고, 동료도 있어요. 연애를 하고 결혼도 했어요. 저는 무엇보다 혼자 있는 게 무척 외로웠었어요. 이제 오빠 없이 못살아요. 오빠 없으면 숨이 안쉬어져요. 오빠가 있어야 숨을 쉬어요.
장: 신혼 때는 다 그래.(웃음) 은혜 씨의 말은 일상적인 삶을 당당하게 살고 있어서 좋다는 것 같아요. 비장애인들에게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삶이 이들에게 실현되기까지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이: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궁금해요.
은: 저는 꿈을 다 이뤘어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해요. 결혼해서 행복이 커진만큼 새로운 그림도 많이 그릴거예요. 그림을 통해서 제가 느끼는 이 행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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