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1)알콜 의존 엄마 대신한 11살 가장

지적장애 8살 동생 돌봄 위해 초등학교 지각…친구들에게 힘든 가정사 말도 못 해
알코올 의존증 엄마 대신 동생 샤워부터 밥을 떠먹이는 일상
11살이 되도록 카페에서 음료 처음 마셔…""이렇게 카페가 크고 이쁜 줄은 몰랐어요"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난달 21일 오전 8시쯤 대구 한 5층 빌라. 이곳 꼭대기층 거실에는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소주병 세 개가 말끔히 비워진 걸 보니 은혜(11·가명)는 오늘도 제시간에 등교하지 못할 것만 같다. 술에 취해 잠든 어머니 대신, 지적장애 2급인 여덟 살 동생 은호(가명)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동생.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는 데만 50분이 훌쩍 지나갔다. 은호를 복지관으로 데려다줄 차량 한 대가 집 앞으로 왔다.

"엄마가 술에 취해서 잘 때면 제가 동생을 차에 태워 보내야 해요. 혼자 밖에 두면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니까요. 차에 올라타는 모습까지 눈으로 직접 봐야만 발걸음이 가볍더라고요."

오전 9시쯤 학교에 도착한 은혜. 30분이나 지각했다. 1교시 수업이 한창인데 조심스럽게 교실 뒷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 술 마시다 사고 난 엄마 단속에 급급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은혜가 1교시 수업에 자주 지각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익숙한 질문이 들려오면 은혜는 늘 준비된 두 가지 대답을 꺼낸다.

"늦잠 잤어", "아침에 일어나서 숙제하다가 등교 시간을 놓쳤지 뭐야."

차마 말하지 못한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엄마를 대신해 등교까지 미루고 아픈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집 얘기를 솔직하게 꺼내면서 힘들다고 말하면요…저는 왕따 되거나 찐따 소리 들을 게 뻔해요!"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뛰노는 친구들과 달리 은혜는 느지막이 일어날 엄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눈을 뜨자마자 또 술을 찾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어머니에게 약과 물을 가져다 주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어머니에게 약과 물을 가져다 주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 다행히 엄마는 술에서 깨어 있었다. 그제야 은혜는 한숨을 돌렸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커피를 사다 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집 앞 편의점으로 나섰다. 심부름이 귀찮을 법한 나이지만 은혜는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매일 술을 드시니까요. 엄마가 직접 나서면 또 소주를 사올까 봐 불안해요. 제가 대신 다녀오면 필요한 것만 딱 사서 오니까 마음이 좀 편하더라고요"

엄마는 집안 살림에 무관심한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도맡다가 3년 전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기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혼 과정에서 막내 은호가 지적장애 2급 판정까지 받자 정신적 충격으로 삶을 내려놓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다 보니 주량은 소주 두 병에서 어느새 네 병으로 늘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하면서 결국 사고가 났다. 지난해 3월 만취 상태로 부족한 술을 사러 나섰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 또래들이 소주병 색깔도 모를 나이에 은혜는 술이 백해무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왼쪽 팔 삼두근 파열에다 오른쪽 갈비뼈까지 부러졌다. 은혜는 두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엄마에게 밥을 떠먹이고 샤워도 시켜줘야 했다.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빨래 후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빨래 후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술을 끊으라고 단호히 말해야 하는 것도 은혜의 몫이었다. 모처럼 나선 외식 자리에서 엄마가 소주를 주문하자 은혜는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제발 그만 마셔."

하지만 엄마는 소주병을 비워낸 뒤 자갈이 많은 길에서 넘어졌고, 겁에 질린 은혜는 119를 불렀다.

주로 집에서 술을 마시는 엄마가 외출하는 날이면 은혜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다. 집에 언제 들어오겠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아서다. 하루는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야 엄마, 언제 들어와?"

새벽 1시가 다 되어 들어온 엄마는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은혜를 깨웠다. "나 넘어졌어, 약 좀 발라줘."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은혜는 동생이 깰까 봐 불도 켜지 못한 채, 엄마의 상처를 살펴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 동생 돌봄에 친구들과 멀리하는 은혜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동생의 손을 씻겨주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동생의 손을 씻겨주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엄마의 술을 단속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은혜의 하루는 동생을 돌보는 데 쓰인다. 정신연령이 3~4세에 머물러 있는 동생은 자기 의사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울음을 터뜨릴 때면 밥을 챙겨줘야 하는 신호다.

아직 불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은혜는 밥에 김을 싸서 동생 입에 하나씩 넣어주고 있다. 설거지를 하는 순간에도 시선은 늘 동생에게 향한다.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동생을 씻기는 것도 은혜밖에 할 사람이 없다. "엄마가 예전에 술을 마시다 팔을 다쳐서 연골 주사를 맞고 있어요. 무릎도 안 좋으셔서 구부리는 게 힘들다 보니, 제가 동생을 씻길 수밖에 없어요. 말을 잘 안 들어서 제 몸 씻는 시간보다 3배는 더 걸리는 것 같아요."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생은 가끔 은혜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욕을 쏟아낼 때도 있다.

"놀자고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동생을 돌봐야 해서 숙제가 많다고 거짓말해요. 그런데 때리는 것부터 욕까지 들을 때면 서글퍼요. 그렇다고 몸이 아픈 엄마나 가족에 무관심한 사춘기 언니(12)가 동생을 챙길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제가 해야죠."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동생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동생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주말에 집에 있더라도 온전히 쉬어본 적이 없다. 동생은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던지고도 정리하지 않는다. 모처럼 치킨을 시켜 먹었던 지난달 10일에는 누나 방에서 먹겠다며 고집을 부리다 가방과 인형을 죄다 내팽개쳤다.

동생과 함께 외출할 때면 신경이 바짝 쓰인다.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못할 때면 자리를 박차고 달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문에 은혜는 외출 시 '중증장애인 2급' 안내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편의점에서 3천원짜리 장난감 카드가 있었어요. 우리 형편에는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못 사준다고 했더니 뛰쳐나가더라고요. 차들도 쌩쌩 오가는데 붙잡는다고 힘들었어요."

◆ "저 카페라는 곳 처음 와봐요! 원래 이렇게 이뻤어요?"

지난 5월 14일 오후 3시쯤 학교를 마친 은혜(11·가명)가 대구 집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열한 살이 되도록 은혜는 한 번도 카페에서 음료를 사 마셔본 적이 없다. 매장 안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다. 임재환 기자
지난 5월 14일 오후 3시쯤 학교를 마친 은혜(11·가명)가 대구 집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열한 살이 되도록 은혜는 한 번도 카페에서 음료를 사 마셔본 적이 없다. 매장 안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다. 임재환 기자

같은 달 오후 3시쯤 학교를 마친 은혜가 집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지만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모른다. 이곳 분위기가 낯설기만 하다. 고심 끝에 딸기 스무디 하나를 골랐다.

열한 살이 되도록 은혜는 한 번도 카페에서 음료를 사 마셔본 적이 없다. 매장 안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다.

"이렇게 카페가 크고 이쁜 줄은 몰랐어요. 친구들은 카페에서 스무디나 음료를 마신다고 들었는데 저는 한 번도 따라가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픈 엄마와 동생의 돌봄부터 집안일까지, 어린 나이에 많은 책임을 떠안은 은혜는 또래처럼 편히 놀아본 기억이 없다. 한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춤추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술을 찾는 엄마 때문에 2년 전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했다.

부족한 게 한사코 없다지만 은혜도 꾸미길 좋아하는 영락없는 10대 여학생이다. 친구들이 새 운동화를 자랑하면 부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200만원 가량의 기초생활수급비에서 엄마와 동생 병원비, 월세, 공과금까지 빠져나가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제가 신발 끈을 잘 못 묶어요. 집에 있는 신발은 다 언니한테 물려받은 거라 끈 달린 것뿐인데 신기 어려워요. 묶을 필요 없는 새 운동화를 갖고 싶은데... 우리는 항상 돈이 부족하니까, 저는 그런 걸 사면 안 될 것 같아요."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는 초등학교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몸이 자라면서 저학년 때 샀던 옷들이 맞지 않는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오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면, 몸에 어울리지 않는 엄마 옷이라도 꺼내 입어야 한다.

친구들과 사소한 의견 충돌 속에서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학교에서 친구랑 다퉈서 속상할 때가 있어요. 사춘기라 예민한 언니한테 말하면 싸우기만 할 것 같고, 동생은 말이 안 통하잖아요. 엄마에게는 걱정을 끼치기 싫고요. 그래서 그런 날엔 맑은 하늘을 봐요."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10일 대구의 한 가정집에서 은혜(11·가명)양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하늘은 은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마음의 피난처다. 그래서 그림장에도 쨍쨍한 파란 하늘을 잔뜩 그렸다. 그마저도 동생이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런데도 은혜는 단 한 번도 동생을 미워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의학이 더 발전해서 지적장애 2급이라는 중증 질환도 치료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런 날이 올거라 생각해요. 엄마도 술을 끊고 동생도 저처럼 건강한 하루를 보내면서 평범한 가정이 되는 그러한 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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