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 아픈 가족 손발 역할 "책 한 장 넘길 여유도 없어요"

베체트병으로 시력 잃은 아버지 병원 동행 위해 학교 결석하는 고등학생
돌봄청년 311명 중 음식 준비·설거지 맡는 비율 49.2%…'12살의 나이에 요리 배우기도'
지적장애 가정에 둘러싸인 고3 수험생…가정 폭력 스트레스에 어려움 호소

지난 10일 우민 군이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모습.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어야 할 12살의 나이에 우민 군은 요리를 배웠다. 라면을 끓이며 불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콩나물국과 오뎅탕도 만들어 아버지 식사를 챙기고 있다. 아버지 영석 씨 제공
지난 10일 우민 군이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모습.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어야 할 12살의 나이에 우민 군은 요리를 배웠다. 라면을 끓이며 불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콩나물국과 오뎅탕도 만들어 아버지 식사를 챙기고 있다. 아버지 영석 씨 제공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가족을 등에 짊어진 청춘들이 있다. 아픈 부모와 동생, 조부모를 돌보며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가족돌봄청년'이라 불린다.

또래들과 달리 학업과 교우 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따돌림이 두려워 어두운 가정사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픈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게 살아가지만, 이들이 감당해야 할 심적 부담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 시력 잃은 아버지 병원 위해 '결석'

대구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으로 재학 중인 최우민(16·가명) 군은 한 달에 한 번 학교에서 '인정 결석'을 받고 있다. 아버지 영석(가명) 씨의 병원 진료를 위해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해서다. 영석 씨는 급격히 나빠진 시력으로 사실상 실명 상태라 홀로 외출할 수 없다.

영석 씨의 눈에 문제가 생겼던 건 11년 전쯤. 따끔거림과 간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단순한 안구 질환이라 생각하고 여러 안과를 전전했지만 정확한 병명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다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가면역질환인 '베체트병'으로 인한 시력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증상 발병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왼쪽 눈 시력은 0.03이 채 안 되고 오른쪽 눈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두 돌이 안 됐을 무렵 이혼 후 집을 떠났다. 우민 군은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6년 전부터 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16일 대구 한 카페에서 만난 최우민(16·가명) 군과 아버지 영식(가명) 씨. 우민 군은 한 달에 한 번 학교에서
지난달 16일 대구 한 카페에서 만난 최우민(16·가명) 군과 아버지 영식(가명) 씨. 우민 군은 한 달에 한 번 학교에서 '인정 결석'을 받고 있다. 아버지 영석 씨의 병원 진료를 위해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해서다. 영석 씨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실명 상태라 홀로 외출하기 어렵다. 임재환 기자

병원을 가는 날이면, 영석 씨는 안과부터 류마티스 내과까지 여러 진료과를 돌아야 한다. 우민 군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복잡한 병원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검사실을 오갈 때는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다.

우민 군과 같은 가족돌봄청년들은 집안일의 부담도 함께 지고 있다. 지난해 대구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이 311명의 돌봄청년을 조사한 결과, 음식 준비나 설거지를 맡는 비율은 49.2%로 절반에 가까웠다. 이는 비돌봄청년들과 비교하면 약 20%포인트 높은 수치다.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어야 할 12살의 나이에 우민 군은 요리를 배웠다. 라면을 끓이며 불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콩나물국과 오뎅탕도 만들어 아버지 식사를 챙겼다.

집은 8평(26㎡) 남짓한 작은 공간. 조금만 쓰레기가 쌓여도 금세 냄새가 난다. 우민 군은 등교나 학원을 위해 집을 나설 때 빠짐없이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은행 업무는 초등학생 때부터 터득했다. 숫자가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금 관리까지 도맡았다.

학생이지만 일상은 늘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간다. 모처럼 친구들과의 약속이 생길 것 같으면, 영석 씨에게 병원 예약 날짜부터 묻는다.

같은 영세민 아파트 단지에 사는 할머니(74)의 돌봄도 우민 군 몫이다. 당뇨 합병증에 교통사고까지 겹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파스와 두통약을 사다 드리고 있다. 식사를 거른 날엔 죽이나 도시락을 사 들고 직접 찾아간다.

그런 사이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 300만원에 달하는 치아 교정이 시급하지만 15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에서 아버지 병원비, 생활비 등을 제하면 치과에 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지난 10일 우민 군이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 우민 군은 최근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20점대에 머물던 중간고사 수학 점수가 어느새 1년도 안 돼 90점까지 올랐다. 아버지 영석 씨 제공
지난 10일 우민 군이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 우민 군은 최근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20점대에 머물던 중간고사 수학 점수가 어느새 1년도 안 돼 90점까지 올랐다. 아버지 영석 씨 제공

최근 들어서는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20점대에 머물던 중간고사 수학 점수가 어느새 1년도 안 돼 90점까지 오른 것. 영석 씨는 그런 아들이 자신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쓰자 미안하기만 하다.

영석 씨는 "공부 의지가 생기니까 배우기만 하면 곧잘 따라가더라고요. 제가 눈을 잃게 된 시간이 10년만 더 늦춰졌다면, 이 아이가 이렇게 자기 시간을 희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는 우민이가 없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라고 했다.

아버지를 보는 우민 군의 마음도 복잡하다. 서울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고 몇 년 뒤엔 군대에 가야 해서다. 자신이 없을 때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를 누가 돌볼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아버지는 외출하실 때마다 제 팔을 꼭 붙잡고 걸으세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편하게 기대실 수 없잖아요. 제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제일 놓인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 시력이 얼마나 나쁜지 잘 몰라요. 그걸 아버지가 직접 설명해야 한다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요."

◆ 지적장애 가정에 둘러싸인 수험생

지난 4월 23일 대구 동구의 한 빌라. 거실에 딸린 주방에서 은현 양이 어머니의 집안일을 돕고 있다. 김지효 기자
지난 4월 23일 대구 동구의 한 빌라. 거실에 딸린 주방에서 은현 양이 어머니의 집안일을 돕고 있다. 김지효 기자

척추측만증에 지적장애 1급을 가진 오빠, 그리고 지적장애 3급인 부모. 고등학교 3학년 은현(18·가명) 양은 돌봐야 할 가족이 셋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가족돌봄청년들이 돌보는 대상자 중 '장애인'은 24.2%로, 중증질환(25.7%)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을 제외하고 가족 전체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은현 양의 돌봄 부담은 이미 오래전에 극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지능 연령이 7살 수준에 머무른 오빠(20)를 돌보는 일이다. 오빠는 탯줄에 목이 감긴 채 태어나면서 장애를 갖게 됐다. 수저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조차 익히지 못해 식사 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씻는 일까지 일상 대부분을 스스로 해내기 어렵다.

오빠는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배웠다. 어릴 적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자주 맞았고, 그 모습을 그대로 배운 오빠는 이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빠의 폭력은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제때 복용하지 않으면 감정 조절이 어려운 상태다.

집 안에서 싸움 소리가 나면 책 한 장 넘길 여유조차 없다. 입시만으로도 벅찰 시기에 가정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감당하는 모습은 여느 또래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루는 오빠가 갑자기 집을 나간 적이 있었어요.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몸싸움이 잠깐 있었는데, 동네가 좁다 보니 친구들이 볼까 봐 정말 무서웠어요."

지난 4월 23일 대구 동구의 한 빌라. 은현(18·가명) 양이 침대나 책상이 없는 방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김지효 기자
지난 4월 23일 대구 동구의 한 빌라. 은현(18·가명) 양이 침대나 책상이 없는 방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김지효 기자

그렇다고 부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더라도 바로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줘야 한다. 인터넷 검색부터 회원가입 등 기본적인 휴대전화 조작법까지 옆에서 알려주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있어 고민이 깊다는 은현 양. 입시컨설팅을 받으며 대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수급비가 들어오기 일주일 전부터 끼니를 걱정하는 자신의 형편과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심리·언어치료에만 매달 수십만원이 지출되고 있다 보니 사교육 얘기를 꺼내는 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원비가 많이 올랐어요. 영어와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지금 내신이 많이 불리해요."

그렇지만 은현 양은 홀로 진학 정보를 찾으며 성공에 대한 갈망을 갖고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있다. 서울권 대학 진입이라는 목표까지 세웠다.

"우리 집은 정상적인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요. 제가 부모님부터 오빠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꼭 좋은 대학을 가서 과외로라도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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