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조선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통해 글을 억압하고 말살하면서 사실상 '조선 역사 검열'에 나섰던 일제에 독립운동가들은 붓으로 저항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1909년 2월'출판법'을 제정해 당시 조선에서 간행되는 모든 출판물을 검열토록 했다. 일본에게 출판검열은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일본은 검열을 통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저지하고 민족의식을 말살하고자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검열에 맞서 붓으로 저항 의지를 드러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돼 있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의 문집인 '향산집'의 검열본은 1931년 조선총독부에 제출해 출판검열을 받고 돌려받은 책으로, 독립운동가의 글에 대한 일본의 억압과 말살이 잘 드러나 있다.
향산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 피탈 소식을 듣자 24일간 단식으로 저항 의지를 보이다가 자정순국했다.
이만도의 순국 이후 그의 후손과 제자들은 이만도의 문집을 간행하고자 했는데, 검열을 받지 않고서는 책을 간행할 수 없었다.
검열본은 전체 14책인데, 이 중 본집 2책과 별집 1책을 포함한 3책이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됐 있다. 이때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후 돌려받은 검열본 3책은 '직재집'(直齋集)이라는 표지서명으로 전해 내려왔다.
조선총독부는 책을 검열하면서 문제가 되는 문구나 단어가 있으면, 그 행의 맨 위에 한자로 '삭제'(削除) 두 글자가 표기된 붉은색 도장을 찍었다.
또한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삭제' 도장은 찍지 않았으나 해당 문구나 단어에 붉은색 필기구로 둥근 원이나 줄을 그려 표시했다.
3책 중 중점적으로 삭제를 지시한 부분은 '금상'(今上), '성상'(聖上)과 같이 조선의 임금을 나타내는 부분이나 임진왜란과 관련된 부분이 많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역사를 검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일본이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말살하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향산집'의 검열본은 전체 14책 중 현재 6책의 소재만 확인된다. 나머지 8책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출판이 불허되고 차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출판을 불허한 이유로 "이만도는 일찍이 일본과의 5개 조약 성립 때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반항한 일이 있다. 또 한일병합이 성립되자마자 격렬한 상소문을 남기고 단식하여 자살한 자로, 그 내용은 모두 치안방해에 판단되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치안방해'라고 생각한 서술의 일례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완용 등 5명이 허락한 부분, 이에 분개하여 민영환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부분'이 있다.
이 내용은 이만도의 아들인 이중업이 지은 부록을 요약한 것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 서술을 철저히 배척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향산집'은 제대로 간행될 수 없었고, 해방 이후 194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간행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향산집'의 간행을 둘러싼 갈등은 검열을 통해 조선인들의 글과 정신을 통제하려 했던 일본의 폭압적 통치 정책을 잘 보여준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향산집'의 간행 과정을 통해 일본의 폭력적인 출판검열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의 분투를 확인할 수 있다. 향후에도 이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발굴해 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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